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950
한자 普天敎
분야 종교/신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재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9년연표보기 - 보천교 창시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지역에서 일제 강점기 차경석에 의하여 창시된 증산교 계열의 신종교.

[개설]

보천교(普天敎)는 한때 증산교계 종단 가운데 가장 교세가 컸다. 1909년 월곡(月谷) 차경석(車京石)에 의하여 창시된 신종교인데, 한국 종교 사상 유례없는 극적인 흥망을 보여 주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급격한 성장을 시작하여 1922년에 보천교 성전을 착공하고, 1923년에는 수십 만 명의 신도를 가진 사실상 한국 제일의 종교로 우뚝 일어섰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유사 종교 해산령’에 따라 해산되었다.

[보천교의 민족독립운동]

보천교는 교세가 확장되자 비밀리에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하였으며, 언론 출판 사업의 일환으로 1923년 10월 월간지 『보광(普光)』을 창간하고 보광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였다. 이어서 당시 말썽 많았던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인수하였다. 또 자급자족을 위하여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에 직물 공장과 염색 공장, 갓 공장, 농기계 공장을 세웠다. 보천교의 공장 설립은 일본산 물건을 쓰지 않겠다는 민족의식의 발로인 동시에 보천교의 경제 공동체이자 종교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보천교는 대중문화 운동으로 100여 명으로 편성되는 대규모의 보천교 농악단을 조직하여 풍물을 적극 권장하기도 하였다. 보천교 농악단은 정읍농악의 뿌리이다.

1924년에는 보천교 내에 기산조합(己産組合)을 조직하여 수공업을 통한 산업 진흥을 도모하였다. 한편 신지식을 보급하기 위한 보천교 청년단을 조직하고 여성 신자들의 교육을 위하여 보흥여자사립수학을 설립하였으며 보천교 소년회를 조직하는 등 신교육과 소년 운동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밖에 실력 양성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일본으로 유학생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보천교의 갑자등극설]

1924년 갑자년에 차월곡이 천자로 등극한다는 갑자등극설(甲子登極說)은 동학의 진인출현설(眞人出現說)을 변형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천교의 갑자등극설은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뒤 민족의 구심점을 상실하고 있던 시기에 나왔다고 하는 점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갑자등극설은 민중을 일거에 조직할 수 있었던 동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갑자등극설은 비록 시대의 조류에 역행하는 것이었지만, 조직과 정치적 헤게모니를 주도하려는 정치 운동이자 현실 정치이기도 하였다.

동학도들은 ‘갑’자가 들어가는 해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갑신년[1824년]에 수운이 탄생한 점, 갑자년[1864년]에 철종이 붕어하면서 고종이 등극하고 교조가 순교한 사실, 갑신년[1884년]에 정변이 일어나고 갑오년[1894년]에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이 일어난 점, 갑진년[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동학도의 갑진개화운동(甲辰開化運動)이 일어난 사실은 우연의 일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에게는 대단한 기대감을 갖게 만든 것이다. 수운이 새로운 갑자년[1864년]에 이 세상에 큰 변화가 올 것을 예언하면서 그 핵심은 무극대도가 출현하는 일이라고 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차천자의 갑자등극설은 수운이 예언하였던 갑자년에서 꼭 60년이 되는 해이다. 보천교에서는 갑자등극설을 입증하려는 듯 1925년부터 구본소 맞은편에 서울의 궁궐 건축을 모방한 45동의 새로운 성전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29년에 완공하였다.

[보천교와 시국대동단]

시국대동단은 친일 단체인 ‘각파유지연맹’의 일부 인사가 떨어져 나와 보천교와 합작하여 조직한 단체이다. 강령은 ‘내선인의 정신적 결합’을 견고히 하고, 대동단결하여 문화의 향상을 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시국대동단이 활동하던 당시 세간에서는 “보천교는 ‘제2의 각파유지연맹’이며, 종래 일종의 의문으로 주목받던 보천교가 금번에 친일로 태도를 명백히 한 것”이라는 풍문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후손들은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 3국이 서세(西勢)를 막아야 한다는 논리였다고 강변한다. 일종의 ‘시국 황인종 대동단결’이라는 것이다.

또한 시국대동단은 애초부터 일제의 요구에 의하여 조직된 어용 단체였기 때문에 교단 측의 주장은 모두 무시된 채 취지서의 문안도 사전 양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연사 선정에서도 보천교 본소 간부는 한 사람도 채용되지 않았으며, 주로 친일 단체인 십일연맹에 가담한 인사들로 메워졌는가 하면 본소에서는 발회일도 통고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국대동단의 강연일이 정하여지고 보천교 본소의 명의를 도용한 통지서가 각지로 발송되었다고 주장한다. 결국 일제에 의하여 철저하게 이용당하였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보천교에 대한 접근은 각파유지연맹만이 아니었다. 1921년에 대표적 친일 단체인 동광회도 보천교를 자파 세력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또 보천교도를 연사로 선정하는 경우는 있었으나, 보천교 본소의 간부가 연사로 동원된 경우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이 같은 사실은 사전에 교단 측과 밀접한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시국 강연이 진행되었음을 말하여 준다.

[보천교 본소 건축물의 훼철과 이축]

보천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억압하에서도 기구를 조직하고 웅대한 교전을 축조하였으나 1936년 차월곡이 사망하면서 일제의 탄압으로 건물 일체가 모두 해체되었다. 그러나 성전 건물인 십일전(十一殿)은 현재 조계사 대웅전으로 복원되어 있으며, 2000년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북쪽에 위치한 정문인 ‘보화문(普化門)’은 내장사 대웅전으로 복원되었다가 2012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일부는 일제가 민족의식을 가진 보천교를 탄압하면서 건물을 뜯어서 장작으로 팔기도 하였다.

[보천교의 교리]

보천교의 교리는 인의(仁義)이며 4대 강령은 경천(敬天)[일심으로 공경하여 천은에 보답함], 명덕(明德)[착한 일을 행하며 스스로 자기의 덕을 밝힘], 정륜(正倫)[인도를 바로잡고 행함], 애인(愛人)[내 몸을 아끼듯 다른 사람을 사랑함]이다. 상생(相生)이 주의이며, 전 세계가 대동단결하여 평화, 공존, 공영의 세계를 이룩해야 한다는 대동(大同)을 목적으로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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