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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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산로 2951[태창리 102-2]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훈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3년 1월 21일 - 정읍 피향정에서 연꽃 향기 묻어난 제영시를 읽다 정읍 피향정 보물 제289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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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정읍 피향정에서 연꽃 향기 묻어난 제영시를 읽다 정읍 피향정 보물로 변경 지정 |
소재지 | 정읍 피향정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산로 2951[태창리 102-2]![]()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에 있는 호남 제일의 정자 피향정과 누정제영.
[개설]
정읍(井邑) 피향정(披香亭)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102-2에 있는 정자이다. 최치원(崔致遠)[857~?]이 세웠다는 설이 있다. 정읍 피향정의 앞뒤로 연꽃이 가득 핀 상연지(上蓮池)와 하연지(下蓮池)가 있어서 ‘피향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태인에 부임한 현감들이 여러 차례 중건을 하였고, 손님을 접대하는 용도로 사용한 대표적인 관정(官亭)이다. 규모는 정면 5칸, 옆면 4칸이며,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28개의 돌기둥을 주초로 삼아서 2층 구조의 누각을 지었다. 앞에는 ‘披香亭(피향정)’이라 쓴 현판이 있고, 뒤쪽으로 ‘湖南第一亭(호남제일정)’이라고 쓴 현판이 있다. 이외에도 조두순(趙斗淳)[1796~1870]의 「피향정기(披香亭記)」, 이승경(李承敬)의 「피향정중수기(披香亭重修記)」를 비롯하여 약 25개 정도의 현판이 있다. 정읍 피향정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8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보물로 변경되었다.
[주요 연혁]
신라 시대 최치원이 태산현(泰山縣)[현재의 정읍시 일대]에서 태수를 지내는 동안 근처에 있는 연지(蓮池) 주변을 소요하며 풍월을 읊었다는 전설 때문에 최치원이 피향정을 지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광해군(光海君) 때 현감 이지굉(李志宏)이 전하여 내려오는 초라한 건물을 확장하여 중건하였다고 한다. 이후 현종(顯宗) 대에는 현감 박숭고(朴崇古)[1676~1733]가 초라한 건물을 크게 증축하였고, 다시 51년이 지난 후 1715년(숙종 41) 현감 유근(柳近)이 중수를 하면서 못을 파서 넓혔다. 전라감사와 호조에 교섭하여 정부의 보조로 재목을 변산(邊山)에서 베어다가 현재의 규모로 건물을 세웠다고 한다. 현감 이승경이 중수한 지 140년이 지나서 1855년(철종 6) 들보만 남아 있던 퇴폐한 피향정을 새롭게 중수하였다. 이때 지은 건물이 현재까지 전하여지고 있다.
6·25전쟁 후에는 약 4년간 태인면사무소로 사용되다가 1957년부터 면사무소를 신축하면서 원상으로 환원되었다. 1966년에는 기단과 기와를 보수하고 단청도 새로 그렸다. 1972년 연못 석축 공사, 1974년에는 부재 일부와 단청 공사를 하였다. 1977년에는 피향정과 주변이 도시 자연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1988년에는 연못 내 물의 유입과 출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취수문과 배수구를 설치하였다. 또한 연못의 정화를 위하여 바닥을 준설하였다. 1990년대 들어와 피향정 앞 도로를 확포장하면서 비석들을 이전 정리하였다. 1992년에는 담장을 투시형으로 바꾸고, 배수로 30m를 설치하였다. 1999년에는 태풍 올가로 인하여 기와가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2001년 피향정 실측 조사를 실시한 후 2003년 대대적으로 해체하여 보수하였다. 2018년에는 문화유산 3D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을 실시하였다.
[누정으로서 피향정의 기능]
정읍 피향정은 전주의 한벽당(寒碧堂), 남원의 광한루(廣寒樓), 순창의 귀래정(歸來亭), 옥구의 자천대(紫泉臺)와 더불어 호남의 5대 누정으로 알려져 있다. 남원의 광한루가 ‘호남제일루’라면 정읍 피향정은 ‘호남제일정’이라고 한다.
