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526
한자 披香亭 碑石群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비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산로 2951[태창리 102-2]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16년 - 현감 이후성징 청백선정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22년 - 순찰사 이공서구 영세불망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37년 - ○[순]찰사 김공흥근 영세불망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45년 - 순찰사 서공기순 청백선정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49년 - ○○[현감]신후석관 청덕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57년 - 관찰사 김공병교 영세불망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62년 - 어사 이공후선 영세불망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63년 - 어사 이공후선 구폐불망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64년 - 어사 성공이호 거사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78년 - 현감 민후관호 청덕선정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92년 - 관찰사 민공정식 청백영세불망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93년 - 현감 조후규순 영세불망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910년 - 군수 홍후범식 애민선정비 건립
이전 시기/일시 1970년대 - 피향정 비석군 현위치로 이건
현 소재지 피향정 비석군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산로 2951[태창리 102-2]지도보기
성격 비석
관련 인물 이서구|홍범식|이성징|민병교|서기순|홍계적|송지렴|김수일|나염|민정식|성이호|정이원|이후선|김이회|민관호|신석관|김흥근|조규순
재질 화강암 등
크기(높이, 너비, 두께) 높이 151㎝, 폭 53㎝, 두께 22㎝[군수 홍후범식 애민선정비]|높이 64㎝, 폭 57㎝, 두께 20㎝[순찰사 이공서구 영세불망비]|높이 147㎝, 폭 52㎝, 두께 21㎝[관찰사 김공병교 영세불망비]|높이 152㎝, 폭 54㎝, 두께 18㎝[순찰사 서공기순 청백선정비]|높이 158㎝, 폭 50㎝, 두께 17㎝[현감 홍후계적 영세불망비]|높이 173㎝, 폭 73㎝, 두께 18㎝[현감 송후지렴 청백선정비]|높이 124㎝, 폭 73㎝, 두께 18㎝[○○○후수일 청덕강명 휼민선정비]|높이 116㎝, 폭 59㎝, 두께 18㎝[현감 나염 휼민선정비]|높이 130㎝, 폭 43㎝, 두께 22㎝[관찰사 민공정식 청백영세불망비]|높이 118㎝, 폭 42㎝, 두께 19㎝[어사 성공이호 거사비]|높이 126㎝, 폭 40㎝, 두께 14㎝[현감 정후이원 영세불망비]|높이 110㎝, 폭 49㎝, 두께 18㎝[어사 이공후선 구폐불망비]|높이 93㎝, 두께 16㎝[현감 김후이회 영세불망비]|높이 110㎝, 폭 49㎝, 두께 18㎝[어사 이공후선 영세불망비]|높이 109㎝, 폭 41㎝, 두께 14㎝[현감 민후관호 청덕선정비]|높이 111㎝, 폭 52㎝, 두께 17㎝[○○[현감]신후석관 청덕비]|높이 115㎝, 폭 54㎝, 두께 18㎝[○[순]찰사 김공흥근 영세불망비]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피향정 경내에 있는 비석군.

[개설]

피향정 비석군(披香亭 碑石群)정읍 피향정(披香亭) 경내에 있는 총 21기의 비석이다. 본래 정읍 피향정 내부에는 순찰사 이서구(李書九)와 태인군수를 지낸 홍범식(洪範植)의 비석이 있었다. 태인면 유적보존회 전 회장 여운용은 “피향정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고비군들은 모두 태인 지역 전역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70년대 초반 피향정으로 옮겨 배열한 것으로, 일부는 땅에서 파내고, 일부는 버려진 것들을 새롭게 재정비하였다.”고 증언하였다.

피향정 비석군 가운데는 과거 태인현감이나 태인군수를 지냈던 인물들 이외에도 전라도 일대를 순행하던 순찰사와 암행어사를 기리는 공적비도 있다. 그동안 ③과 ④는 별개의 비석으로 알려졌으나 하나의 비석이다. 이중 3기는 파손이 심한 상태이다.

[건립 경위]

① 군수 홍후범식 애민선정비(郡守 洪侯範植 愛民善政碑)는 1910년 세워졌다. 뒷면에 흥학선치(興學善治) 향인입비송덕(鄕人立碑頌德)라 한 것으로 보아 학문을 진흥시킨 것과 관련 있는 듯하다. 홍범식은 1907년(순종 1) 7월 11일 태인군수에 임명되었으며, 1909년(순종 3) 4월 27일 금산군수로 이직하였다.

