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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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 世界 遺産 武城書院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무성리 500]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노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83년 - 정극인 향학당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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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84년 - 최치원 사당 이건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544년 - 신잠 생사당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15년 - 태산서원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96년 - 정읍 무성서원 사액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784년 - 최치원 영정 정읍 무성서원 이안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28년 - 정읍 무성서원 강당 중건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91년 - 정읍 무성서원 현가루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6년 - 최익현 의병 창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4년 - 정읍 무성서원 중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9년 7월 6일 - 정읍 무성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
소재지 | 정읍 무성서원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무성리 500]![]()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
[개설]
정읍 무성서원은 1968년 12월 1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2019년 7월 6일 한국의 서원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최치원(崔致遠)[857~?]을 주벽으로 하여 신잠(申潛)[1491~1554]·정극인(丁克仁)[1401~1481]·송세림(宋世琳)[1479~1519]·정언충(鄭彦忠)[1491~1557]·김약묵(金若默)[1500~1558]·김관(金灌)[1575~1635]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있다.
[태산사로부터 시작]
정읍 무성서원은 태산사(泰山祠)로부터 시작되었다. 태산사는 태산군[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일대]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을 모시기 위한 사당이었다. 최치원은 당(唐)에서 귀국한 이후에 헌강왕이 사망하고, 진성여왕[재위 887~897]이 즉위하자 지방 수령으로 나갈 것을 원하여 태산[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일대]으로 갔다. 태산태수에 임명된 최치원은 태산에 있으면서 정읍 피향정[보물]을 건립하고, 유상대(流觴臺)에서 주변 사람들과 교류하였으며, 지방의 학문 발전을 위하여 많이 기여하였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고을 사람들은 사당을 세워 최치원을 제사하였으나 고려 후기 쇠퇴하게 된다. 정극인이 사망하고, 2년 뒤인 1483년 최치원 사당을 정극인이 세운 향학당이 있던 곳으로 옮기고, 옛 지명을 따라 ‘태산사(泰山祠)’라 불렀다.
[정극인의 향학당]
정극인은 1437년 세종이 흥천사(興天寺)를 중건하기 위하여 토목 공사를 벌이자 유생들을 이끌고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왕의 진노를 샀고, 결국 성균관에서 쫓겨났다. 이로 인하여 귀양을 갔다가 풀려나 아내 임실 임씨(任實 林氏)[구고 임씨(九皐林氏)]의 친정이 있는 전라도 태인현(泰仁縣)으로 내려가 집을 짓고 거처하며 집을 ‘불우헌(不憂軒)’이라 하였다. 정극인은 불우헌 앞에 있던 냇물인 필수천(泌水川) 주변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밭을 갈면서 향리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는 한편, 향약계축(鄕約契軸)을 만들어 향리의 교화에 힘썼다. 이후 관직에 다시 나갔다가 1470년(성종 1)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 다시 태인으로 가서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2년 뒤 벼슬에 뜻을 접고 향리의 자제를 열심히 가르친 공으로 3품 산관(三品 散官)이 내려졌다. 이처럼 정극인은 태인에 있으면서 현재 정읍 무성서원이 있던 자리에 ‘향학당(鄕學堂)’을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신잠의 생사당]
