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2명의 왕비를 배출한 정읍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007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40년 - 정순왕후 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54년 2월 19일 - 정순왕후 단종과 혼인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21년 6월 4일 - 정순왕후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70년 - 숙빈 최씨 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93년 5월 30일 - 숙빈 최씨 숙원 책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94년 7월 23일 - 숙빈 최씨 귀인 책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98년 - 정순왕후 추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99년 12월 13일 - 숙빈 최씨 숙빈 책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18년 3월 9일 - 숙빈 최씨 사망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지역에서 조선 시대 왕비 두 명이 배출된 일.

[개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에서는 두 명의 왕비가 배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와 영조의 생모인 숙빈(淑嬪) 최씨(崔氏)의 고향이 바로 정읍이다.

[정순왕후 송씨]

정순왕후 송씨는 1440년(세종 22)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동편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 1521년(중종 16) 6월 4일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단종은 1441년 7월 23일 출생하였으며, 1452년 6월 14일 즉위하였다. 송씨는 1454년(단종 2) 2월 19일 단종과 혼인하였으며, 1455년 8월 3일 단종이 퇴위하면서 정순왕후도 물러났다.

1. 가계

여산 송씨는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여산면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시조는 송유익(宋惟翊)이다. 2세 송숙문(宋淑文)이 고려 원종 대에 정당문학을 역임하였으며, 4세인 송송례(宋松禮)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원나라 도원수(道元師) 홀돈(忽敦), 부원수(副元師) 다구(茶丘)와 함께 충렬왕 때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상중대광 문하시중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에 올라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졌다.

여산 송씨가 정읍시에 들어오게 된 것은 시조로부터 7세인 송교(宋郊)[1304~1383] 대이다. 송교는 문과에 급제하고 중정대부를 역임하였다. 아버지 송린과 집안 일족이 충선왕에 의하여 주륙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고부와 태인 사이에 있는 운주산(雲注山)으로 내려왔다. 운주산에서 거주하면서 호를 수운거사(睡雲居士)라고 하였다. 송교의 무덤도 태인(泰仁) 천애동(天涯洞)에 있다고 한다. 정순왕후의 고조할아버지는 입향조 송교의 아들인 송희(宋禧), 증조할아버지는 송계성(宋繼性), 할아버지는 송복원(宋復元), 아버지는 송현수(宋玹壽)이다. 송현수의 누이는 세종의 8남인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에게 출가하였다. 어머니는 여흥부부인 민씨이다. 정순왕후의 친정인 여산 송씨는 왕실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할아버지 송복원의 누이는 정종의 7남 수도군의 부인이었고[정순왕후의 대고모], 아버지 송현수의 누이도 세종의 8남 영응대군에게 시집가 왕의 며느리가 되었다. 영응대군은 단종의 친숙부로 대방군부인 송씨는 정순왕후의 친고모이자 숙모가 된다. 정순왕후 어머니 여흥부부인 민씨는 한명회의 부인 황려부부인 민씨와 사촌 간이므로 예종의 비 장순왕후, 성종의 비 공혜왕후와 정순왕후는 외가로 6촌 사이이다. 송현수와 세조도 어릴 적 친하게 교류하였던 죽마고우였으며 중종의 사부였던 순충보조공신 여원군 송연손정순왕후의 당숙이다. 송현수는 1454년(단종 2) 풍저창부사(豊儲倉副使)로 있을 때 딸이 단종의 비로 책봉되자 여량군(礪良君)에 봉해지고, 지돈녕부사를 제수받았고, 이어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고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뒤 윤대(輪對)[관원들이 왕과 대좌하여 응대하기도 하고 또 정사의 잘잘못을 아뢰는 일] 때에 상왕의 보필을 당부받았다.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 사건이 일어났을 때 대간(臺諫)들은 송현수를 처벌하기를 요구하였으나 세조의 두둔으로 처벌을 면하였다. 1457년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와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등이 다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이때 송현수도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된 혐의가 있다 하여 모역죄로 대신들은 능지처사(凌遲處死)를 주장하여 결국 추국받게 되었다. 추국의 결과 장(杖) 100대에 영원히 원방의 관노(官奴)에 속하게 되었다가 종친과 대신들의 주장에 따라 교형(絞刑)에 처하여졌으며, 아내와 자식 역시 관노비에 충당되었다. 송현수의 아들인 송거(宋琚)가 과거를 보려 하자 대간의 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성종이 특별히 허락하였고 조카인 송영(宋瑛)도 대간에 임명되는 등 일문에 대한 서용의 기회가 부여되었다. 숙종 때 영돈녕부사에 추증되고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추봉되었다.

