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4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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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陶窯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
집필자 | 곽장근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지역에 있는 질그릇이나 사기 그릇 또는 기와 따위를 굽는 가마터.
[개설]
요지(窯址)는 가마를 이용하여 토기·기와·철·숯·도기·옹기·자기 등을 생산하였던 유적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도요지(陶窯址)로, 토기·도기·자기를 생산하였던 유적으로 한정할 수 있다. 우리나라 도자 문화의 중심지는 줄포만이다. 고창 반암리 벽돌 가마에서 시작된 초기 청자가 고창 용계리를 거쳐 부안 진서리·유천리에서 화려하게 꽃피었다. 부안 청자는 강진 청자와 함께 우리나라 청자 문화의 극치이다. 그런데 1350년부터 서해안에 왜구의 침입과 피해로 줄포만에서 부안 청자를 일군 최고의 도공들이 안전한 전북특별자치도 동부 내륙으로 이동한다. 당시 한 무리의 도공 집단이 부안 유천리를 출발하여 정읍시 동부 일대로 이동하여 정읍 도자 문화의 서막을 열었다.
[왜구의 출몰과 도공 집단의 이동]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골은 14세기부터 18세기까지 청자, 분청사기, 백자를 생산하던 곳이다. 몇 차례의 지표 조사를 통하여 3개소의 가마가 확인되었다.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에 만든 청자는 대접과 접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문양은 무문과 상감선문이다. 15세기 분청사기는 대접과 접시가 주요 기종이며, 문양은 무문과 인화국화문이다.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생산된 백자는 대접과 접시로 문양이 없는 무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정읍시 옹동면 비봉리에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청자와 분청사기를 굽던 4개소의 가마가 있다. 국립전주박물관 주관 지표 조사를 통하여 유적의 존재와 역사성이 학계에 보고되었다. 청자와 분청사기는 대접·접시·합·항아리·병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양은 무문, 상감운학문·당초문·연당초문·운학문·어문·동심원문·포류수금문, 인화여의두문·국화문·육원문·삼원문·파상문, 조화연판문·당초문, 퇴화문, 귀얄문 등으로 다양하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기록이 나올 정도로 역사성이 있다.
정읍시 옹동면 상산리 사우정골은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300년 동안 백자를 생산하던 요지이다. 가마는 묘지 조성과 농로를 개설하는 과정에 훼손되었다. 백자는 대접과 접시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양은 무문이다. 굽은 투박한 다리굽과 작은 다리굽이 혼재되어 있다. 포개어 소성한 형식과 지저분한 흙 받침과 굵고 가는 규사 받침 등이 확인된다. 사우정골 일대에서 분청사기편이 발견되어, 분청사기 가마가 있을 개연성도 높다.
[정읍 도자 문화 발전와 가교 역할]
남원시와 순창군, 임실군, 진안군 등 전북특별자치도 동부는 고려 말부터 도자 문화의 중심지로 급부상한다. 임진왜란 때 이삼평, 심당길 등 당시 국보급 도공들이 남원부에서 포로로 잡혀가 일본 도자 문화의 서막을 열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부안 유천리를 출발하여 도공 집단 중 일부가 전북특별자치도 동부로 이동하는 과정에 옹동면 등 정읍시 동부에 정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말부터 조선 시대 정읍시 동부에서 화려하게 꽃피운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 정읍의 도자 문화는 전북특별자치도의 서부와 동부를 이어 주던 가교 역할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