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443
한자 靑年 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재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0년 6월 - 태인청년회 결성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0년 7월 - 정읍청년회 결성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0년 9월 13일 - 고부청년회 고부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자 방역대와 구호반 편성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6년 8월 - 태인청년회 유학생 환영 강연 개최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7년 2월 25일 - 태인청년회 부녀야학 개시
성격 사회운동
관련 인물/단체 고부청년회|태인청년회|정읍청년회|시산청년회|천도교청년회|소성청년회|덕안청년회|보천교청년단|호부청년회|오성청년회|입암청년회|산외청년회|신태인청년회

[정의]

일제 강점기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지역에서 청년 유지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청년 단체를 조직하고 전개한 사회운동.

[개설]

정읍 지역에서 1920년 초부터 1927년 사이 활동한 청년 단체는 고부청년회를 비롯하여 태인청년회, 정읍청년회, 시산청년회, 천도교청년회, 소성청년회, 덕안청년회, 보천교청년단, 호부청년회, 오성청년회, 입암청년회, 산외청년회, 신태인청년회 등 모두 11개가 있었다.

[역사적 배경]

일제 강점기 청년 운동3·1운동 이후부터 독자적인 이념과 조직을 갖추고 전개되었다. 즉, 3·1운동의 일정한 성과와 일제의 부분적인 후퇴, 회유책으로 인하여 대중 운동의 폭이 확대되면서 활성화하기 시작하였고, 사회주의 사상이 수용되면서 급속히 조직이 확대되었다. 청년회의 결성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가을부터 시작되었다. 1919년 9월 사이토[濟藤] 총독이 문화 정치를 표방하면서부터 소규모의 수양 단체나 교화에 관한 집회가 허용되었다. 이로부터 실력을 양성하고 집단적 훈련을 목적으로 한 청년 단체가 많이 결성되었다.

[경과]

정읍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청년 단체는 고부청년회이다. 은희순(殷熙淳), 은치재(殷致宰), 은언기(殷彦基)가 총회에서 회장과 부회장, 총무에 각각 임명된 것으로 보아 지역의 행정을 좌우하였던 행주 은씨들의 친목 단체이자 동계(洞契)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1920년 9월 13일 고부에서 호열자[콜레라]가 발생하자, 고부청년회에서는 방역대와 구호반을 편성하고 방역과 환자 치료에 전력하였다. 한편, 일반에는 백미와 식료품을 지급하고, 사망자에게는 장례 준비를 주선하는 등 구호 활동에 앞장섰다.

1920년 6월 결성된 태인청년회 역시 회장 정방모(鄭邦謨), 부회장 송직상(宋直相), 총무 김진수(金鎭洙) 등 지역 유지들이 핵심 간부로 선출되었다. 정방모는 1913년 태인공립보통학교[현 태인초등학교] 부설 간이농업학교를 설립하고 교사로 근무하였던 태인 최초의 한국인 교사이며, 청년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워 준 선각자였다. 송직상은 1948년 태인중학교 설립에 막대한 재산을 헌납하였고, 태인 시회(詩會)를 이끌던 읍원정(挹遠亭) 건물의 중수기를 쓰는 등 유림으로서 상당한 지식을 갖춘 지식인이었다. 태인청년회에서는 1926년 8월 유학생 환영 강연을 개최하고, 모르핀 환자 박멸을 위한 박멸대를 조직하여 실행위원까지 선정하였다. 1927년 2월 25일부터는 부녀야학을 개최하였다.

정읍청년회는 기존의 청년구락부를 1920년 7월 청년회로 개명한 단체이다. 정읍의원장 차경삼(車敬三), 정읍면장과 도평의회원을 역임하였던 박홍규(朴興奎) 등이 회장과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정읍청년회 역시 지역 유지 모임의 성격이 짙었다. 정읍청년회의 활동 가운데 두드러지는 것은 노동야학이다. 노동야학은 3·1운동 이후인 1920년대가 전성기이며, 1930년대까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지속되었다. 정읍은 지역 청년들의 협조로 청년회관을 수리하고, 1922년 8월부터 야학을 실시하여 70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정읍 지역 청년회는 지역 유지들로 구성된 친목과 수양 단체의 성격이 강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부녀야학과 노동야학을 설치하는 등 계몽을 실천하기도 하였다.

산외청년회는 상당히 좌경화된 조직이었다.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은성천(殷成天)은 1927년 3월 사상 단체인 ‘신명회(新明會)’를 조직하고 정읍청년동맹 결성에 가장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산외청년회는 정읍 지역 내에서는 보기 드문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한 청년 단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정읍에서 청년 운동은 야학과 각종 계몽운동을 통하여 일제 강점기 농민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민족의 실력을 배양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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