신잠은 신숙주의 증손이며, 태인현감[재임 1543~1548]을 역임하였다. 정읍 피향정 옆에 있는 신잠의 비석에 따르면 신잠은 부임하면서 가장 먼저 고을 사람의 폐해를 묻고 바로 개혁하였으며, 송사는 삼가고 스스로를 엄하게 다스리며 사람을 대하는 것을 너그러이 하니 읍민들이 기꺼이 따랐다고 한다. 신잠은 또한 태인의 동서남북 네 곳에 학당을 세워 유학을 가르쳤다. 이처럼 학문을 일으킴으로써 풍속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서당을 세우고, 서책을 인쇄하도록 하고 녹미를 남겨 고을의 자제(子弟)들 중 준수한 자를 모아서 스승을 가려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처럼 신잠이 수령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자, 사람들이 부모처럼 받들었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신잠의 활동을 최치원과 비교하였다. 신잠이 임기를 마치고 강원도 간성군수로 가게 되자, 태인 사람들이 신잠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성황사에 신잠과 부인, 동자, 시녀, 호랑이 상을 모셔놓고 매년 정월 초하루와 보름에 제사를 올려 고을의 안녕과 국세를 상납할 때 불상사가 없기를 기원하였다. 또한 1549년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 비석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살아 있는 사람의 사당을 의미하는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태산서원이 설립되다]
1615년 최치원을 모시는 ‘태산사’와 신잠을 모시는 ‘사당’, 그리고 정극인이 만든 ‘향학당’을 합쳐서 태산서원이 되었다. 1630년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최치원과 신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태인 출신의 선비들이다. 정극인의 외할아버지는 도강 김씨 김윤손(金潤孫)이다. 김약묵은 김윤손의 셋째 아들인 김희석의 아들이므로 김약묵에게 정극인은 고모부가 된다. 김관은 김윤손의 6세손이다. 김약묵의 외할아버지는 태인으로 입향한 여산 송씨 송연손(宋演孫)이다. 송연손의 아들이 송세림이므로 김약묵에게 송세림은 외삼촌이 된다. 이와 같이 태산서원에 배향되었던 인물들은 외부에서 온 신잠과 최치원을 제외하고는 혼맥으로 이어져 있었다.
[배향 인물]
최치원은 자가 고운(孤雲), 해운(海雲), 해부(海夫)이며 시호는 문창후(文昌侯)이다. 아버지는 최견일(崔肩逸)이며, 승려 현준의 동생으로, 최인연·최서원과는 4촌 내지 6촌의 형제 사이였다. 12세에 당에 유학하여 17세에 빈공과에 급제하였고 당에서 관직을 역임하였다. 884년[28세] 귀국하였다. 893년(진성왕 7)에 견당사에 임명되었으나, 도둑이 횡행하여 가지 못하고 894년 시무 10여조를 내고 아찬이 되었다. 이후 태산태수 등을 역임하였다. 후에 난세를 절망하여 각지를 돌아다니며 풍월을 읊다가 마지막에는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신잠은 본관이 고령,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 아차산인(峨嵯山人)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신숙주(申叔舟), 할아버지는 신주(申澍), 아버지는 신종호(申從濩), 외할아버지는 전주 이씨 의창군(義昌君) 이강(李玒)이다. 장인은 전주 이씨 당해수(唐海守) 이붕귀(李朋龜)이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으나 기묘사화로 파방되었다. 1521년 신사무옥 때 안처겸(安處謙) 사건에 연루되어 장흥(長興)으로 귀양 갔다가 양주(楊州)로 이배되었으며, 뒤에 풀려났다. 신잠은 1543년(중종 38) 태인현감으로 부임하여 6년 동안 있으면서 4부학당을 세우고, 유학을 권장하여 선정을 베풀어 태인 사람들은 신잠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성황사에서 매년 정월 초하루와 보름에 제사를 올렸다. 신잠은 이후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에만 몰두하였다. 『병진정사록』에 의하면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하여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고 하였다. 또한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특히 묵죽(墨竹)에 뛰어났다고 하였으며, 『연려실기술』에는 묵죽과 더불어 포도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였다. 현재 신잠의 진짜 작품으로 단정 지을 수 있는 작품은 남아 있지 않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심매도(尋梅圖)」와 「화조도」가 신잠의 작품으로 전하고 있다.
