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11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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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Rock Pillars |
이칭/별칭 | 입석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성식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에서 자연석 또는 인공석으로 조성한 돌기둥.
[개설]
선돌은 풍요·다산을 기원하거나 묘비·지역 경계를 나타내는 표지로서 자연석 또는 가공한 돌을 세운 돌기둥이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일원에는 선돌이 조성된 마을이 상당히 많은데, 주로 당산, 수구막이, 기념, 비보(裨補) 등의 목적으로 조성된 것이다.
[보림리 입점마을]
북면 보림리 입점마을 어귀에는 2기의 선돌[입석]이 있다. 마을 100m 전방에 세워진 선돌은 자연석으로, 한 기는 높이가 220㎝, 또 한 기는 150㎝ 정도이다. 마을에서는 선돌을 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 신격의 당산으로 지칭하였는데, 6·25전쟁 전까지는 당산제를 지냈다. 입점마을은 선돌과 관련하여 다음의 전설이 전하고 있다. “마을 뒤편이 칠보산이고, 마을 가까이는 용초봉과 보림사가 있는데 보림사에서 조선 전기 성리학자인 일재(一齋) 이항(李恒)이 공부하다가 함께 공부하던 사람들끼리 힘겨루기를 하게 되었다. 이때 이항이 양쪽 옆구리에 바위를 끼고 축지법으로 뛰어서 내려선 곳이 바로 입점마을 선돌의 유래가 되었다.”
[수금리 금남마을]
정우면 수금리 금남마을에는 6기의 선돌이 보존되어 있다. 선돌이 있는 곳은 금남마을 서쪽이며, 10여m 거리를 두고 3기씩 모여 있다. 선돌은 각각 170㎝, 160㎝, 170㎝ 높이 세 기와, 148㎝, 119㎝, 46㎝ 높이 세 기로 나뉜다. 본래는 50여m 떨어진 곳에 가장 큰 선돌이 있었는데 1980년대 호남선 복선화 공사 때 묻혔다고 한다. 수금리 금남마을 선돌이 무슨 목적으로 조성되었는지 정확한 내력이 전하여지지는 않는다. 다만 마을 서쪽 1㎞쯤 전방까지 과거에는 바닷물이 들어온 것으로 볼 때, 서쪽이 완전히 개방된 마을 지형을 막아 주거나 비보(裨補)를 하기 위하여 조성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승부리]
북면 승부리 선돌은 장명동에서 북면으로 향하는 국도변 동쪽에 있다. 북면 승부리 선돌에는 지역 사회의 역사가 숨 쉬고 있다. 임진왜란 때 승부리 태생의 유희진 등 일가 8인이 의병을 일으킨 기념으로 일석일수(一石一樹), 즉 선돌 하나와 당산나무 한 그루를 함께 징표로 남겼다고 한다. 일가 8인의 의병 창의를 8인 회맹(會盟)이라 칭하며 선돌을 ‘팔의사 장군석’이라고도 한다. 선돌은 높이가 226㎝, 폭이 54㎝이다.
[보화리 와석마을]
소성면 보화리 와석마을에도 선돌 한 기가 있다. 정읍시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을 잇는 국도 제22호 남쪽으로 속칭 ‘돌선거리’에 있다. 마을 지명이 ‘와석’인 것은 선돌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니고 별도의 넓적한 고인돌이 있어 이름이 유래하였다. 그런데 1936년 발간된 『정읍군지』에는 소성면 와석리와 별도로 입석리라는 지명도 병행되어 있다. 대개의 선돌이 돌기둥 형태인 것과 달리 와석마을 선돌은 보기 드문 대형 판석형이다. 높이 192㎝, 너비 182㎝, 두께 49㎝ 규격이다.
[평령리 한수마을]
이평면 평령리 한수마을에는 인공적으로 다듬은 선돌이 있다. 한수마을은 마을 형태가 일자형 혹은 마음 심(心) 자 형국인데, 가운데 점이 하나 모자라는 것이 취약점이어서 마을 한복판에 선돌을 세웠다. 현재는 논 가운데 있으며, 높이 180㎝, 너비 60㎝, 두께 40㎝ 규격이다.
[기타 마을]
고부면 입석리 선돌은 두승산 선인봉 아래 입석마을 동남쪽 어귀에 있고, 두승산 북쪽 기슭에도 돌담으로 유명한 덕천면 상학마을 어귀에 2기의 선돌이 존재한다. 북면 장학리 장재마을에는 2기의 선돌이 있으며, 북면 화해리 가전마을에도 3기의 선돌이 있다. 끝으로 태인면 태서리 분동마을 선돌은 마을 앞에 있으며 높이 160㎝, 너비 60㎝, 두께 28~39㎝ 규격이다. 본래는 동쪽으로 1㎞쯤 떨어진 냇가에 있었는데, 1960년 무렵에 옮겨 놓았다. 분동은 일재 이항이 살던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항이 보림산 서당에서 저녁 늦게 귀가하는 자신을 마중 나오는 부인 김씨가 매일 내를 건너느라 발이 젖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이 선돌로 돌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근래에 모정(茅亭) 옆으로 옮겨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