누정은 위치도, 주인도, 모양도 다른 만큼 쓰임새가 다양하다. 누정의 기능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주위 자연 경관을 즐기며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공간에 누정을 배치하여 자연을 완상하며 세속의 때를 벗고 마음을 순화하였다. 둘째, 선비들의 풍류와 친교의 공간이다. 경치 좋은 곳에서 만난 선비들이 술 한잔하며 시도 짓고, 창도 하고, 문학과 정치를 논하는 공간이다. 셋째, 학문과 교육의 공간이다. 대부분 정자를 세울 만한 가문에서는 인재를 양성하고, 후손들을 교육시키는 공간으로 정자를 활용하였다. 넷째, 정자는 종중 모임이 열리는 장소였다. 선조를 선양하고 추모 정신을 잇고자 하는 공간으로서 정자는 상징성을 지닌다. 이러한 활동을 하는 모든 순간의 기록을 담고 있는 것이 누정 문화, 누정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현감이 짓고 관리를 하였던 피향정은 관정으로서 기능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연못 가운데에 있어 연꽃이 피지 않아도 경치가 좋았지만 연꽃까지 피면 더 화려하였을 것이다. 경치가 좋은 피향정이 태인현 관아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손님을 맞이하여 접대하고 전송하는 데 편리하였다. 둘째, 손님 접대를 하다가 늦게까지 술자리가 이어진 경우 그 자리에서 잠을 잘 수 있는 숙박의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셋째, 고인을 회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누정은 대표적인 선비들의 친교 공간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주변 경치를 즐기고,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함께 즐겼던 장소이다. 선비들이 지은 수많은 수창시들은 문집에 남았거나 혹은 현판으로 남아 피향정에 걸렸다. 후손 혹은 후대 사람들은 현판에 걸린 시나 문집에 있었던 시를 보고 고인을 회고하며 차운을 하여 시를 짓는다. 누정이 일단 지어지면 누정이 존재하는 한, 혹은 누정이 사라지더라도 끊임없이 사람들의 인식에 반복되어 언급되기 때문에 적층 문학이라고도 한다.
[피향정에 걸린 현판들]
정읍 피향정에는 신라 헌강왕(憲康王) 대부터나 혹은 조선 광해군 대 이후에도 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시문을 지었다. 그중 20편이 넘는 시문들이 판에 새겨져 피향정 안에 걸려 있다.
1. 전면에 1799년 4월 조항진(趙恒鎭)[1738~1803]이 쓴 ‘피향정(披香亭)’ 편액이 있다. 후면에는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 편액이 있다. 내부에 조항진의 「축사(祝詞)」가 있다.
2. 1855년 10월 조두순의 「피향정기」가 있다. 1715년 5월 유근의 「피향정중수시서(披香亭重修詩序)」와 시가 있다.
3. 1855년 이승경의 「피향정중수기」가 있다.
4. 1832년 가을 심능숙(沈能淑)[1782~1840]의 「피향정기」가 있다.
5. 1832년 가을 심능숙의 시 2수가 있다.
6. 1620년 6월 벽사찰방(碧沙察訪) 홍천경(洪千璟)[1553~1632]의 「경차벽상순찰사유공운(敬次壁上巡察使柳公韻)」이 있다.
7. 의석(義石) 이규재(李圭宰)[1851~?]의 시가 있다.
8. 1571년 3월 유영순(柳永詢)[1552~1630]의 「근차(謹次)」가 있다.
9. 1867년 2월 지현(知縣) 서상옥(徐相鈺)의 「염판상운(拈板上韻)」이 있다.
10. 1687년 6월 도사(都事) 조의징(趙儀徵)[1649~?]의 「경차벽상가대인반자운(敬次壁上家大人班字韻)」이 있다.
11. 안사(按使) 이호준(李鎬俊)[1821~1901]의 시가 있다.
12. 1882년 5월 도순찰사(都巡察使) 이병문(李秉文)[1826~1888]의 「경차서하선조판상운(敬次西河先祖板上韻)」이 있다.
13. 1878년 7월 조병식(趙秉式)[1832~1907]의 시 2수가 있다.
14. 1620년 6월 순찰사 유색(柳穡)[1561~1621]의 「차판상운(次板上韻)」이 있다.
15. 1868년 김성근(金聲根)[1835~1919]의 「경차조고판상운(敬次祖考板上韻)」이 있다.
16. 병술년 이준익(李俊翼)의 시가 있다.
17. 1795년 4월에 순찰사가 도회시(都會試)를 시행하였을 때 고시관으로 참여한 홍경후(洪景厚), 임희묵(任希黙), 이제만(李濟萬), 조항진, 남이범(南履範), 임한호(林漢浩)가 참여하여 지은 「피향연구(披香聯句)」가 있다.
18. 1744년 6월 태인현감 유유(柳愈)[1685~1760]의 「읍차선고벽상운(泣次先考壁上韻)」이 있다.
19. 1601년 8월 김수일(金壽一)의 창작 배경 설명이 있다.
20. 1882년 2월 이정직(李定稙)의 「피향정중수시 병소서(披香亭重修詩 竝小序)」가 있다.
[피향정 제영시]
누정에서 서로 친교를 나누고 풍류를 즐기면서 남겨 놓은 대표적인 문학 작품이 누정제영(樓亭題詠)이다. 누정제영은 일반적으로 누정에서 지은 한시(漢詩)를 말한다. 경관이 빼어나고 오래된 누정에는 많은 시문이 전하여진다.