② 순찰사 이공서구 영세불망비(巡察使 李公書九 永世不忘碑)는 1822년(순조 22) 세워졌다. 이서구(李書九)[1754~1825]는 1793년(정조 17)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 1795년 4월 떠났다. 전라도 여러 곳에 이서구의 선정비가 있다.

③·④ 현감 이후성징 청백선정비(縣監 李侯星徵 淸白善政碑)는 1716년 세워졌다, 이성징(李星徵)[1608~?]은 본관이 연안, 자는 길응(吉應)이다. 1644년(인조 22) 2월 태인현감으로 부임하여 1646년 7월 퇴임하였다. 1662년(현종 3) 실시된 임인증광시 병과 21위[31/41]로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감사를 역임하였다.

⑤ 병사 민○○비의 건립 연대는 미상이다. 김병교는 1856년(철종 7) 부임하여 1857년 전임하였다.

⑥ 관찰사 김공병교 영세불망비(觀察使 金公炳喬 永世不忘碑)는 1857년 세워졌다.

⑦ 순찰사 서공기순 청백선정비(巡察使 徐公箕淳 淸白善政碑)는 1845년 세워졌다.

⑧ 현감 홍후계적 영세불망비(縣監 洪侯啓迪 永世不忘碑)의 건립 연대는 미상이다. 홍계적(洪啓迪)은 1716년(숙종 42) 정월 부임하였다가 바로 교리로 전임하였다. 좌측에 문묘를 중신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향교의 중건에 기여한 공으로 비석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⑨ 현감 송후지렴 청백선정비(縣監 宋侯之濂 淸白善政碑)의 건립 연대는 미상이다. 송지렴(宋之濂)은 1660년(현종 1) 부임하였다가 1660년 교체되었다.

⑩ ○○○후수일 청덕강명 휼민선정비(○○○侯壽一 淸德剛明 恤民善政碑)의 건립 연대는 미상이다. 김수일은 1670년(현종 10) 부임하여 1672년 교체되었다.

⑪ 현감 나염 휼민선정비(縣監 羅袡 恤民善政碑)의 건립 연대는 미상이다. 나염은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648년(인조 26) 12월 20일 태인현감에 임명되었다. 1653년(효종 4) 12월 26일 신재(申在)를 태인현감으로 임명하면서 교체되었다.

⑫ 관찰사 민공정식 청백영세불망비(觀察使 閔公正植 淸白永世不忘碑)의 건립 연대는 1892년이다. 비문으로 보아 민정식은 관찰사로 있으면서 복정(卜定)[조선 시대 상급 관아에서 하급 관아로 하여금 규정된 공물 이외에 지방의 토산물을 강제로 바치게 하던 일을 이두식으로 이르던 말]을 아뢰어 없앴으며, 재결(灾結)[재해를 입은 농지]을 없애는 공적을 베풀어서 비석을 세운 것이다.

⑬ 어사 성공이호 거사비(御使 成公彛鎬 去思碑)의 건립 연대는 1864년이다. 성이호는 1857년 전라우도암행어사에 임명되었다. 성이호가 제방을 축조하여 해를 제거한 공으로 비석을 세웠다.

⑭ 현감 정후이원 영세불망비(縣監 鄭侯履源 永世不忘碑)의 건립 연대는 미상이다.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제언을 축조하여 가뭄의 피해를 덜게 되어 비석이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정이원은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882년(고종 19) 8월 13일 태인현감에 부임하였다.

⑮ 어사 이공후선 구폐불망비(御使 李公後善 捄弊不忘碑)의 건립 연대는 1863년이다. 이후선은 1862년(철종 13) 6월 전라우도암행어사로 활동하였다.

⑯ 현감 김후이회 영세불망비(縣監 金侯履會 永世不忘碑)의 건립 연대는 미상이다. 김이회는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814년(순조 14) 6월 24일 태인현감에 임명되었다. 김이회는 태인현감으로 있으면서 태인동헌을 중건하였다.

⑰ 어사 이공후선 영세불망비(御使 李公後善 永世不忘碑)의 건립 연대는 1862년이다. 거산면에서 비석을 세웠다.

⑱ 현감 민후관호 청덕선정비(縣監 閔侯觀鎬 淸德善政碑)는 1878년 건립되었다. 『태인현지』에는 몇 해에 걸쳐 계속되었던 흉년으로 많은 군민들이 굶주리자 군민들을 먹여 위기에서 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민관호는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876년(고종 13) 3월 18일 태인현감에 임명되었다.

