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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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無極大道 |
분야 | 종교/신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재영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에서 일제 강점기에 조철제가 창시한 한국의 신종교.
[무극대도의 변천과 분화]
무극대도(無極大道)는 1918년 당시 태인면 태흥리 도창현[일명 도챙이고개]에 세워진 무극도(無極道)를 기원으로 한다. 일제의 비밀 문서인 『보천교 일반(普天敎 一般)』에는 무극대도를 창시한 조철제가 김형렬과 서로 손을 잡고 은밀하게 포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조철제[1895~1958]와 김형렬은 경상남북도, 충청남북도, 강원도 등 각지를 옮겨 다니면서 ‘부인교(夫人敎)’, ‘정도령교(鄭道令敎)’, ‘무극교(無極敎)’라 칭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도주인 조철제(趙哲濟)[1895~1958]는 3년간에 걸쳐 태인에 도솔궁(兜率宮), 영대(靈臺), 포정부(布政府), 정침(正寢) 등 120여 칸의 건물을 완공하고, 1925년 ‘무극대도’로 교명을 고쳐 불렀다. 무극대도는 1936년 일제의 ‘유사 종교 해산령’에 의하여 보천교와 함께 해체되었다.
해방 후 본부를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으로 옮기고, 태극도(太極道)로 교명을 바꾸었다. 1955년에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감천동으로 본부를 이전하였다. 태극도는 부산에서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으나 1958년 교조인 조철제가 사망한 뒤 박우당(朴牛堂)[본명 박한경, 1917~1996]이 도전(都典)으로 취임하여 교단을 이끌다 구파와 신파로 분열되었다. 박우당은 교단 분열 이후 서울 중곡동에서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라는 별도의 교단을 형성하였다.
[무극대도 터의 선정과 태인]
무극대도는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 출신의 정산 조철제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귀국하여 창시한 것이다. 조철제는 1921년 신앙 대상을 증산교의 구천상제 강증산으로 하고, 도호를 정산(鼎山)으로 선포하였다. 조철제는 1923년 12월 “도장의 기지는 태인 도창현이 천장길방지지(天藏吉方之地)니라. 그러나 그곳에 치마바위가 있어야 한다”라며 본부 후보지를 태인으로 정하였다.
태인은 역사·문화적으로 볼 때 ‘포한(抱恨)’의 땅이다. 동학 농민군의 마지막 전투가 성황산(城隍山)과 항가산(恒伽山)에서 있었고, 무장 해제된 동학 농민군이 귀향하기 전에 들러 해원하고 싶었던 곳이다. 증산이 종도들과 함께 때때로 해원공사를 보던 곳이고, 그중에서도 도창현을 도가 창성한다고 본 것이다.
종교적인 입장으로 볼 때는 무극대도가 창도된 태인(泰仁)은 ‘클 태’, ‘씨앗 인’을 의미한다. 즉 ‘큰 씨앗’을 의미한다. 이는 후천선경 세계를 건설할 1만 2000 도통군자가 창성하게 될 큰 씨앗을 뜻하며, 도가 크게 번성할 씨앗이 바로 무극도임을 뜻한다. 증산은 도챙이고개 음식점에서 반상의 구별과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아야 속히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법언을 남겼다.
풍수로 볼 때 태인은 군신봉조(君臣奉詔)의 땅이면서도 도장 주위에 좌청룡인 황금산(黃金山), 우백호인 성황산(城隍山), 주산인 항가산(恒伽山), 안산인 도이산(道伊山)이 그림처럼 배열된 곳이다.
