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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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광환 |
[정의]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과 애국지사 김개남의 엇갈린 삶과 얄궂은 운명에 얽힌 이야기.
[개설]
사발통문이 작성된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의 고장이다. 동학농민혁명 3거두로 일컫는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김개남·손화중과 영솔장 최경선이 살았던 곳으로 혁명의 요람이다.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인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났으며,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최초로 격돌하여 동학농민군이 대승을 거둔 황토현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그리고 전봉준과 손병희가 이끈 동학농민군 최후의 전투인 태인 전투가 벌어진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역사의 현장 정읍에서 일어난 동학농민군 최고 지도자 전봉준과 입암산성 별장 이춘선, 전봉준을 밀고한 김경천의 우정과 배신 이야기,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김개남과 애국지사 임병찬의 엇갈린 삶과 얄궂은 운명을 돌아본다.
[전봉준과 이춘선의 선택]
전봉준은 1894년 11월 27일, 태인 전투를 끝으로 남은 동학농민군들에게 후일을 기약하면서 해산을 명하였다. 그 후 전봉준은 11월 29일 정읍으로 나와 입암산성으로 피신하였다. 당시 전봉준은 왜 피신처로 입암산성을 택하였을까? 입암산성을 지키는 별장 이춘선은 전봉준을 체포하지 않고 왜 숨겨 주었을까? 일본군과 관군에게 쫓기는 신세로 하룻밤 몸을 맡길 곳을 찾아 추운 겨울날 입암산성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내딛는 수밖에 없었던 전봉준은 많은 고뇌를 하였을 것이다. ‘과연 친구는 날 받아 줄 것인가? 받아 주더라도 훗날 이 일로 인하여 친구가 피해를 입지나 않을까?’
아마 그날 밤 입암산성에서 전봉준은 이춘선과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을 것이다. ‘친구여! 자네 입장도 난처할 터인데 날 받아 주어서 고맙네.’, ‘아닐세 친구여! 내 자네 뜻이 옳고 바르다는 것을 아네. 그런 자네에게 힘이 되어 주지 못하는 내 처지가 오히려 부끄럽고 원망스럽네. 자네는 내 친구이기 이전에 조선 민중들의 희망이요 등불이라네.’
이춘선은 1845년 정읍현 서일면 동촌에서 태어났다. 자는 종록(鍾祿)이며, 1888년 고종 25년 4월 무과에 급제하여 1889년 11월 25일자로 선략장군 입암산성 별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전봉준이 입암산성에 잠입하였다는 소문을 접한 관군 선봉장 이규태는 군사를 보내 입암산성을 수색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관군이 접한 소식은 전봉준 일행이 어젯밤 이춘선과 함께 하룻밤을 지낸 후 백양사 쪽으로 떠났는데 비무장 상태라는 것이었다. 관군이 다시 백양사 쪽으로 추격하자 이춘선은 백양사 청류암에 머물고 있던 전봉준 일행에게 관군의 추격 사실을 자신의 아들 이경칠을 보내 긴급히 알렸다.
기별을 받은 전봉준 일행은 관군이 당도하기 직전인 1894년 12월 1일 이경칠의 길 안내를 받아 순창 방면으로 길을 떠났다. 전봉준을 눈앞에서 놓친 선봉장 이규태는 일본군 중대장 명의의 공문을 전라병사에게 보내어 이춘선을 불고지죄로 체포하도록 하였다. 이른바 별장 직책을 맡은 자가 적을 체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통보도 안 하였으며 오히려 전봉준과 기밀을 내통하였다는 혐의였다. 이에 전라병사는 별장 이춘선을 체포하여 일본군에 넘겼다. 이춘선의 아들 이경칠 또한 잡혀가 죽도록 매를 맞았다.
그 후 이춘선은 1896년 10월 11일 입암산성으로 잠입한 일본군의 총탄에 피살되었다. 전봉준이 부하들과 입암산성에 불쑥 찾아들었을 때 이춘선 역시 갈등이 있지 않았을까? ‘체포를 하면 고을 수령 관직과 많은 포상이 내려질 텐데’, ‘인근 입암면 천원역(川原驛)에 있는 일본군에게 밀고를 할까?’, ‘아니야! 나를 믿고 어려울 때 찾아온 친구를 위하여 내가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의리를 지켜야지’라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결국 이춘선은 친구와의 의리를 선택하였다.
