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519
한자 鰲峯 金齊閔 墓碑
영어공식명칭 Tombstone of Kim Je-mi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우덕리 700-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27년 - 김제민 줄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599년 - 김제민 사망
건립 시기/일시 1653년연표보기 - 오봉 김제민 묘비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2020년 6월 5일연표보기 - 오봉 김제민 묘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67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오봉 김제민 묘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변경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4년 1월 18일 - 오봉 김제민 묘비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로 변경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4년 5월 17일 - 오봉 김제민 묘비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변경
현 소재지 오봉 김제민 묘비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우덕리 700-1 지도보기
성격 묘비
관련 인물 김제민
재질 화강암|대리석
크기(높이, 너비, 두께) 109㎝[높이]|73㎝[폭]|12㎝[두께]
소유자 의성 김씨 문중
관리자 의성 김씨 문중
문화재 지정 번호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우덕리에 있는 김제민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조선 후기의 비석.

[개설]

오봉 김제민 묘비(鰲峯 金齊閔 墓碑)임진왜란 때에 활동한 김제민(金齊閔)[1527~1599]을 추모하기 위하여 1653년 세운 비석이다. 2020년 6월 5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6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변경되었다. 2024년 1월 18일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바뀌었다.

[건립 경위]

오봉 김제민 묘비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김제민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위치]

오봉 김제민 묘비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우덕리 700-1번지에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천곡사지로 289[우덕리 628-1]에 있는 재실 왼쪽에 김제민 신도비가 있으며,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가면 묘역 가장 위쪽에 오봉 김제민 묘비가 있다.

[형태]

오봉 김제민 묘비는 화강암의 기단 위에 비신을 올렸다. 이수(螭首) 부분 앞쪽에는 쌍용을 조각하였으며, 쌍용 주변으로 구름과 바람 문양을 규칙적으로 조각하여 예술적 감각을 더하고 있다. 뒤쪽에는 토끼가 달 속에서 계수나무 아래서 방아를 찧는 모습이다. 비석은 여산에서 생산되는 백대리석을 잘 다듬어 조각을 하였다. 비신은 높이 109㎝, 폭 73㎝, 두께 12㎝이다.

[금석문]

오봉 김제민 묘비 비문에는 김제민일재(一齋) 이항(李恒)[1499~1576]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전라도사와 이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으로 활동하여 큰 공적을 세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전란 후에는 적을 막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42조의 보방요무(保邦要務)를 저술한 내용도 담겨 있다. 비문은 윤순거(尹舜擧)[1596~1668]가 글을 짓고, 증손 김우기가 묘비를 세웠다.

[현황]

오봉 김제민 묘비 주변으로는 의성 김씨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아래쪽에 재실인 만종재(萬宗齋)가 있다. 만종재는 의성 김씨 세장산(世葬山)에 지어진 사당으로, 정면 5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다. 제실의 상량문에 ‘숭정후이백칠십삼년경자이월십칠일(崇禎後二百七十三年更子二月十七 日)’이라 쓰여 있다. 숭정 원년, 즉 1628년으로부터 273년이니까 1901년 건립된 것이다. 제실 서쪽 비각에는 2기의 비가 있다. 첫 번째 비는 1908년 김제민의 10대손 김원재(金源載)와 9대손 김진천(金鎭天)이 세웠다고 되어 있다. 귀부(龜趺)로 된 두 번째 비는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이 찬(撰)한 비문이 포함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오봉 김제민 묘비는 비석 형태와 이수 조각은 조선 시대 묘비 양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비문은 당대의 대학자 윤순거가 글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서예사적 가치가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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