정극인은 본관이 영성[영광], 자는 가택(可宅), 호는 불우헌(不憂軒)·다헌(茶軒)·다각(茶角)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정찬(丁贊), 할아버지는 정광기(丁光起), 아버지는 정인(丁寅)이다. 정극인의 행장에는 아버지가 정곤(丁坤)으로 되어 있다. 외할아버지는 죽산 안씨 안정(安挺)이며, 장인은 임실 임씨[구고 임씨] 임은(林殷)이다. 정극인은 1429년(세종 11) 실시된 기유식년시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437년(세종 19) 세종이 흥천사를 중건하기 위하여 토목 공사를 벌이자 태학생(太學生)을 이끌고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북도(北道)로 귀양을 갔다. 이후 풀려나 태인으로 가 집을 짓고 거처하며 집의 이름을 ‘불우헌’이라고 지었다. 불우헌 앞 필수천(泌水川) 주변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밭을 갈아 양성을 힘쓰면서 향리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는 한편 향리의 교화에 힘썼다. 원래 정극인은 광주(廣州) 두모포리 태생이지만 처가가 태인이어서 우거하게 된 것이다. 송세림의 「동중향음주서(洞中鄕飮酒序)」 발문에도 애초의 태인 사람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다. 1451년(문종 1) 천거로 광흥창부승(廣興倉副丞)이 되어 6품(六品)을 받았다. 이어 인수부승(仁壽府丞)으로 있다가 1453년(단종 1) 실시된 계유식년시에 정과 13위[23/33]로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472년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의 자제를 열심히 가르친 공으로 3품 산관이 내려지자 이에 감격하여 「불우헌가(不憂軒歌)」·「불우헌곡(不憂軒曲)」을 지어 송축하였다. 선비로서의 청렴한 삶을 고수하였고, 검소하며 소박한 삶을 살았다. 문학에 특출한 재능을 보여 최초의 가사 작품으로 알려진 「상춘곡」과 단가(短歌) 「불우헌가」, 경기체가(景幾體歌)의 「불우헌곡」 등을 지어 한국 시가사에 공헌하였다. 특히 「불우헌가」·「불우헌곡」은 모두 우리말을 사용하여 지어 국문학사에 큰 의미가 있다. 문집으로 『불우헌집(不憂軒集)』 2권 1책이 전한다. 묘소는 정읍시 칠보면에 있다.
송세림은 본관이 여산, 자는 헌중(獻仲), 호는 눌암(訥庵) 또는 취은(醉隱)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송계성(宋繼性), 할아버지는 송복리(宋復利), 아버지는 송연손이다. 외할아버지는 김보첨(金甫添)이다. 동생은 문과에 급제한 송세형(宋世珩)이다. 정읍시 칠보면에서 출생하였다. 첫 번째 장인은 강삼(姜參), 두 번째 장인은 조온(趙溫)이다. 1498년(연산군 4) 진사가 되었고, 1502년(연산군 8) 임술 알성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상을 당하여 초상 중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벼슬에 오르지 않아 갑자사화를 면하였다. 이 때문에 스스로 ‘취은’이라 불렀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516년(중종 11) 능성현령(綾城縣令)으로 재직 중 방납(防納) 폐단의 제거, 책 인쇄로 인한 과중된 잡세(雜稅) 폐지, 군액(軍額) 충당을 위한 중[僧]의 추쇄(推刷)[세금 수취의 인정 단위가 될 수 있도록 일반 백성으로 환속시킴]와 절[寺]의 소각, 우전입마(郵傳立馬)[역참의 말을 길러 공용에 이용하던 제도]의 폐에 대한 개선 등을 내용으로 한 지방 행정 제도 개혁안을 상소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개혁안 상소로 중종으로부터 포상받고 벼슬도 가자(加資)되었다. 뒤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당대 문명을 떨쳤고 그림과 글씨에 모두 뛰어났다. 이후 고향에 돌아와 후진을 교육하며 일생을 마쳤다. 나중에 정읍 무성서원에 배향되었다. 송세림의 저술은 소화집(笑話集) 『어면순(禦眠楯)』이 있다.