2. 왕비 책봉과 활동 사항

단종은 1452년 6월 14일 즉위하였으며,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 측근 인물들이 대거 숙청당하였다. 문종[1414~1452]의 국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수양대군의 강권으로 송씨는 1454년(단종 2) 2월 19일 왕비에 책봉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성대군과 세종의 후궁이자 유모와도 같았던 혜빈 양씨 등 단종의 지지 세력들이 숙청당하자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양위[1455]하면서, 정순왕후도 1455년 6월 24일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로 존봉되었다. 1456년(세조 2)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된 이후 부인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금성대군[1426~1457]의 사건으로 1457년 7월 12일 서인으로 전락하였다. 민담에 따르면 정순왕후 송씨는 단종이 유배된 후에 출가하였으며, 단종이 사망한 후에는 무척이나 슬퍼하면서 앞산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정순왕후와 관련하여서는 여러 가지 설화들이 전한다. 1698년(숙종 24)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복(追復)되자 다시 정순왕후로 추복되고, 신위가 창경궁에 옮겨졌다. 시호는 의덕단량제경정순왕후(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이고, 능호는 사릉(思陵)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107에 있다.

[숙빈 최씨]

숙빈 최씨[1670~1718]는 영조의 생모로 정읍시 태인면 주변에서 출생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 숙빈 최씨의 출생지 관련 설

숙빈 최씨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다. 먼저 『영조실록』에 따르면 숙빈 최씨는 여경방 서학동[현 서울특별시 세종로]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서학동은 서부의 학교 서학이 있는 동네로 여경방에 속한 곳이었다. 영조는 생가에 숙빈 최씨의 아버지 최효원과 외할아버지 홍계남의 자손이 대대로 살면서 팔지 못하게 하였다고 알려져 있어, 영조가 상당히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숙빈 최씨를 위하여 별도의 사당 육상궁(毓祥宮)을 세우고 시호(諡號)를 올리는 등 추숭 작업을 마무리한 뒤에 뒤늦게 생가 복원을 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있다. 육상궁이 경복궁의 서북쪽인 북부 순화방에 있었으므로 가까운 거리에 생가를 두고자 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조선 시대의 창평현[현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갑향리]에서 출생하였다는 설이다. 이 설에 따르면 나주목사로 부임하러 가던 어떤 사람의 아내인 민씨가 길가 또는 용흥사에서 이름이 복순인 최씨를 데리고 갔고, 후에 인현왕후(仁顯王后)[1667~1701)]와 함께 궁궐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설은 『태인지』에서도 언급된다. 세 번째는 정읍시 태인면에서 출생하였다는 설이다. 이 설은 장봉선(張奉善)이 편찬한 『정읍군지(井邑郡誌)』[1936]에서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다.