「과태인 잠게피향정(過泰仁暫憇披香亭)」[태인을 지나며 잠시 피향정에서 쉬다]
천애축객태정강(天涯逐客稅征韁)[변방으로 쫓겨난 객이 가는 길을 빌어]
일상명정종목장(一上名亭縱目長)[유명한 피향정에 올라 눈을 크게 떠 보네]
경우취균편송색(經雨翠筠偏送色)[한 차례 소나기에 대나무 빛 더하고]
수풍홍우불승향(受風紅藕不勝香)[바람 맞은 붉은 연꽃은 향을 이기지 못하네]
층난고동기추기(層欄高棟已秋氣)[층층난간 높은 누대에는 이미 가을 기운 들고]
원수평무욕석양(遠水平蕪欲夕陽)[멀리 수평선에는 해가 지려 하네]
고영경감기포극(孤詠更堪羈抱劇)[홀로 시 읊으며 나그네의 외로움 견디는데]
채운초대격사방(彩雲迢遞隔西方)[채색 구름은 멀리 서쪽에서 갈마드네]
「과태인 잠게피향정」을 지은 오도일(吳道一)[1645~1703]의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관지(貫之), 호는 서파(西坡)이다. 오도일은 1702년 여름에 민언량(閔彦良)의 옥사에 연루되어 전라남도 장성에 유배되었다. 한양에서 유배지인 장성으로 가는 길에 있던 정읍에 들렀을 때 태인 피향정에서 잠시 쉬면서 시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증태인수박숭고(贈泰仁守朴崇古)」[태인 사또 박숭고에게 주다]
원량고운홍후선(元亮孤雲共後先)[원량과 고운이 모두 앞뒤로 나오니]
시산종고저명현(詩山從古著名賢)[시산은 예로부터 명현으로 이름났지]
추연백로응의구(秋蓮白露應依舊)[가을 연꽃 흰 이슬은 옛 그대로인데]
가구하인계석천(佳句何人繼石川)[누가 멋진 시구로 석천의 뒤를 이을까]
「증태인수박숭고」를 지은 김수항(金壽恒)[1629~1689]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이다. ‘원량’은 태인목사였던 신잠(申潛)[1491~1554]의 자이며, ‘고운’은 최치원의 호이다. ‘시산’은 태인을 가리킨다. 박숭고는 현종 대 인물이며, 피향정을 확장 중건한 사람이다. 김수항은 신잠과 최치원처럼 훌륭한 문인이 되기를 바라며 박숭고에게 시를 지어 주었을 것이다.
「과태인피향정(過泰仁披香亭)」[태인의 피향정을 지나면서]
원량신매지(元亮新埋地)[원량이 새로 매립하였는데]
고운구상천(孤雲舊上天)[고운은 옛날에 하늘에 올랐다]
공여지수재(空餘池水在)[다만 못 물만 남아 있어]
백로적추연(白露滴秋蓮)[흰 이슬은 가을 연꽃에 떨어진다]
임억령(林億齡)[1496~1568]이 피향정을 지나면서 쓴 시이다. 임억령의 자는 대수(大壽)이며, 호는 석천(石川),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시에 등장하는 ‘원량’은 태인목사 신잠의 자이다. 1543년 태인현감에 임명된 신잠은 온갖 정성을 다하여 고을의 예의를 일으키고 풍속을 고치며 학교에서 인재를 기르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태인 고을 사람들이 신잠의 유임(留任)을 탄원하여 1543년부터 1549년까지 6년 동안 태인현감으로 있었다.
「피향정용석천운(披香亭用石川韻)」[피향정에서 석천의 시운을 쓰다]
객도관정숙(客到官亭宿)[관정에 나그네 되어 묵으니]
소조팔월천(蕭條八月天)[팔월의 하늘은 쓸쓸하여라]
추음오경흑(秋陰五更黑)[구름 낀 가을 하늘은 오경인데도 어둡고]
양우패지연(涼雨敗池蓮)[차가운 비에 연꽃은 다 시들었네]
피향정에 들러 잠을 자던 양경우(梁慶遇)[1568~?]가 석천 임억령의 시문을 보고 차운하여 지은 시다. 양경우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자는 자점(子漸), 호는 제호(霽湖), 점역재(點易齋), 요정(蓼汀), 태암(泰巖)이다. 1616년(광해군 8) 병진중시문과(丙辰重試文科)에 병과 4등으로 뽑히고 장성현감(長城縣監)을 지냈다.