정언충은 본관이 경주(慶州), 자는 양구(良久), 호는 묵재(黙齋)이다. 아버지는 정온(鄭溫)이다. 1525년(중종 20) 실시된 을유식년시 진사 3등에 합격하였다. 진사시 당시 태인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후 언행이 충직하고 독실하여 유일로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김약묵은 본관이 도강(道康), 자는 태용(太容), 호는 성재(誠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석정(金石鼎), 할아버지는 김윤손(金潤孫), 아버지는 김희석(金希奭), 외할아버지는 여산 송씨 진사 송연손(宋演孫)이다. 형은 진사 김약현(金若玄), 동생은 김약무(金若無)이다. 장인은 여주 윤씨 진사 윤임형(尹任衡)이다. 1540년(중종 35) 실시된 경자별시 을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학문에 힘써 하서 김인후(金麟厚) 등과 도의로 깊이 사귀었다. 사록(司錄)·전적(典籍)·감찰, 형조·예조의 좌랑, 직강(直講) 등을 지냈다. 1552년(명종 7) 한산군수가 되었을 때 검소하고 근면한 관리로 표창을 받았다. 당시 군민을 잘 다스리다가 사임하고 돌아올 때 군민이 거리를 메우고 통곡하며 “우리의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라고 하였다. 1553년 다시 선정을 베풀어 표창을 받았다. 이후 집의(執義)·사성(司成)·내자시정(內資寺正)을 거쳐, 1557년(명종 12) 양주목사를 역임하였다. 학행이 있었으며, 김인후가 지은 묘지명이 『하서전집(河西全集)』에 실려 있다.
김관은 본관이 도강(道康), 자는 옥이(沃而), 호는 명천(鳴川)이다. 개국원종공신인 김회련(金懷鍊)의 후손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한정(閒亭) 김약회(金若晦), 할아버지는 시암(詩嵒) 김원(金元), 아버지는 선무랑(宣務郞)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김대립(金大立)이다. 외할아버지는 함양 박씨 생원 박인(朴訒)이다. 태인 고현(古縣)[현재의 정읍시 칠보면]에서 출생하였다. 김관은 10세에 외숙 난계(蘭溪) 박종정(朴宗挺)에게 수학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실시된 을묘식년시 진사시 3등 57위로 합격하였다. 당시 이이첨(李爾瞻)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이때 이이첨이 김관의 명성을 듣고 여러 차례 만나고자 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정묘호란에 사계 김장생이 소모사(召募使)가 되었을 때 김관에게 군량을 모집하라고 하자, 김관이 수백 석을 모아 응하였다. 백석(白石) 유집(柳緝),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이 일찍이 “기쁨과 성남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은 춘풍기상(春風氣像)이니 우리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은 “나는 젊어서 김관과 더불어 배워 그 사람됨을 익히 알아 진실하고 속임이 없어 순수한 학문은 당세만의 인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집에서 후생을 양성하며 재능에 따라 정성을 다하여 원근에서 많이 모여들었다. 만년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을 얻어서 7년 동안 자리에 누워서 교수(敎授)하는 데 조금도 쉬지 않았다. 정극인, 송세림으로 내려오는 학당과 향약을 지키어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고 나중에 정읍 무성서원에 배향되었다. 김관의 유사, 유고는 『금릉김씨사세고(金陵金氏四世稿)』 및 『금릉세적(金陵世蹟)』에 실려 전한다. 장인은 선산 김씨 판관 김경신(金景信)이다. 아들은 김덕건(金德健)과 김행건(金行健)이다. 묘소는 정읍시 칠보면에 있다.
[무성서원으로 사액되다]
태산서원은 1696년(숙종 22) 전라도 내 유생 202명이 서원의 사액을 청하였다. 이에 숙종이 ‘무성서원(武城書院)’이라는 이름을 새긴 현판을 내려 사액 서원이 되었다. 태산서원이 있던 태인현은 고려 시대 태산현과 인의현을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무성’이라는 의미는 인의현의 별칭이기도 하다. 즉, 고려 시대 인의현에 대하여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빈굴현(賔屈縣)을 경덕왕 대에 빈성현(斌城縣)으로 바꾸었다고 되어 있으며,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경덕왕 대 무성현(武城縣)으로 바꾸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무성현은 인의현의 옛 이름이다. 한편 『논어』「양화」 제17, 4장 1절에 “공자께서 [자유(子游)가 수령으로 있던] 무성에 가서 [고을 사람들이] 거문고와 비파를 타며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들으셨다[子之武城 聞弦歌之聲]”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무성(武城)’과 누각인 ‘현가(弦歌)’의 이름이 유래하였다.