『정읍군지』 고적(古蹟) 제언(堤堰)·지소(池沼)·보(洑)·교량(橋樑) 항목에 있는 대각교(大脚橋)[36쪽]에 실려 있는 원문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대각교(大脚橋) 태인면(泰仁面) 거산리(居山里) 거산교(居山橋)[태인천상(泰仁川上)]의 동측(東則)에 잇섯다. 증왕(曾往)은 교통(交通)에 대(對)한 관념(觀念)이 적어 치도교량(治道橋樑)을 퍽으나 등한시(等閑視) 하여슴으로 통행(通行)에 대(對)한 불편(不便)이 대단(大端)하였다. 이곳도 남북교통(南北交通)의 주요노선(主要路線)이나 충분(充分)한 교량(橋樑)이 무(無)하야 통행인(通行人)의 불편(不便)이 다(多)하였더니 거금(距今) 이백육십여년전(二百六十餘年前)에 태인현(泰仁縣) 백암리(白岩里)[현 칠보면(七寶面)]에 거주(居住)하는 자선가(慈善家) 박인걸(朴仁傑) 선생(先生)이 단독(單獨)으로 사재(私財)를 투(投)하야 만년불패(萬年不敗)의 굉장(宏壯)한 석교(石橋)를 가설(架設)하야 통행인(通行人)의 편리(便利)를 도(圖)하여슴으로 고금(古今)은 물론(勿論)하고 씨(氏)의 공로(功勞)를 찬양(撰揚)치 안흐리 업더니 현대(現代)에 지(至)하야는 시세(時勢)의 변천(變遷)을 따라 그 길이 하편(下便)으로 이설(移設)[현(現) 경목선일등도로(京木線一等道路)]됨에 이 대각교(大脚橋)도 폐지(廢止)되였다.

주(註) 「전설(傳說)」 거금(距今) 이백육십여년전(二百六十餘年前)에 민둔촌유중공(閔屯村維重公)이 외직(外職)으로 영광(靈光)을 출재(出宰)할새 부임도중(赴任途中) 차교(此橋)에 지(至)하야 휴게(休憩)하였난대, 그 부인(夫人)은 팔세(八歲)의 사랑하는 따님을 포(抱)하였다. 맛츰 그 압흘 통과(通過)하는 걸소녀(乞少女)가 있으니 의복(衣服)은 비록 남루(襤褸)하나 그 연령(年齡)과 용모(容貌)의 귀여움이 자기(自己)의 딸과 조곰도 틀님이 업슴으로 그 성(姓)과 부모형제(父母兄弟)의 유무(有無)를 문(問)한 즉(則) 성(姓)은 최(崔)오 부모(父母)는 사별(死別)하고 형제친척(兄弟親戚)이 업는 무의탁(無依托)한 가련(可憐)한 소녀(少女)이였다. 둔촌(屯村) 부인(夫人)은 자기(自己) 따님을 생각하는 동시(同時)에 그를 동정(同情)하야 의복(衣服)을 개착(改着)식혀 따님과 갓치 포거(抱去)하였다. 그리하야 사랑하기를 그 딸과 조곰도 차이(差異)가 업는 동시(同時)에 글 공부(工夫)와 예절(禮節)을 동일(同一)하게 가라침애 재질(才質)이 민첩(敏捷)하야 일람첩기(一覽輒記)하였다. 둔촌(屯村)이 내직(內職)으로 승차(陞差)됨에 역시(亦是) 다리고 부경(赴京)하였다. 맛츰 숙종(肅宗)께서 초처(初妻)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승피(昇避)를 당(當)하사 다시 현숙(賢淑)한 왕후(王后) 민씨(閔氏)를 선택(選擇)하섯으나 이분이 곳 둔촌(屯村)의 따님이시다. 그리하야 왕후(王后)는 일시(一時)도 떠날 수 업는 최씨(崔氏)를 다리고 입궁(入宮)하섯다. 숙종(肅宗)께서 어엽분 장희빈(張禧嬪)의게 일시(一時) 미혹(迷惑)하사 후덕(厚德)하신 민씨(閔氏)를 폐출(廢黜)하섯다. 최씨(崔氏)는 민후(閔后)를 위(爲)하야 밤마닥 남모르게 기도(祈禱)를 드리더니 어느날 밤에 숙종(肅宗)께서 암행(暗行)하시다가 차(此)를 발견(發見)하시고 옛 주인(主人) 위(爲)함을 가상(嘉尙)히 넉이사 갓가히 하섯다. 속담(俗談)에 낫말은 새가 듯고 밤말은 쥐가 전(傳)한다고 숫색시 최씨(崔氏) 배가 이상(異常)히 불너가니 까닭을 아는 사람덜이 한입 두입 건너 필경(畢頃) 장희빈(張禧嬪)의 귀에 들어갓다. 어느날 숙종(肅宗)께서 낫잠을 주무시더니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내전(內殿) 마당에 노힌 「독」 밋헤서 용(龍) 한 마리가 나오려다가 못 나오고 거의 죽게 되였다. 깜작 놀나 깨시자 급(急)히 내전(內殿)으로 드러가서셔 두말삼도 안하시고 「독」을 들나하시니 실식(室息)하야 거의 죽게 된 최씨(崔氏)가 「독」 밋헤 잇섯다. 이럼으로 숙종(肅宗)께서는 장씨(張氏)를 미워하사 사사(賜死)하시고 민후(閔后)를 입궁(入宮)케 하섯다. 그 후(後) 최씨(崔氏) 몸에서 영종(英宗)이 탄생(誕生)함으로 상궁(尙宮)을 봉(封)하섯다. 상궁(尙宮)은 자기 몸이 귀(貴)히 됨애 태인현감(泰仁縣監)의게 명(命)하야 친척(親戚)을 조사(調査)하여스나 일인(一人)도 없었고 부모(父母)의 분묘(墳墓)를 조사(調査)하여스나 그 역(亦) 업섯다. 기후(其後) 영종(英宗) 사년(四年) 무신(戊申) 박필현(朴弼顯)의 난(亂)에 태인(泰仁) 이민(吏民)이 면화(免禍)함은 영종(英宗)께서 기모친(其母親)의 출생지(出生地)임을 생각(生覺)하심이오 최상궁(崔尙宮)의 출생지(出生地)임으로 태인현(泰仁縣)이 승격(昇格)되였을터이였으나 박필현(朴弼顯)의 난(亂)으로 곤(困)하야 낙차(落差) 되였다.

