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4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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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少年 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재영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6년 9월 10일 - 태인샛별소년회 창립총회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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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소년 단체 |
관련 인물/단체 | 태인소년회|태인샛별소년회|산외소년회|정읍소년회|비호단소년부|보천교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지역에서 소년 단체가 전개한 운동.
[개설]
1920년대 정읍에는 태인소년회, 태인샛별소년회, 산외소년회, 정읍소년회, 비호단소년부가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1925년 공립학교 교장들은 “소년회에 가면 퇴학을 시킨다”, “어린이 잡지를 읽으면 벌을 세운다”고 할 정도로 당시는 소년 운동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가운데서도 소년회가 창립되어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은 활동의 적극성 여부를 떠나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경과]
정읍 지역에서는 1926년 9월 10일 태인읍 내에서 태인샛별소년회가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태인샛별소년회의 창립 회원은 30여 명이었다. 또한 운동의 침체를 벗어나기 위하여 1928년 정읍소년동맹을 창립하였으며, 1928년 8월 20일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여자 교육 문제를 의제로 선정하였다. 여자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1909년 차경석(車京石)이 창시한 보천교에서도 소년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보천교가 비정규 학교이지만 야학을 설립하려는 등 계몽주의로 전환하게 된 것은 교단 내 혁신파로 알려진 이상호(李祥昊)와 이상호의 동생 이성영(李成英) 그리고 주익(朱翼), 고용환(高龍煥), 이득년(李得年) 등 신교육을 받은 청년들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기관지 『보광(普光)』이 이상호 등에 의하여 창간되었고, 당시 일간지인 『시대일보』 인수 역시 이상호 등에 의하여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보천교에서는 지방에 유치원을 세우고 소년군(少年軍)을 조직하는 사업을 계속 추진하였다.
우리나라 소년단 운동의 효시는 국외까지 포함하면 1918년 하와이에서 이승만이 조직한 ‘한인 보이스카우트’로 보지만, 국내 신문지상에 소년단 운동이 게재된 것은 1920년 8월의 일이었다. 『조선일보』 1920년 8월 25일 자에 소개된 ‘개성 시내 소년단의 용맹한 활동, 군대 행진하는 모양으로 전진하다 체포’라는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기록상으로는 이미 1920년부터 소년단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지도자가 확실한 전국적인 조직의 소년단 운동이라는 단서는 아직까지 없다. 다만 자생된 소년단 운동의 서막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1923년 보천교에서 조직한 소년군은 국내에서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해당된다. 그런 면에서 보천교 소년군의 조직과 활동은 의의가 있으나, 구체적인 교육 내용이나 활동은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