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교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938
한자 新宗敎
영어공식명칭 New Religion
분야 종교/신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재영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에서 활동하는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종교.

[개설]

정읍은 동학의 뒤를 이어 나온 증산교(甑山敎)의 교조 강일순(姜一淳)의 출생지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조선 후기 사회 질서를 재편성하려는 사회 변혁 운동의 중심 사상이 되기도 하였던 미륵 신앙이 활발하였던 지역이다. 미륵 신앙은 일제 강점기에 발생된 대부분의 신종교에 나타나고 있다. 신종교 가운데 보천교(普天敎)정읍시 입암면 대흥리에 본부를 두고 있었고, 태인의 미륵불교(彌勒佛敎), 칠보의 보화교(普化敎)증산교계 신종교들이 정읍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신종교는 광복 이후 교세가 크게 약하여졌으나 일부는 현재까지도 교단을 유지하고 있다.

정읍 지역의 대표적인 신종교로는 증산교와 보천교가 있고, 현재 교세가 쇠하였으나 진동학제화교(眞東學濟和敎)와 미륵불교 등이 교단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청수교(淸水敎)[일명 ‘자아도’]라는 이름의 종교도 있었고, 모악교(母岳敎)의 뿌리가 되는 인정상관(仁正上觀)의 여처자파(余處子派)가 한때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한 입암산성 내에는 갱정유도(更定儒道)가 신앙촌을 이루고 있었고, 입암면 북창골에는 하늬재교가 있었다. 이 밖에도 영원면에서 활동하였던 황극교(皇極敎), 칠보면보화교(普化敎) 등은 일제 강점기에 상당한 교세를 이루고 있었다. 현재 정읍시 신정동 백학마을에는 증산 계열의 대덕전(大德殿)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 신종교의 맥]

통상 한국 신종교의 효시인 최제우의 동학[천도교]과 함께 김일부(金一夫)의 정역사상(正易思想), 강일순의 신명사상(神明思想), 나철(羅喆)이 주창한 대종교의 삼일철학(三一哲學), 일제 강점기 소태산(少太山)이 주창한 원불교의 일원철학(一圓哲學)을 한국 신종교의 5대 맥으로 간주하고 있다.

[태극도와 대순진리회]

태극도는 1918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서 설립된 무극도(無極道)를 기원으로 한다. 도주인 조철제(趙哲濟)[1895~1958]는 3년간에 걸쳐 도솔궁(兜率宮), 영대(靈臺), 포정부(布政府), 정침(正寢) 등 120여 칸의 건물을 완공하고 1925년 무극대도로 교명을 고쳐 불렀다. 1948년 본부를 부산광역시 보수동으로 옮기고 태극도로 교명을 바꾸었다. 1955년에는 부산광역시 감천동으로 본부를 이전하여 3,000세대, 1만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종교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교조인 조정산[본명 조철제]이 사망한 뒤 박우당(朴牛堂)[1917~1996]이 도전(都典)으로 취임하여 교단을 이끌었으나 구파와 신파로 분열되었다.

박우당[본명 박한경]은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에서 대순진리회라는 별도의 교단을 형성하였다. 대순진리회증산교 계통의 종단 중에서 교세가 가장 크며 활동도 왕성하다. 부산보다 서울에서 포교 활동과 사회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1971년 종단의 도장이 완공되었고, 1987년 여주에 수도장이 건립되었다. 1993년 2월 종단 본부가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으로 이전되어 본부 도장으로서 위상을 갖추었다. 대외 사업 기관으로는 대순종교문화연구소, 대순출판부, 대진학원이 있고, 별도로 감사원이 있어 도인들을 보호하고 있다. 대순진리회 정읍회관은 정읍시 학산로 127-13[상동 254]에 있다.