『정읍군지』에 따르면 1936년 기준 260여 년 전인 1674년(현종 15)경 민유중(閔維重)[1630~1687]이 후에 인현왕후(仁顯王后)[1667~1701]가 되는 8살 된 딸과 함께 영광(靈光)으로 부임하기 위하여 내려가던 중 대각교에서 걸식하던 소녀인 후의 숙빈 최씨를 만났다는 것이다. 인현왕후나 숙빈 최씨의 나이를 고려하면 연대는 비슷하다. 『태인지』에는 “[무신]난 후 조정에서는 안음현(安陰縣)[뒤의 안의현(安義縣)]은 폐현(廢縣)시켰으나 태인현은 아무런 조치도 내리지 않았다. 한편 전하는 이야기로는 숙빈 최씨의 고향은 전라도 태인으로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태인현감 박필현도 가담하여 태인현이 폐현될 위기에 처하였으나, 영조가 어머니의 고향이라 하여 관대히 넘어갔다고 한다. 또한 숙빈 최씨의 이름은 ‘복순’이며 어려서 가족이 전염병으로 모두 죽고 고아가 되었는데, 나주목사 일행을 만나 목사의 부인이자 인현왕후의 친척인 민씨가 거두었으므로, 훗날 인현왕후가 궁에 들어갈 때 따라 들어가 궁인이 되었다고 한다. 항간에서는 영조의 생모가 태인 최사령의 딸 최숙빈이어서 관대히 봐준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은 부분이 많아 받아들이기 어렵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숙빈 최씨는 고향인 태인의 현감에게 명하여 친척을 찾았으나 한 사람도 없었고 부모의 묘(墓)도 찾지 못하였다고도 한다. 하지만 민유중이 영광군수를 역임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대신 민유중은 1668년(현종 9) 충청감사에 임명되었으며, 1669년 평안감사, 1672년 형조판서와 대사헌, 1673년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70년대에 판서를 역임하던 민유중이 영광군수로 부임하였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