「태인피향정운(泰仁披香亭韻)」[태인의 피향정 시에 차운하다]
동읍풍성기석년(桐邑風聲已昔年)[동읍의 명성은 이미 옛날 일인데]
무성연양우여현(武城連壤又餘絃)[무성에 이어진 땅에 또 현가 소리 남아 있어]
난망노회요장공(難忘老檜腰將拱)[못 잊을 늙은 전나무는 허리가 아름이 되려는데]
문설신하장허원(聞說新荷掌許圓)[듣자니 새 연잎은 손바닥만큼 둥글게 자랐다네]
(南國書來雲似嶂)[남국에서 편지 오고 구름은 높은 산 같은데]
(曲塘春盡水如煙)[굽은 연못에 봄 다 가고 물은 안개 같으리]
(小亭遙隔趍庭夢)[작은 정자에서 추정하려는 꿈은 멀리 막혔는데]
(白雁銜詩到日邊)[흰 기러기가 시를 물고 서울에 이르렀네]
한장석(韓章錫)[1832~1894]이 태인의 피향정에 올라서 아버지와 얽힌 옛이야기를 회고하며 지은 시이다. 한장석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치수(穉綏), 치유(穉由), 호는 미산(眉山), 경향(經香)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한필교(韓弼敎)[1807~1878]의 아들이다. 「태인피향정운」에는 시를 지은 연유를 써서 붙여 두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인은 한장석의 할아버지가 옛날에 부임하였던 읍이다. 1856년 한필교가 외직으로 나가서 장성부(長城府)로 부임하였는데, 장성부와 태인은 인접한 지역이었다. 한필교는 피향정에 올라가 옛일에 감개하면서 시를 지어 정자 위에 편액으로 만들어 걸고 아들 한장석에게 시를 부쳐서 보여 주었다. 한장석은 당시 서울 집에 있어서 아버지를 모시고 유람할 수 없었기에 삼가 차운하여 시를 올렸다고 한다.
호죽애사오야최(豪竹哀絲五夜崔)[관현의 구슬픈 소리 오경을 재촉하니]
추래경기입최외(秋來勁氣入崔嵬)[가을의 굳센 기운 더욱 높아라]
홍미효월천화욕(紅迷曉月千花浴)[새벽달의 붉은 기운 천 송이 꽃 목욕하고]
취적한담양경개(翠積寒潭兩鏡開)[차가운 못에 푸른 기운 명경처럼 맑구나]
남국가전장진주(南國歌傳長進酒)[남국에는 장진주사 노래로 전하고]
동산선거영유대(東山仙去永留臺)[동산에 신선은 가도 영유대는 남아 있네]
누지천상릉운객(誰知天上凌雲客)[뉘 아랴 하늘 위의 구름 속 손님을]
유향가인위일배(猶向佳人慰一杯)[오히려 가인 향해 한잔 술 권할 줄을]
임진추심능숙(壬辰秋沈能淑)[임진 가을에 심능숙 지음]
심능숙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자는 영수(英叟), 호는 소남(小楠)이다. 해동악부체(海東樂府體)를 확립시킨 심광세(沈光世)[1577~1624]의 7세손이며, 아버지는 고부군수를 지낸 심윤지(沈允之)이다. 심능숙은 1832년부터 1835년까지 태인현감을 지냈다. 1832년 가을에 피향정에 올라 관리로서의 마음가짐과 감회를 남겼다.
「동숙피향당운(同宿披香堂韻)」[함께 피향당에서 자며]
호해표령견고인(湖海飄零見故人)[호남을 떠돌다 만난 옛 친구]
일당환소총천진(一堂歡笑摠天眞)[피향당 안 가득 웃음소리 마냥 천진하여라]
준중불용여민주(樽中不用如澠酒)[민수(澠水)와 같은 술이 뭐 필요할까]
청좌상간자도신(淸坐相看自到晨)[맑은 자리에 앉아 마주보며 새벽을 맞네]
「동숙피향당운」을 지은 장유(張維)[1587~1638]의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 묵소(默所)이다. 1629년 나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아마도 좌천되었다가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정읍에서 오랜만에 친한 친구들과 만나 피향정에서 술을 마시며 새벽까지 날을 새운 듯하다. 승구(承句)의 웃음소리와 새벽까지 마주 보며 술을 마시는 질탕함이 호방하게 느껴진다.
「피향정음(披香亭吟)」[피향정에서 짓다]
진흙에 피온 연꽃 님이 어찌 보시뎌뇨
혼자만 거니실제 무슨 말쌈 하시뎌뇨
저 달아 들름 잇거든 나만 알려 주시소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1890~1957]이 1925년 남도 순례를 나선 길에 피향정에서 지은 시조이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남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기행문을 집필하여 신문에 게재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1926년 발간한 기행문집이 『심춘순례(尋春巡禮)』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