[진동학제화교]

진동학제화교는 1954년 김형규(金炯奎)[1891~1971]가 만든 교단에서 비롯되었다. 정식 명칭은 ‘유일무극대도진동학제화교제화동대도(唯一无極大道眞東學濟和敎帝和東大道)’이다. 교조 김형규는 1891년 경상남도 합천군 쌍벽면 안계리에서 태어나 공직 생활을 하다가 23세에 사임하고 27세에 보천교에 입교하였다. 신앙 생활 중 1947년 보화교주 김환옥을 만나게 되고 1954년에 김환옥이 사망하자 1959년 김제 원평 보화교 본부에서 수련하던 중 수운 최제우의 영(靈)을 만나 증산과 김환옥의 신교(神敎)를 동시에 받게 되었다고 한다. 김형규는 증산과 신교를 동시에 받은 후 이한우(李翰雨)와 협의하여 보화교 내에 ‘유일무극대도진동학대도문(唯一无極大道眞東學大道門)’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보화교와 별개 종단을 형성하였다.

종단을 형성한 해 정읍시 북면 남산리로 이전하여 포교하다가 1962년 유일무극대도진동학제화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교조 김형규가 사망하자 김은재(金殷載)가 뒤를 이어 교주가 되어 1974년 정읍시 금붕1길 114-6[금붕동 710-2]의 일명 검듸마을로 교당을 옮겼다. 1980년대 교명을 다시 제화동대도(濟和東大道)로 고쳤다. 김은규 사망 이후 교세가 위축되어 종교 활동이 거의 중단된 상태다.

[청수교[봉남교]]

청수교는 김봉남(金奉南)[1898~1950]이 창시한 종교이다. 김봉남은 1898년 제주특별자치도 북제주군 구좌면 연평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937년 1월 15일 이른바 찬물교를 창설하였다. 1948년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 뒷산 용화사(龍華寺)에서 물법 포교를 시작하였다. 김봉남이 용화사에서 물법 포교를 하던 때 대흥리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던 안두승(安斗承)이 봉남의 포교를 혹세무민으로 간주하고, 이를 박멸할 목적으로 김봉남을 찾아갔으나 오히려 물법 교리에 감복되어 제자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안두승은 한때 보천교에 입교하였다 탈퇴하였는데, 찬물교는 보천교와 같이 어떤 외부적인 신의 조화와 운명에 기원하는 신앙이 아니라 자아에서 구하는 자력 신앙에 기초를 둔 것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뒤에 안두승은 2대 교주가 되면서 교명을 ‘청수교’라 하였다가 다시 ‘자아도(自我道)’로 고쳤다.

세간에서는 일명 ‘찬물교’라 통칭하고 있으나 정읍에서는 교단이 성립될 정도의 세를 유지하지 못하였고, 정식으로 사용된 명칭도 아니었다. 찬물교는 포교 활동이 활발할 때에 경남 거창에 ‘적선도(積善道)’라는 분파를 낳기도 하였다. 물법 신앙은 이후 천지대안교(天地大安敎)로 이어졌다.

[모악교]

모악교는 1946년 증산교에서 갈라져 나온 종교이다. 교주인 여연월[1887~1953]은 경상남도 하동군 덕양면 화심동에서 12개월 만에 태어났다. 태어날 때에는 산실에 향기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이마 한가운데에는 별표 모양, 머리 중앙에는 둥근 달 모양 같은 것이 있었고 손은 조막손이어서 태어날 때부터 신비에 싸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여연월에 대한 묘사는 상당 부분 증산의 모습과 같다. 성장 과정도 보통 아이들과 달라서 동네에서는 ‘이인처녀(異人處女)’라 불렀다. 커서는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로 이주하고, 보천교 간부인 목방주(木方主) 김홍규(金洪圭)의 작은방으로 이주하였다가 차월곡의 주선으로 방죽안 마을[제내]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진등, 정해마을 등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하였으나 1946년 정월 김제군 금산면 계룡리 252로 이사하여 ‘법정소’라 이름하고, 자신을 ‘본주‘ 또는 ‘인정상관‘으로 칭하면서 선도교(仙道敎)라는 교명으로 포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때 따르는 신도가 수만 명이었지만 교단을 세우지 않고 교명도 ‘선도’, ‘지운교’, ‘교징교’라고 때에 따라 다르게 불렀다.