[‘경천’을 조심하라. 밀고자 김경천의 선택과 최후]
전봉준은 1894년 12월 2일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이르러 김경천을 찾았다. 김경천은 전봉준을 맞이하여 주막으로 안내한 후 전라감영 군관을 지내다 은퇴한 한신현에게 밀고하였다. 이에 한신현은 김영철, 정창욱 등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전봉준이 있는 주막을 포위하였다. 낌새를 차린 전봉준은 뒷담을 넘어 도망치려다가 다리에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김경천은 본래 전라도 고부군 덕천면 달천리[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달천리]에서 태어나, 전봉준의 부하로 있다가 동학농민군이 크게 패하자 대열에서 이탈하여 피노리로 피신하여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전봉준을 잡아 바치는 자는 후한 상금은 물론 원하는 지역의 군수 자리를 주겠다고 공포한 터라 포상에 눈이 먼 김경천은 전봉준을 맞이하여 안심시켜 놓고 그만 밀고를 한 것이다.
결국 1894년 12월 2일 전봉준은 믿었던 옛 동지의 배신으로 붙잡히고 말았다. 체포된 전봉준은 관군에 넘겨져 순창을 거쳐 담양에서 2박 3일 동안 동헌(東軒)에서 심문을 받고 일본군에 인계되어 나주와 전주를 거쳐 12월 18일 서울에 압송되었다.
전하는 말로는 전봉준이 일찍이 점을 쳤는데 “장래 백만 대중의 우두머리가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나 경천(京川)을 조심하라”라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공주 우금치 패전 이후 남하할 때 충청도에 있는 경천(京川)이라는 시냇가를 넘으며 안심하였는데, 사람 김경천을 말하는 것인지를 몰랐다고 한다. 전봉준을 체포한 이들은 푸짐한 보상을 받았다. 한신현은 김천군수(金川郡守)에 제수되고 상금 1,000냥을 받았다. 정창욱은 200냥, 마을 사람 9명에게는 100냥, 그리고 피노리 빈민들에게 200냥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밀고한 김경천은 군수 자리는커녕 서당을 전전하는 등 이리저리 떠돌다가 결국은 정읍시 이평면에서 굶어 죽었다고 전한다.
[김개남과 임병찬의 잘못된 만남]
김개남과 임병찬은 우리 역사책 속에 모두 애국지사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김개남과 임병찬은 모두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비장한 최후를 맞았다. 똑같이 나라를 사랑하는 삶의 길을 걸었으나 그 방법은 달랐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김개남(金開南)의 원래 이름은 김영주(金永幬)이며, 1853년 9월 15일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서 김대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개남’이라는 이름은 김개남이 훗날 동학에 입교하여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고 남녘 세상을 새롭게 열겠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한편 임병찬은 1851년 2월 5일 옥구군 서면 상평리[지금의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에서 임용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돈헌(遯軒)이며, 1906년 면암 최익현과 함께 정읍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제에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임병찬은 일제의 국권 강탈 이후 고종의 밀서를 받고 전국적 규모의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의병 전쟁을 일으키려다 일제에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거문도로 유배되어 순국하였다.
그러나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김개남과 임병찬은 집안 대대로 씻을 수 없는 악연을 맺게 된다. 1890년 낙안군수로 있던 임병찬이 은퇴하여 태인현 산외면 종송리[현 종성리]에서 학문에 전념하던 중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맞이하였다. 한편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태인은 이웃 금구의 원평과 아울러 호남에서 동학이 가장 세를 떨친 곳이다. 또 태인은 김개남의 집안인 도강 김씨들이 많이 살고 있어 훗날 도강 김씨들이 동학의 중추적 인물로 등장한다.
집강소 통치 시기에 김개남은 남원에서 우도의 금산·무주·진안·용담·장수를 비롯하여 좌도를 호령하였고, 순천에 영호도회소를 설치하고 영남의 서남부 지방까지 세를 떨쳤다. 2차 삼례봉기가 일어나 공주로 진격하는 전봉준과 달리 김개남은 1894년 10월 청주로 진격하였다. 전봉준, 손화중과 아울러 동학의 3거두 중 최고 강경파였던 김개남은 북상 도중 전주에서 남원부사 이용헌과 고부군수 양필환을 체포하였는데 굴복하지 않고 반항하자 일거에 참수하여 버렸다. 이런 김개남의 명성은 양반 관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동시에 원한의 대상이 되었다.
