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1306
한자 勉菴集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문헌/전적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영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간행 시기/일시 1908년연표보기 - 『면암집』 무신본 간행
간행 시기/일시 1931년연표보기 - 『면암집』 신미본 간행
소장처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1-2]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산60-1]
성격 고도서|시문집
저자 최익현
편자 최영조
간행자 최영조
권책 46권 23책[무신본]|48권 24책[신미본]
행자 10행 20자
규격 가로 20.7㎝, 세로 15.5㎝[무신본]|가로 21.2㎝, 세로 16.7㎝[신미본]
어미 상삼하무엽화문어미

[정의]

1908년 간행된 개항기 정읍에서 활동한 유학자 최익현의 시문집.

[저자]

최익현(崔益鉉)[1833~1907]은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생존한 유학자로, 본관은 경주,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이다. 1833년 12월 5일[음력]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新北面) 가채리(加采里)에서 아버지 최대(崔岱)와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43년 11세 무렵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문하에 나아갔다. 고종 시기에 조선 최후의 산림 중 한 사람으로 유학자들을 이끌었던 거두 중의 한 사람이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개항이나 독립협회에 반대하고 기존 질서를 회복하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하지만 일제 침탈이 가속화되자 1906년 6월 4일 74세의 나이로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정읍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의 고석진(高石鎭)과 진안군의 최제학(崔濟學), 그리고 정읍시 태인면에 거주하던 전 낙안군수 임병찬(林炳瓚) 등 의병을 도모하던 지사들과 연계하여 호남 의병을 결성하였던 것이다. 1907년 1월 1일 새벽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74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면암집(勉菴集)』최익현 사망 후 1908년에 최익현의 맏아들 최영조(崔永祚)가 문인 이재윤(李載允), 고석진(高石鎭), 조우식(趙愚植) 등 30여 명과 함께 편집하여 충청남도 정산[현재의 충청남도 청양군 지역]에서 46권 23책으로 완성하였다. 초간본인 무신본(戊申本)은 일본을 성토하는 내용으로 인하여 압수당하였지만 완질이 남아 있었다. 무신본에는 후학 문인의 발과 손자 최용식, 증손자 최병하의 발문이 있다.

이후 1929년 문인 조우식, 박재식 등이 중심이 되어 자료를 다시 수집·편집하여 1931년 두 번째 『면암집』 신미본(辛未本)을 간행하였다. 신미본은 무신본에 속집 2권 1책을 다시 첨가한 것으로 48권 24책본이다.

[형태/서지]

『면암집』 무신본은 46권 23책으로 활자본이다. 책 크기는 세로 20.7㎝, 가로 15.5㎝이다. 『면암집』 신미본은 48권 24책으로 활자본이다. 책 크기는 세로 21.2㎝, 가로 16.7㎝이다.

[구성/내용]

『면암집』 신미본의 편제를 보면 권1~권2 시(詩), 권3~권5 소(疏), 권6~권15 서(書), 권16 잡저(雜著), 권17~권19 서(序), 권20~권22 기(記), 권23~권24 발(跋)·명(銘)·찬(贊)·고축(告祝)·제문(祭文), 권25 비(碑)·신도비(神道碑), 권26~권30 묘갈(墓碣), 권31~권34 묘표(墓表), 권35~권36 묘지(墓誌), 권37~권39 행장(行狀), 권40 유사(遺事)·전(傳), 속집 권1 시·서, 권2 서(書)·잡저·서(序)·기·신도비·묘갈·묘표, 권3 시·서(書)·잡저·서(序)·기, 권4 발·제문·비·묘갈·묘표·묘지·행장·유사이며, 부록은 권1~권4가 연보로 되어 있다.

다시 유형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서(書)·서(序)·발과 같은 일반체의 글과 둘째, 고축·제문·만사와 같은 제례문, 셋째, 비·신도비·묘갈·묘표·행장·유사·전·명·찬과 같은 사우(師友)나 연원제가(淵源諸家)를 기리는 글, 넷째, 상소·차자·장서(長書) 및 포고문과 같은 정치편, 다섯째, 기타 일반 저술인 잡저 등이다.

[의의와 평가]

『면암집』에서 최익현의 기개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은 상소문과 잡저이고, 시와 서가 그 뒤를 따른다. 상소문은 1876년(고종 13) 1월 22일 일본과의 수호를 반대한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 의제 개혁·단발령 등으로 세상이 소란할 때의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1895년 6월 26일],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을 진압하라는 선유의 명을 거부하고 올린 「선유대원명하후진회대죄소(宣諭大員命下後陳懷待罪疏)」[1896년 1월 11일] 및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체결되자 관계 대신을 탄핵하는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1905년 9년 11월 3일·14일], 정읍시 태인면에서 의병을 일으키며 올린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1906년 10년 윤4월 11일] 등이 실려 있다.

특히 1906년 정읍 무성서원에서 일제에 맞서 창의하며 썼던 글들이 주목할 만하다. “어느 시대엔들 난적(亂賊)의 변고가 없겠는가만, 그 누가 오늘날의 역적과 같을 것인가? 또한 어느 나라엔들 오랑캐의 재앙이 없겠는가만, 그 어느 것이 오늘날의 왜놈과 같겠는가? 의병을 일으키라.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죽어서 충의로운 넋이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적과 싸우라.” 이는 최익현이 당시 항일전쟁을 선포하며 전국 각지에 보낸 격문의 내용 중 일부인데 ‘죽어서 충의로운 넋’이 되고자 하였던 최익현의 강개함을 느낄 수 있다. 최익현이 호남을, 그중에서 정읍 무성서원항일운동의 시작점으로 선택하면서 정읍은 항일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 지역이 되었고, 『면암집』을 통하여 그러한 점을 증거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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