인정상관은 1953년 12월 23일 사망하였다. 인정상관 사망 후 인정상관을 따르던 제자들 중 이영우(李英雨), 김정기(金正基), 이동옥(李東玉), 박동혹(朴東惑), 김경선(金京善), 김홍현(金洪玄) 등이 독립하여 나갔다. 용화동 본부는 인정상관이 살아 있을 때 원장을 맡았던 서정일이 이끌어오다가, 1972년 이덕원(李德元), 1981년 한광수(韓光洙)가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한광수 이후에는 김동규가 그 뒤를 맡았다. 신자 수는 한때 수천 명에 달하였으나 2023년 현재에는 1년에 몇 차례 본부에 모여 치성을 드리는 정도다.

[갱정유도]

갱정유도의 정식 교명은 ‘시운기화유불선동서학합일대도대명다경대길유도갱정교화일심(時運氣和儒佛仙東西學合一大道大明多慶大吉儒道更定敎化一心)’이다. 교명이 28글자로 국내에서 종교 중에는 가장 길다. 강대성(姜大成)[1889~1954]에 의하여 창교되었다. 약칭하여 일심교라고도 한다. 강대성은 신자들에게 ‘강천자’ 또는 ‘영신황제(迎新皇帝)’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강대성은 해방될 날짜를 예언하였으며, 『해인경(海印經)』을 읽으면 죽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져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한때 신자가 56만 명에 달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였고, 전쟁 이후 본부를 김제로 옮겨 28글자로 된 교명 간판을 내걸고 행정 체제를 갖추었다. 1964년 현재 본부가 있는 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으로 옮겼다

갱정유도는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다. 갱정유도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장차 만국의 사제국이 될 것이며 세계의 제일국, 세계의 중심국, 세계의 부모국이 된다. 비록 우리나라가 지리적으로 소국이나, 장차 우리말이 세계의 언어가 되고 우리 전통의 한복이 세계의 의복이 될 것이라고 한다. 또한 갱정유도는 선후천 일회 운도를 5,000년으로 보고, 앞으로 5,000년 새 운수가 전개되는데 한국 땅에서 세계를 통일할 천자가 나오게 된다고 믿고 있다. 갱정유도의 주장은 『정감록(鄭鑑錄)』의 비결 신앙에 근거를 둔 것인데, 새 운수를 주재할 성인이 바로 강천자[大成]라는 것이다.

갱정유도 신자들은 원래 10승지의 하나로 알려진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대소마을 뒷산 신선대 아래에서 1950년대까지 살았다. 갱정유도 신자들은 난을 당하면 주거지를 지키기보다는 길지에 의탁하여야 살육을 면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갱정유도 신자들이 입암산으로 온 것은 1960년대 말이었다. 다가오는 후천개벽 세상에 대비한 마음공부를 하기 위하여서는 물욕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갱정유도 신자들은 1970년대 초까지 입암산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많을 때는 여덟 가호가 넘었다. 1970년대 갱정유도 신자들은 다시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성내면 사기점골로 이주하였다. 갱정유도 신자들이 궁벽한 곳에 살 수 있었던 것은 말세가 오면 후천개벽이 도래할 것을 굳게 믿고 산속이 아니면 살 수 없으며, 병겁(病劫) 세상에서 후손들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산이 아니면 안 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갱정유도 신자들이 입암산 내에 정착하였던 것은 풍수상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의 명당이기 때문이다.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이 남쪽으로 내려오다 다시 돌아보는 곳이 입암산이고, 물도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곳이 입암산이어서 민족의 기운이 다시 되살아나는 곳이 입암산이라 믿었던 것이다.

[하늬재교]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입암산성 내 북창골에 증산교 정씨사모파로 불리는 일명 ‘하늬재교’가 한때 있었다. 이강오의 『한국 신흥종교 총감』에는 대표자를 변재익(邊在益)의 처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교인들은 교주를 ‘하늬재 사모님’으로 불렀다. 하늬재교를 창시한 여교주는 본시 경상도 사람으로 남편인 변재익이 사망한 뒤 보천교로 인하여 정읍 임암면 대흥리로 이거하였으며, 이때부터 함승국(咸昇國)이 교인들을 모았다.