김개남은 1894년 11월 10일 청주를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에 패하여 진감을 거쳐 태인으로 돌아와 태인 너듸[현 정읍시 산내면 장금리]에 있던 매부 서영기 집에 숨어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이때 이웃 종송리에 살고 있던 임병찬이 김종섭을 시켜 종송리에 있던 송두용 집으로 김개남을 유인하도록 지시하였다. 종송리는 회문산 자락에 위치하여 앞서 숨었던 너듸보다 험하고 높은 곳이니 더욱 안전한 곳으로 와 있으라는 김종섭의 설득에 김개남은 은거지를 종송리로 옮기게 되었다. 한편 임병찬은 김개남을 유인하여 놓고 김송현, 임병옥, 송도용을 시켜 전라도관찰사 이도재에게 고발하였다. 이에 이도재의 지시를 받은 황헌주가 군사 80명을 거느리고 종송리에 와서 12월 1일 새벽 김개남을 잡아갔다.
[김개남의 비장한 최후]
김개남이 잡혀 전주감영에 끌려갈 때, 백성들은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 군사 어디다 두고 짚둥우리에 묶여 가다니 그게 웬 말이냐”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전한다. 전라감사 이도재는 김개남을 전주로 압송한 뒤, 중도에 탈주할 우려가 있다는 구실로 김개남을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하였다. 당시의 광경을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梧下記聞)』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재는 마침내 난을 불러오게 될까 두려워 감히 묶어서 서울로 보내지 못하고 즉시 목을 베어 죽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냈는데 큰 동이에 가득하여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다투어 내장을 씹었고, 그의 고기를 나누어 제상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냈으며 그의 머리를 상자에 넣어서 대궐로 보냈다.”
당시 일본공사 이노우에는 1894년 12월 27일 조선 정부에 서한을 보내 “비도[동학농민군]의 처형은 신중을 기하여야 하며 체포된 비도들은 정토대[일본군]에 넘겨 처리토록 하라”라고 요구하였는데 전라관찰사 이도재는 김개남의 명성에 겁을 먹고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 도중 탈취 사건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전주에서 임의대로 잔인하게 처형한 것이다. 임병찬은 김개남을 밀고한 대가로 1895년 음력 1월 정부로부터 임실군수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포상에 눈이 멀어 밀고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황헌주를 대신 임실군수로 임명하였다.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임병찬은 1906년 6월 4일 최익현과 함께 현재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에 있는 정읍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임병찬은 1906년 6월 전라도 순창 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하다가 최익현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 2년 선고를 받고, 1906년 7월 9일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대마도에서 최익현은 단식항쟁으로 순절하였고, 임병찬은 이듬해 1907년 1월 유배가 해제되어 귀국하였다. 임병찬은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국권이 강탈당하자 재차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하던 중 1912년 고종으로부터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북도순무대장(全羅南北道巡撫大將)으로 임명한다는 밀명을 받고 전국적인 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대규모 의병 전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다 일제에 붙잡혀 거문도에 유배되어 1916년 음력 5월 23일 유배지에서 66세로 생을 마쳤다.
이렇게 일제에 항거하다 삶을 마친 임병찬이 아이러니하게도 일제와 싸웠던 김개남을 밀고하여 일제를 돕는 결과를 낳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임병찬은 왜 김개남과의 신의를 저버리고 밀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각오로 밀고라는 선택을 하였을까? 임병찬이 포상이 탐이 나서 김개남을 밀고한 것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임병찬은 선비로서 최고의 가치 덕목인 충과 효를 위하여 살다 간 사람이다. 당시 대부분의 조선 유학자들의 인식처럼 임병찬도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 아닌 국왕이라 생각하였다. 임병찬의 충성은 나라의 주인인 국왕에 대한 충성이지 오늘날처럼 국민을 위한 충성은 아니었다. 당시 유학자들은 국왕이 아무리 잘못하여도 잘못을 바로잡고자 일어난 백성들의 항거를 모두 ‘난(亂)’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동학농민군 지도자 김개남을 밀고한 것은 나라의 주인인 국왕과 국모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킨 역적을 타도하겠다는 충을 위한 신념에서였을 것이다. 1895년 일제에 의하여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유림들이 충을 위하여 의병을 일으킨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이것이 당시 유학자들이 지닌 의식의 한계였다. 지금까지도 임병찬의 집안과 김개남의 집안은 대를 이어 원수지간으로 지내고 있다. 매우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 저승에서 임병찬과 김개남은 과연 서로 만났을까? 만약 만났더라면 어떤 대화를 하였을까? 참으로 얄궂은 두 사람의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