항목 ID | GC09300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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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詩山祠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산4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류호석 |
건립 시기/일시 | 190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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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5년![]()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75년 - 시산사 중건 |
현 소재지 | 시산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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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재지 | 태산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칠보중앙로 130[무성리 25-1]![]() |
성격 | 사우 |
양식 | 목조|팔작지붕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2칸 |
소유자 | 정읍시 |
관리자 | 정읍시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있는 개항기 사우.
[개설]
1907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무성(武城)에서 창의한 최익현(崔益鉉)[1833~1907]을 추모하기 위하여 무성리에 태산사(台山祠)를 세웠으나, 일제 강점기에 훼철되었다. 1975년 시산사(詩山祠)로 이름을 바꿔 중건하였다. 최익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항일 운동가로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대간(臺諫)의 지평과 정언직, 그리고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를 지냈다.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30대 중반 이후로, 1868년 경복궁을 재건하려는 대원군의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데 이어, 1873년 ‘계유상소(癸酉上疏)’를 올려 대원군의 서원 철폐를 비판하고 시정을 건의하였다. 또 일본과의 문호 개방 협상이 진행되자 위정척사 운동의 선두에 서서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외세를 물리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제가 승리하고 을사조약이 억압적으로 체결되자 최익현은 을사조약에 가담한 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등 5적의 처단을 요구하였다. 1906년 74세 때 정읍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최익현은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가 대마도에서 사망하였다.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배향자인 김기술(金箕述)과 김직술(金直述)은 모두 도강 김씨(道康 金氏)로 최익현의 창의에 적극 동참하였다.
[위치]
시산사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산4에 있다. 근처에 송정이 있으며 왼쪽으로 태산선비문화관과 필양사, 송산사 등이 있다.
[변천]
시산사는 1907년 사우가 창건되었을 때는 정읍의 칠보초등학교 자리에 ‘태산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일제 강점기 훼철되었다가 1975년 송산사 옆에 ‘시산사’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새롭게 지었다. 중건 당시 주벽인 최익현 외에 김기술과 김직술을 추배(追配)하였다.
[형태]
시산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형태의 목조 건물이다. 사우 안에는 중앙에 최익현의 위패가 있고, 왼쪽에 김직술, 오른쪽에 김기술의 위패가 각각 있다.
[현황]
인근의 정읍 무성서원을 중심으로 태산선비문화권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주변 일대가 정리되었고, 시산사도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