태인은 증산의 법언과 관련하여 볼 때는 증산 재세 시에 언급한 ‘상유도창(上有道昌), 중유태인(中有泰仁), 하유대각(下有大覺)’과 깊은 관련이 있다. 증산은 태인 도창현을 순행하다가 종도들에게 “이곳이 군신봉조지국(君臣奉詔之局)이며, 상유도창하고 하유대각하니 백의군(白衣君) 백의신(白衣臣)의 운회지지(運會之地)니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상유도창은 도창현을 말하고 중유태인은 태인현 소재지, 하유대각은 대각교로 대각(大脚)은 대각(大覺)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이에 크게 깨닫는 것보다 어진 마음을 쓰는 것이 낫고, 어진 마음을 쓰는 것보다 도를 크게 창성시키는 것이 더 크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무극대도 도장의 건축]
조철제는 도장 건축을 시작할 때는 ‘진업단(進業團)’이라는 노동 단체를 만들어 본부의 건축 공사를 무상으로 돕도록 하였다. 1925년 4월 교단의 주요 건물인 영대와 도솔궁을 완공하였다. 건물 완공 후 도명을 ‘무극대도’라 선포하였다. 1926년 9월에는 목조 기와집에 단청을 한 영대와 도솔궁을 비롯한 포정부, 정침, 사무실, 창고, 문루 등 19동 240여 칸의 청기와로 기와을 입힌 건축물이 완공되었다. 공사 기간 33개월, 연 인원 12만 명에 5만 원이 든 대공사였다. 건물의 구조는 목조 기와집에 단청을 한 전통적인 고전형이었다. 본부는 동서남북으로 문을 내고 담장을 둘렀다. 당시 세인들은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의 보천교 본부와 비교하면서 보천교의 차월곡(車月谷)을 ‘차천자’라고 불렀듯이 조정산을 ‘조천자’라 불렀다.
영대[영전이라고도 함]는 3층에 구천상제[증산]의 영위를 모시고 대순절[9월 19일]과 화천절[6월 24일]에 천사께 치성을 드렸다. 1층, 2층은 집회장으로 교단 간부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총 48칸이었다. 성전인 도솔궁은 총 72칸으로 4층에는 입춘·입하·입추·입동 네 절후 날 도솔천신 33천을 모셨다. 3층은 칠성전으로 칠성신을 모시고, 2층 봉령전(奉靈殿)에서는 33천 이외의 모든 천신과 지신에게 제사하였다. 맨 아랫층은 도주실 또는 중궁(中宮)이라 하여 도주의 수련실로 정하였다.
[무극대도 도장의 훼철과 이축]
1936년 보천교주 차월곡의 사망을 기점으로 조선총독부는 민족성이 강한 종교 운동을 억압하기 위하여 ‘유사 종교 해산령’을 내렸다. 무극대도의 건축물들도 ‘유사 종교 해산령’으로 모두 철거되었고 교단 본부 역시 해체되었다. 해체된 본부 터에는 일제 경찰이 주재하였다. 무극대도도 재산 일체를 일제 당국에게 보상도 없이 몰수당하여 경매에 붙여진 결과 부안의 김성기(金性基)에게 낙찰되었다. 김성기는 영대의 2층은 뜯어다가 선대 묘소 재실로 개축하였다. 도솔궁의 3층은 변산 내소사에 팔려 보종각으로 이축되었으나 나머지 건물은 모두 철거되어 흩어져 팔려 학교, 공장 부지로 사용되다가 없어져 지금은 황폐한 터만 남아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부안으로 옮겨졌던 영대 건물은 2023년 현재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 경주 이씨 재실로 사용되고 있다. 경주 이씨의 재실은 단층 건물로 사찰 건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2층은 다락으로 되어 있으나 천장이 낮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없게 되어 있다. 원래 건물을 이축 목적에 맞게 다소 축소한 것으로 보인다.
내소사 보종각으로 이축된 도솔궁은 내소사 봉래루(蓬萊樓) 좌측에 3단의 기단석 위에 올려져 있다. 겹처마에 육중한 팔작지붕으로 단청이 화려하고, 공포 장식은 소로, 첨차 등이 복잡하게 얽혀져 장식성이 강하다. 내부에는 특이하게 매화, 난초, 국화와 소나무가 그려져 있고 네 귀퉁이에는 활주가 세워져 있다.
도본부가 있었던 자리는 1954년 태인기술학교로 이용되었다. 태인기술학교를 운영하는 데 힘쓴 이는 장득원(張得源)이다. 장득원은 『증산교사』에는 무극대도의 본부 직원으로 판정(判正)이라는 직책을 수행한 것으로 나와 있다. 태인기술학교의 교사들이 공립학교보다 우수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을 만큼 운영이 잘 되었다. 태인기술학교는 34회에 걸쳐 학생 총 3,001명을 배출하고 1983년 2월 폐교하였다. 태인기술학교 폐교 이후 삼미에서 학교 터를 인수하여 편물 공장[일명 ‘홀치기 공장’]으로 사용하다가 태창 메리야스 공장, 신태인 화호리 인상학원을 거쳐 2023년 현재 대순진리회에서 터를 확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