함승국은 본래 평안도가 고향으로 광복 이후 강원도에 살다가 정읍으로 이주한 사람이다. 여교주가 6·25전쟁 이후 물난리가 날 것을 예언하자 지금의 정읍시 신정동 북창골 위의 ‘하늬재’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언하였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자 함승국은 여교주와 결별하였다. 교단을 형성할 정도의 세를 유지하지도 못하였고, 교리가 정비된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함승국은 여교주와 결별한 이후 김정학, 김옥봉, 최선애와 함께 대한 불교 법상종을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황극교]

1926년 10월 김영식(金靈植), 은세룡(殷世龍), 홍명선(洪明善) 등이 황석공교(黃石公敎)[황석공은 중국 고대 전한 시대의 이인]를 창교하고, 고려 충신 정몽주의 후손인 정해조(鄭海桃)를 교주로 삼았다. 1932년에는 교명을 ‘황극교’로 개칭하였다. 황극교는 종교 단체를 표방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민족 사상을 고취하여 조선 독립을 궁극 목적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였다.

황극교를 창교한 은세룡[1873~1974]의 이름은 은봉표(殷鳳杓), 초명은 은세봉(殷世鳳)이다. 정읍시 영원면 후지리 태생으로 본관은 행주이고, 은우열(殷祐說)의 아들이었다. 일찍이 한문을 수학하였다. 족보에 의하면 승훈랑(承訓郞)을 지냈고, 검찰 조사 기록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다고 하였다. 김영식과 조선 독립 운동을 계획하고, 왜정하에서 점점 시들어 가는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깨우치기 위하여 1926년 새로운 종교 단체를 조직하였다. 은세룡은 조선 독립 후의 정청으로 계룡산에 삼황묘(三皇廟) 건립을 추진하다가 일제에 피체되었다.

황극교 추종자들은 일본이 27년간 지배 후 망하고, 사경진(四庚辰)[1940년] 3월 15일에 교주인 정해도가 해외에서 돌아와 계룡산에서 등극하여 조선은 독립하니 황극교는 정해도의 명에 의하여 그동안 준비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의 독립을 기원하는 천제를 지냈다. 1931년 10월 15일 무주 덕유산, 1931년 7월 15일 개성 두문동에서 수령제(受靈祭)를 지냈고, 1931년 10월 15일에 모악산 천제, 1933년 변산 천제를 지냈다. 1937년에는 조선 독립을 대비하여 황극교의 정청으로 계룡산에 삼황묘를 세우기도 하였다. 교세는 전라·충청·영남에 미쳐 교인이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일제는 황극교 사건을 보천교의 재건으로 간주하고, 1937년 간부급 인물 160명을 검거하였다. 은세룡은 전주재판소에서 4년 징역형을 받았다. 만년에는 고부에서 여생을 보냈다.

[보화교]

보화교를 창시한 청강(淸江) 김환옥(金煥玉)은 25세 되던 1921년 보천교에 입교하여 수방(水方) 문정삼(文正三)의 12임(任)으로 있다가 1930년에 탈퇴하고, 서상근(徐相根)을 만나 수운과 증산을 통합하는 교리를 깨달았다 하며 스스로 ‘금강대신(金剛大神)’이라 일컬었다. 1933년 겨울 경상남도 하동군 청하면 학동에 교단을 설립하고 포교하다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투옥되었다. 1935년에는 독립운동 혐의로 거창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광복 후 출옥하여 자기 집[정읍시 칠보면 백암리]에 돌아와 교당을 짓고 감옥에서 만난 김교헌(金敎憲)과 함께 ‘무극대도보화교(無極大道普化敎)’라는 간판을 내걸고 포교를 시작하였다. 오늘날에는 터만 남아 있다. 1954년 청강이 사망하자 김재헌이 대표가 되어 1957년에 신태인으로 교단을 옮겼다가 1957년 금산면 쌍용리로 옮기고 교명을 ‘동도교 보화교회’로 바꾸었다. 쌍용리 교회 외에 정읍 신정동정해마을칠보면 백암리에 교회가 있었다.