[정읍 무성서원의 구조]
정읍 무성서원의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넓은 마당이 있고, 정면에 ‘현가루(絃歌樓)’가 있다. 현가루는 서원으로 들어가는 문루이자 유생들의 휴식처이다. 현가루는 1891년 세워졌고 1903년 중수하였다. 현가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2층 누각이다. 1층 나무 기둥 사이에 세 개의 문을 만들었고, 2층은 4면이 트인 누마루 구조이다. 현가루 좌우로 담장이 이어지고, 담장 앞에는 흥선대원군의 형으로 영의정을 지낸 이최응(李最應)[1815~1882]의 불망비와 무성서원 중수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다.
2층 누각에 있는 ‘현가루’ 현판은 1904년 손병호가 썼다. 무성서원현가루중수기(武城書院絃歌樓重修記)[1903년(계묘) 함열군수 정관영(鄭寬永)], 무성서원현가루기(武城書院絃歌樓記)[1891년(신묘) 전라도관찰사 김규홍(金奎弘)], 현가루중수기(絃歌樓重修記)[1936년(병자) 전라북도지사 고원훈(高元勳)], 무성서원현가루창건기(武城書院絃歌樓刱建記)[1891년(신묘) 관찰사 민정식(閔正植)] 등의 현판이 있다.
현가루를 지나면 정면에 3칸의 마루로 앞뒤가 훤하게 트인 구조의 강당인 ‘명륜당’이 있다. 정극인이 세운 향학당에서 유래한 명륜당은 태산서원 창건 당시에는 현재와는 다른 건물이었지만, 1825년 소실되었고 1828년 태인현감 서호순이 다시 세웠다. 정면에 ‘무성서원’이라 쓰인 현판이 있다. 현판에는 1696년(병자) 11월 사액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세 칸은 대청마루, 양옆은 방으로 되어 있다. 아궁이 때문인지 방 앞 툇마루는 대청마루보다 조금 높다. 대청 뒤편에 문이 없어서 사당인 태산사의 삼문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강당에는 강당중창기(講堂重創記)[무자년 김민(金玟)], 무성서원제기중수기(武城書院祭器重修記)[1967년(정미) 김인기(金麟基)], 무성서원중수기(武城書院重修記)[병오년 김병술(金秉述)], 무성서원호보노환복기(武城書院戶保奴還復記)[1882년(임오) 김직흠(金稷欽)], 무성서원중수기(武城書院重修記)[1895년(을미) 고부군수 윤병(尹秉)], 무성서원현우중수기(武城書院賢宇重修記)[1901년(신축) 민신호(閔申鎬)], 무성서원최선생문집중간기(武城書院崔先生文集重刊記)[1834년(갑오) 박해언(朴海彦)], 무성서원원지복구기(武城書院院址復舊記)[1937년(정축) 김환풍(金煥豊)], 무성서원장원중수기(武城書院牆垣重修記)[1928년(무진) 김환풍(金煥豊)], 무성서원중수기(武城書院重修記)[정사년 전 참봉 이재우(李在宇)], 무성서원의반중수기(武城書院椅盤重修記)[1927년(정묘) 김택(金澤)], 무성서원중수기(武城書院重修記)[1854년(갑인) 송지호(宋持灝)], 무성서원중수기(武城書院重修記)[1932년(임신) 김환일(金煥一)], 현우중수급전사소창건기(賢宇重修及典祀所創建記)[1930년(경오) 김환풍(金煥豊)], 무성서원원지개간기(武城書院院志改刊記)[1884년(갑신) 정읍현감 기양연(奇亮衍)], 무성서원중수기(武城書院重修記)[기묘년 송정순(宋程淳)], 무성서원중수기(武城書院重修記)[무자년 김광흠(金光欽)], 무성서원모현기(武城書院慕賢記)[계사년 유원모(柳源模)], 무성서원중수기(武城書院重修記)[1847년(정미) 김약묵의 10대손 김병흠(金丙欽)], 무성서원중수기(武城書院重修記)[1892년(임진) 윤제익(尹濟翼)], 무성서원중수기(武城書院重修記)[병술년 김영조(金永朝)], 무성서원중수기(武城書院重修記)[을해년 송■■(宋■■)], 무성서원기(武城書院記)[1906년(병오) 김인기(金麟基)]가 있다.
