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작쟁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442
한자 小作爭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재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5년 10월 1일 - 화호노동친목회 소작료 인하 운동 전개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7년 10월 - 신간회 화호지회 조사연구부장 김영선, 화호지장 소작쟁의 주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0년대 - 구마모토 농장 소작쟁의 발생
관련 인물/단체 김학규|태인노농회|김영선|화호노동친목회|김복수|구성일|신태인노동조합|신태인청년회|화호농맹위원회|신간회 화호지회|김영선

[정의]

일제 강점기 정읍에서 지주와 일제를 상대로 전개한 농민 운동.

[개설]

1920년 4월 서울에서 창립한 조선노동공제회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조직된 전국적 규모의 근대 노동단체이다. 조선노동공제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자 잡지인 『공제』와 『노동공제회보』를 발행하였다. 『공제』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가치, 노동의 신성성, 노동의 존엄성, 노동문제의 이론, 세계의 노동운동 및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을 가르쳐 주었다. 조선노동공제회 정읍지회는 1920년 8월 27일 백양사(白羊社) 포교당에서 발회식을 갖고 창립하였다. 당시 20여 개의 지회 가운데 가장 많은 1,500명이라는 회원 수를 확보하고 있었다. 조선노동공제회 정읍지회는 ‘소작인 운동’과 ‘소비조합 운동’을 전개하였고, 조선노동공제회 지회 중에서 가장 먼저 소작인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소작쟁의는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하였다.

[역사적 배경]

일제 강점기 소작료 결정 방법은 크게 타조법(打租法), 정조법(定租法), 집조법(執租法)으로 나눈다. 타조법은 풍년과 흉년에 따라 일정한 비율을 징수하는 방법이고, 정조법은 정액제였다. 집조법은 수확기에 지주와 소작인의 입회하에 수확량을 추산하여 소작료를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종자와 비료대는 소작인이 부담하였다. 소작료는 분배하면 대부분 반타작이었다. 타조법은 지세와 비료, 운반비는 소작인이 부담하였다. 이와 같이 소작료 외에 각종 지세 및 비료대금, 운반비까지 작인이 부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편 일본인 구마모토[熊本] 농장의 소작료는 주변 일본인 농장 중에서도 가장 높았다. 1935년 일본인 신문 『군산일보』조차 ‘다작하여 다취하는 주의’이지만 ‘다취가 심하다’고 지적할 정도였으며, 1937년 전라북도의 현직 일본인 소작관조차 ‘지주 본위의 시책’이라고 비난할 만큼 수탈적이었다. 특히 증산 목표치를 자의적으로 정한 후 농사도 짓기 전에 소작 계약을 체결하고 미리 소작료부터 올리는 악랄한 방식을 취하였다. 이에 소작인들이 소작료 인하 운동과 소작료 불납 동맹을 전개하였다.

[경과]

1925년 4월 10일 지주 민대식(閔大植)이 정읍군 태인면[현 정읍시 태인면 일대] 소작인들의 소작권을 박탈하자 김학규를 비롯한 소작인들이 사건을 태인노농회에 진정하였다. 이에 태인노농회는 경성노동총연맹과 제휴하여 지주에 대한 소작권 이동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음(舍音)[마름]이 중상을 입었으며, 소작인 일부는 경성[현 서울특별시]에 있는 지주와 직접 교섭하였다. 정읍경찰서는 소작인들과 사음이 서로 양보하고 원만한 해결을 하라고 촉구하였으며, 구소작인은 신소작인으로부터 소작지 일부를 반환받고 사음에게는 사과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 마무리되었다. 1925년 10월 1일 용북면 화호리[현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 화호노동친목회의 김복수(金福洙), 구성일(具成一) 등이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의 소작동우회와 제휴하여 정읍 지주 김금동 외 5인을 상대로 소작료 인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4월 신태인 화호[현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일본인 이민촌에서 소작쟁의가 있었고, 역시 화호에 있던 구마모토 농장에서도 1930년대에 소작쟁의가 4차례 발생하였다. 당시 구마모토 농장의 소유지는 정읍·김제·옥구·익산·부안 등 5개 군 26개 면에 걸쳐 있었다. 소유지 대부분이 1930년경부터 수리조합 사업에 수반한 구획 정리를 통하여 고생산력 지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구마모토가 소유한 개정본장, 지경지장, 대야지장, 화호지장 등 1본장 3지장은 군산항으로 가는 철도 교통의 요지에 있어, 일본으로 향하는 쌀 이출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구마모토 농장의 사업장이 많았음에도 유독 화호지장에서 대규모 소작쟁의가 장기간 지속된 이유는 신태인 지역에서 일찍부터 각종 사상 단체와 연결된 청년 단체와 노동 운동 단체가 활동하여 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신태인에서는 1924년 신태인노동조합이 활동하였고, 1927년에는 조선공산당과도 연계한 신태인청년회와 화호농맹위원회가 활동 중이었으며, 신태인청년회 등 단체의 주도로 신간회 화호지회가 설치되었다. 1927년 10월 신간회 화호지회 조사연구부장 김영선(金永先)은 ‘화호지장 소작쟁의’를 주도하였다. 정읍은 1920년대 중반까지 한국인 지주를 상대로 소작권 이동과 소작료 인하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20년대 후반부터는 일본인 농장을 배경으로 소작쟁의를 전개하는 것으로 양상이 바뀐다.

[결과]

정읍에서는 소작쟁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하였다. 일본인 지주들이 많아 총독부와 일제 경찰의 비호 속에 농민에 대한 삼엄한 경계와 탄압이 가하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읍에서 전개된 농민운동 대부분이 한국인 지주 관할 농장에서 발생하였다.

[의의와 평가]

소작쟁의는 농민의 생존을 위한 운동이자 일제 강점기에 행하여진 대표적인 항일 농민운동이다. 지주와 일제의 가혹한 수탈 체제에 저항하면서 소작인 단체 등 농민 조직과 연대하여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주로 높은 소작료의 인하나 소작권 이동에 대한 반대를 위한 운동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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