보화교의 발전 과정에서 두 분파가 파생되었는데 1959년 이한우(李澣雨) 등이 진동학제화교를 세워 나갔고, 1969년 권호중(權呼中)이 태종보화교(太宗普化敎)를 만들어 분립하였다. 칠보면 백암리에 있었던 본당에는 중앙에 연화대가 있었고, 동쪽에 옥경대와 일광사, 서쪽에 대현사, 복록궁이 있었다. 연화대 뒤에는 수명궁이 있었고, 주위에는 신자들을 위한 여러 채의 가건물이 있었다. 옥경대에 있었던 3개의 탑 가운데 하나는 본터인 백암리에 남아 있고 하나는 정해마을로 옮겼으며, 하나는 원평 본부로 이전되어 있다. 2023년 현재 보화교 수련소로 이용되고 있는 정해마을 보화교 본당에는 동쪽에 집회 장소인 통정원이 있고, 남쪽에 용천각, 서북쪽에 수일각, 북쪽에 수련장인 대현정이 있다. 대현전 앞뜰에 백암리 본당에서 옮겨 온 탑이 모셔져 있다.

[대덕전]

대덕전은 정읍시 신정동 백학마을에 있다. 대덕전 안에는 증산을 상징하는 미륵불이 중앙에 있고, 오른쪽에는 관운장, 왼쪽에는 진묵대사를 모시고 있다. 미륵불을 모신다는 것은 미륵의 화현(化現)인 증산을 모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덕전은 증산교의 한 일파임을 알 수 있다. 대덕전을 찾는 사람들은 고혈압, 동맥경화부터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환자들이 대부분이다. 경내 시설은 1992년 착공하여 1997년 완비하였다.

[여호와의 증인]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es]은 1872년 C. T. 러셀이 국제성서연구자협회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러셀의 후임자 J. F. 러더퍼드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워치타워 성서책자협회에 의하여 종교 활동이 주도되고 있다. 본부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와 뉴욕에 있으며, 99개 지부, 229개 국가 및 지역, 447만여 명의 신도들이 있다. 한국에는 1,352개 회관에 7만 4000여 명의 신도들이 있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왕국회관’이라는 집회 장소에서 정기 집회를 갖고, 침례 의식을 행한다. 엄격하고 높은 도덕 생활을 개인에게 요구하며,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수혈과 집총을 거부하며 혼전 성관계, 흡연, 과도한 음주 등 타락한 생활을 경멸하며 성적인 문제에서는 동성애는 물론 자위행위나 음란물까지 금기시한다고 알려져 있다. 전도는 월 2회 발행하는 『파수대』와 『지금은 깰 때이다』를 사용하여 호별 방문을 통하여 하고 있다.

정읍에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정읍북로에 태인왕국회관이 있고, 수성동에 남부왕국회관이 있으나 교단 관계자들이 자료 공개를 원하지 않아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는 상태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정주가정교회]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정주가정교회[통일교]는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출신의 문선명(文鮮明)이 1954년 서울에서 창시한 신흥 그리스도교 계통 교단이다. 문선명은 1952년 부산 범일동 토담집에서 교회를 시작하였다. 1953년에는 대구에 교회를 설립하는 등 선교 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회]를 창설하였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를 신령과 진리로 통일하고, 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감으로써 하느님의 창조 이념을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을 지상 목표로 하고 있다. 1957년에는 교리서인 『원리강론(原理講論)』을 완성시켜 교리 체계를 갖추었으며, 1960년대에는 해외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정읍 지역에서는 1976년 6월 11일에 목사 김중기가 신태인읍 남동에서 처음 통일교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현재 신태인읍 표천동, 장명동, 신월동에 교회가 있으며, 활발한 포교 활동을 펼치고 있다.

[증산도]

증산도증산교를 창시한 강일순증산의 부인이었던 수부 고판례를 신앙하는 한국의 신종교이다. 증산도 홈페이지에 증산도는 ‘우주의 주재자께서 강세하시어 인류 구원의 새 세계를 열어 주신 개벽 진리이다. 남과 나를 더불어 잘되게 하는 상생의 가르침이요, 다가오는 가을 개벽에서 뭇 생명을 살려내는 구원과 생명의 대도(大道)’라고 밝히고 있다. 증산도의 근본 사상은 ‘후천개벽, 원시반본, 보은, 상생, 해원’이라고 나온다. 정읍시 연지동 공용버스터미널 뒤편에 증산도 정읍연지도장이 설치되어 정읍, 고창, 김제, 부안까지를 관할하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