기숙사인 강수재(講修齋)는 강당 오른쪽 담장 너머에 있다. 원래는 서재인 흥학재(興學齋)도 있었으나 현재는 동재인 강수재만 남아 있다. 강수재는 사액 후에 고직사(庫直舍)[서원 관리인의 살림집]를 기숙사로 변경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1887년(고종 24) 세워진 것으로 이후 여러 번 수리하였다. 강수재에는 무성서원기(武城書院記)[병진년 김사겸(金思謙)], 기문(記文)[정사년 송흥섭(宋興燮)], 무성서원중수기(武城書院重修記)[1904년(갑진) 전주군수 권직상(權直相)], 무성서원강수재중건기(武城書院講修齋重建記)[1905년(을사) 김인기(金麟基)], 김영득찬양문(金榮得讚揚文)[1994년(갑술)], 무성서원기(武城書院記)[1902년(임인) 김직술(金直述)] 등의 현판이 있다. 강수재 앞에는 병오창의비 등의 비석이 있다. 흥학재가 있던 곳은 현재는 비각으로 불리고 있으며, 서호순 불망비(徐灝淳 不忘碑)가 있다. 『무성서원지』에 따르면 불망비는 1849년(헌종 15) 서원을 중창하는 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비석이 세워졌다고 한다.
태산사는 강당 뒤쪽에 있다. 명륜당에서 다섯 단의 돌계단 위에 태극 문양의 사당 내삼문이 서 있다. 태산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1483년(성종 14)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으며, 현재 건물은 1844년(헌종 10) 세운 것이다. 최치원을 비롯한 배향 인물이 모셔져 있다.
[정읍 무성서원의 변천]
고려 시대에 최치원의 사당인 태산사가 월연대(月延臺)가 있던 곳에 세워졌다가 고려 후기 훼손되고 파손되었다. 정극인이 현재의 정읍 무성서원이 있는 자리에 1483년 향학당을 세우고 교육을 주도하였으며, 1484년(성종 14) 현재의 자리로 옮겨 왔다. 1544년 현감으로 있던 신잠이 이임하자 생사당을 세워 제사하였다. 1615년(광해군 7) 태산사와 신잠의 사당을 합하여 태산서원으로 하고, 기존에 배향된 최치원과 신잠 외에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을 배향하였다. 1675년 김관을 추가로 배향하고, 1696년(숙종 22) 전라도 내 유생 202명이 서원의 사액을 청하여 ‘무성서원’으로 사액되었다. 1784년(정조 8) 하동 쌍계사에 봉안된 최치원 영정을 정읍 무성서원으로 이안하여 봉안하였다. 영정은 1831년(순조 31) 석지 채용신(蔡龍臣)이 다시 그렸다. 1825년(순조 25) 화재로 강당이 소실되자, 1828년 서호순이 현감으로 있을 때 신축하였다. 1834년(순조 34) 『계원필경』을 간행하였다. 1868년 전국적으로 서원 철폐가 이루어졌음에도 정읍 무성서원은 화를 면하였다. 1891년 현가루를 다시 세우고 1924년 원우를 중수하였다. 1930년대에도 중수가 많이 이루어졌다.