2. 대각교 터

민유중과 숙빈 최씨가 만났다고 알려진 대각교는 현재의 대각교와 만남의 광장이 조성된 곳이 아니다. 대각교태인면(泰仁面) 거산리(居山里)에 있었다. 대각교는 옛날 전주감영에서 남도(南道)로 가는 교통의 요로(要路)였다. 당시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에 다리가 없어져 불편하였다. 300여 년 전에 태인 백암리(白岩里)[현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에 살고 있던 박잉걸(朴仍傑)이 사재로 홍수가 나면 유실되던 다리를 장대석(長大石)으로 완고하게 만들고 ‘큰 다리’라 불러 대각교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현재는 거산교(居山橋)라고 한다. 원래의 대각교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았으나 1979년 모래 채취 작업을 하던 중 발견된 ‘대각교 유지(大脚橋 遺址)’는 현재의 대각교에서 200m쯤 하류(下流)로 내려간 제방의 북쪽 논 가운데로, 여기서 장대석을 찾아냈다. 『태인현지(泰仁縣誌)』[영조 년간 출간]에는 ‘대각교(大角橋)’ 대신에 ‘태거교(泰居橋)’로 쓰여 있으니 원래의 태거교가 대각교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대각교는 현재 서울-목포 간의 국도 제1호가 위쪽에 나면서 폐교되었다.

3. 가계

숙빈 최씨 신도비에 따르면 숙빈 최씨의 본관은 수양(首陽)이다. 해주 최씨는 고죽 최씨(苦竹 崔氏)라고도 하고, 수양 최씨(水楊 崔氏)라고도 한다. 즉, 수양 최씨는 해주 최씨의 다른 이름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최억지(崔億之), 증조할아버지는 증 우찬성 최말정(崔末貞), 증조할머니는 증 정경부인 평강 장씨, 할아버지는 증 우의정 최태일(崔泰逸), 할머니는 증 정경부인 평강 장씨[통덕랑 장원(張遠)의 딸], 아버지는 사과 증 영의정 최효원(崔孝元)이다. 외할아버지는 통정대부를 지내고 증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된 남양 홍씨 홍계남(洪繼南)이며, 외할머니는 강릉 김씨이다. 홍계남은 영조의 특명으로, 숙빈 최씨의 외할아버지라는 이유로 특별 증직을 받았다고 한다. 숙빈 최씨의 본관이 해주 최씨라고 하나 해주 최씨의 시조 최온(崔溫)의 몇 대 후손인지는 불분명하다. 숙빈의 직계 조상은 할아버지 최태일, 증조할아버지 최말정, 고조할아버지 최억지의 이름이 전하지만 이들은 해주 최씨 족보에 실리지 못하였고, 최온, 최충과의 관계에 대하여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또한 숙빈 최씨의 외가 쪽으로는 외할아버지 홍계남은 남양 홍씨 당홍(唐洪) 홍은열(洪殷悅)의 후손이라고 홍계남의 묘비문에 기록되어 있으며, 외가 쪽으로는 외증조할아버지 홍인백, 외고조할아버지 홍수정 외 5대조 홍전까지 이름이 전한다. 숙빈의 외할머니 강릉 김씨는 홍계남의 묘비문에 강릉 김씨 대봉(大鳳)의 딸이라고 하나 강릉 김씨 시조 김주원과의 관계는 알려진 것이 없다.

​4. 입궐

숙빈 최씨가 언제 궁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7세 때 무수리로 궁에 입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숙빈 최씨의 출신에 대한 이설 중의 하나로,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서는 고종의 후궁 삼축당 김씨와 관화당 이씨가 고종에게 직접 전하여 들은 이야기라고 하여 숙빈이 본래 침방 출신이라는 설이 수록되어 있다. 침방 출신 설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숙빈 최씨가 7살에 입궁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7살은 보통 궁녀들이 입궁하는 평균 연령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숙빈 최씨가 침방나인으로 있었다는 설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은 숙빈이 침방나인 시절 세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었다는 말을 듣고 평생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침방나인은 궁녀 직첩 중에서 두 번째로 높은 서열이라 아들인 영조가 신분 콤플렉스에 시달린 것에 비하여 너무 높은 직책이라는 의견도 있어 확실하지 않으며, 오히려 침방나인의 시중을 들었던 각심이 출신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영조가 어머니의 신분 콤플렉스에 평생을 시달렸고 7살에 입궁하였다는 두 가지 확실한 기록만을 놓고 봤을 때 침방나인으로 입궁하였다가 인현왕후 폐출 시 같이 출궁 후 서인들에 의하여 무수리로 재입궁한 것이 아닐까 추측되지만, 7살에 입궁하였다는 숙빈 최씨 신도비 기록 자체가 영조에 의하여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또한 믿을 수 없다고도 한다.

5. 후궁 생활

최씨가 처음 승은을 입은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693년(숙종 19) 5월 30일 처음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으로 책봉되었고, 10월 6일 아들 이영수(李永壽)를 낳으나 이영수는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임신 주기가 10개월 정도 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1692년 겨울 숙종과 인연을 맺고 1693년 1월 초에 임신한 것으로 보인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해인 1694년 7월 23일 숙종의 특명으로 종2품 숙의(淑儀)가 되었고 9월 13일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을 낳았는데 훗날 조선의 21대 임금인 영조이다. 1695년(숙종 21) 7월 18일 종1품 귀인(貴人)이 되었고, 1699년(숙종 25) 12월 13일에 단종의 복위[1698년(숙종 24)] 기념으로 정1품 빈으로 봉하여지면서 숙(淑)이라는 휘호를 얻어 ‘숙빈(淑嬪)’이 되었다. 숙종의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는 친분이 두터웠으며, 인현왕후의 사후 숙종에게 희빈 장씨의 저주 굿을 발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희빈 장씨가 사사되기 하루 전에 숙종은 비망기를 내려 후궁이 왕비가 될 수 없다고 국법을 바꾸기에 이르렀다. 숙종이 이렇게 국법을 바꾼 것은 숙빈 최씨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6. 생애 후반

숙빈 최씨는 1716년(숙종 42) 병환이 들어 사가로 나가 치료하라는 숙종의 명으로 3년 동안 사가에 머물렀다. 숙빈 최씨는 오래도록 왕과 왕비의 안후를 거르게 됨에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졌고, 조금만 차도가 있으면 곧 대궐로 갔다고 한다. 1718년(숙종 44) 3월 9일 창의동 사가에서 49세로 사망하였다. 세 내전[왕, 왕비, 동궁]에서 중궁의 관원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하되 부의가 특별히 두터웠고, 1718년 5월 경신일 양주의 고령동 옹장리 서쪽 언덕에 예장(禮葬)으로 장사를 지냈다. 주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소령원길 41-65[영장리 267]이다. 자녀는 이영수[1693~1693], 이금[연잉군, 후의 영조], 왕자(王子)[1698~1698)]가 있다.

7. 사후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 이금은 아들이 없던 경종의 왕세제를 거쳐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로 즉위하였다. 영조는 즉위 원년, 어머니 최씨의 사당을 지어 ‘숙빈묘(淑嬪廟)’라 하였고, 1744년(영조 20) ‘육상묘(毓祥廟)’라고 올렸다가 다시 1753년(영조 29)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시켰다. 육상궁은 현재 칠궁에 합사되어 있다. 묘소도 1744년 ‘소령묘(昭寧墓)’라고 올렸다가 1753년 ‘소령원(昭寧園)’으로 다시 승격시켰으며, 사당과 무덤에 궁호와 원호를 올릴 때 함께 ‘화경(和敬)’의 시호를 올렸다. 후일 여러 차례에 걸쳐 ‘휘덕안순수복(徽德安純綏福)’의 존호가 더 올려졌다. 영조는 숙빈 최씨의 신분 상승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8. 정읍시의 활동

정읍시에서는 현재의 대각교가 있는 곳에 만남의 광장을 조성하여 숙빈 최씨를 기리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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