[병오창의]
대한제국기에 일어난 의병은 대체로 1895년을 전후하여 봉기하였다. 즉, 일본의 경복궁 침범[1894년 7월], 명성황후 시해사건[1894년 10월], 단발령[1895년 12월] 등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이때 경기도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 활동이 있었으나 전북 지역에서는 의병 봉기가 없었다. 1894년 있었던 동학농민혁명의 여파로 당시 전북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뜻있는 우국지사들은 일본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대한제국의 명운을 그대로 볼 수만은 없었다.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의병들이 다시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전북 지역에서도 1906년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1833~1907]의 문인으로 고창 출신의 고석진(高石鎭)[1856~1924]과 진안 출신의 최제학(崔濟學)[1882~1959] 등 유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경기도 포천 출신인 최익현은 제주도와 흑산도에서의 유배 생활로 호남 유림들과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전라도 유림들이 최익현을 중심으로 한 의병 봉기 계획을 추진한 것이다. 최익현도 을사늑약을 파기하려면 의병 봉기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며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동조자를 물색 중이었다. 최익현은 안병찬(安炳瓚)[1854~1929], 곽한일(郭漢一)[1869~1936], 남규진(南圭振) 등 충청도 출신 인물들에게 연락하여 의병을 일으키자고 권유하였다. 당시 최익현은 전국의 유력 인물들과 협력하여 동시다발적인 의병 봉기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제학 등 호남 유림과 최익현이 연계가 되어 태인에 거주하던 전 낙안군수 임병찬(林炳瓚)[1851~1916]을 끌어들였다.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알리는 상소문을 올리고, 다른 한편으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1846~1916] 등과 전라남도 담양의 용추사(龍湫寺)에서 만났으나 합의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1906년 6월 4일 정읍 무성서원에 도착한 최익현은 강회를 주도하였다. 최익현은 강회에서 국가와 사직을 구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키자고 호소하였는데, 80여 명의 유생이 자원하였다. 이때 의병은 을사늑약의 파기와 신분을 초월하여 모든 국민이 총궐기하여 국권 회복에 앞장서자고 하였다.
최익현을 중심으로 한 태인의병[병오창의]은 정읍, 순창, 곡성 등지를 순회하며 포수(砲手) 확보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수백 명의 유생이 태인의병에 투신함으로써 태인의병의 규모는 일주일 만에 900명으로 늘어났다. 그중 절반이 유생들이었으며, 포수로 총을 가진 사람은 300명 정도였다.
최익현의 거병 소식을 들은 전라남도관찰사로 있던 이도재(李道宰)[1848~1909]는 의병의 해산을 요구하는 칙지를 전달하는 한편,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대한제국군 진위대를 급파하였다. 이전에 이도재는 1894년 11월 전라감사에 임명되었을 때 최익현에게 동학군 탄압 계책을 문의하였고, 최익현의 말을 그대로 따르기도 하였다. 또한 김개남과 전봉준을 체포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때 이도재는 진위군에게 최익현 의병대와 절대 교전하지 말도록 명을 내렸다고 한다. 이에 최익현은 “동족끼리 싸울 수 없다”라고 하면서 6월 11일 의병대를 해산하였다. 그러나 순창객사에 체류하고 있던 최익현과 12명의 의병들은 일본 군경의 공격을 받아 6월 13일 붙잡혔으며, 최익현은 대마도로 끌려가 생활하다가 사망하였다. 비록 태인의병대가 활동한 시간은 10일 남짓에 불과하지만 전라도 유생들에게 끼친 영향은 아주 막대하다. 태인의병대가 태동한 곳이 바로 정읍 무성서원이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정읍 무성서원에는 1486년(성종 17) 이후의 봉심안(奉審案)·강안(講案)·심원록(尋院錄)·원생록(院生錄)·원규(院規) 등의 귀중한 서원 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또한 전북특별자치도에서 유일하게 훼철되지 않은 서원이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9개의 서원이 등재되었을 때 호남에서는 전라남도 장성군에 있는 필암서원과 함께 정읍 무성서원이 등재되었다. 정읍 무성서원이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 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Outstanding Universal Value)]’가 인정”되는 서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