⑲ ○○[현감]신후석관 청덕비(○○[縣監]申侯錫寬 淸德碑)는 1849년 건립되었다. 신석관은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847년(헌종 13) 12월 2일 태인현감에 임명되었다가 1849년 5월 19일 함흥판관에 임명되었다.

⑳ ○[순]찰사 김공흥근 영세불망비(○[巡]察使 金公興根 永世不忘碑)는 1837년 건립되었다.

㉑ 현감 조후규순 영세불망비(縣監 趙侯奎淳 永世不忘碑)는 1893년 건립되었다. 조규순은 1841년(헌종 7) 8월 5일 태인현감에 임명되었으며, 1845년(헌종 11) 5월 3일 함양군수에 임명되었다. 뒷면에 있는 내용으로 보면 1893년(계사) 2월 조규순의 아들 조병갑이 고부군수가 되어 비각을 세우고 비석을 다시 세웠다. 조병갑은 1892년(고종 29) 4월 28일 고부군수에 임명되었다. 「전봉준 공초」에 따르면 조병갑이 아비의 비각(碑閣)을 세운다고 군민들로부터 2,000냥을 거두어들였다고 되어 있다. 한편 여운용은 “본래는 땅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 피향정에 옮겨 온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병갑은 고부군수가 된 이후에 기존에 있던 조규순의 공적비에 비각을 만들어서 다시 세웠으나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 과정이나 이후 비각은 헐리고, 비석은 땅에 묻혔는데 이후 파서 피향정으로 옮긴 셈이다.

[위치]

피향정 비석군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산로 2951[태창리 102-2] 정읍 피향정 경내에 있다.

[형태]

① 군수 홍후범식 애민선정비의 형태는 작은 돌거북 위에 비신이 있고, 비신 위에 지붕 모양의 뚜껑돌이 있다. 비신은 높이 151㎝, 폭 53㎝, 두께 22㎝이다. 앞면에 제액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 관련 내용이 새겨져 있다.

② 순찰사 이서구 영세불망비의 형태는 2단으로 된 기단 위에 비신이 있고, 위에 지붕 모양의 뚜껑돌을 올렸다. 비신의 높이는 64㎝, 폭 57㎝, 두께 20㎝이다. 앞면에 제액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 관련 내용이 새겨져 있다.

③·④ 현감 이후성징 청백선정비는 파손된 비신만 있어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다. 앞면 중앙에 제액이 있고, 좌우에 관련 내용이 있다.

⑤ 병사 민○○비도 파손이 심하다. 비의 상부에는 뚜껑돌이 없다. 앞면에 제액이 있다.

⑥ 관찰사 김공병교 영세불망비는 기단 없이 비신을 세우고 뚜껑돌도 없다. 비신의 높이는 147㎝, 폭 52㎝, 두께 21㎝이다. 앞면에 제액이 있고, 후면에 건립일이 새겨져 있다.

⑦ 순찰사 서공기순 청백선정비는 기단 없이 비신이 서 있으며 뚜껑돌이 없다. 비신의 높이는 152㎝, 폭 54㎝, 두께 18㎝이다. 앞면에 제액이 있고, 좌측면에 건립일이 새겨져 있다.

⑧ 현감홍후계적영세불망비는 기단 없이 비신을 세우고 뚜껑돌도 없다. 비신의 높이는 158㎝, 폭 50㎝, 두께 17㎝이다. 앞면 중앙에 제액이 있고, 좌우 측면에 관련 내용, 측면에 건립 연대가 새겨져 있다.

⑨ 현감 송후지렴 청백선정비는 기단 없이 비신을 세우고 뚜껑돌도 없다. 비신의 높이는 173㎝, 폭 73㎝, 두께 18㎝이다. 중앙에 제액이 새겨져 있다.

⑩ ○○○후수일 청덕강명 휼민선정비는 기단 없이 비신을 세우고, 뚜껑돌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상단부가 파손되어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현재의 비신은 높이 124㎝, 폭 73㎝, 두께 18㎝이다. 앞면 중앙에 제액이 있다.

⑪ 현감 나염 휼민선정비는 기단 없이 비신을 세우고 뚜껑돌은 없다. 비신의 높이는 116㎝, 폭 59㎝, 두께 18㎝이다. 비(碑) 자의 절반 정도가 땅에 묻혀 있다. 정면에 제액이 있다.

⑫ 관찰사 민공정식 청백영세불망비는 기단 없이 시신을 세우고 뚜껑돌이 없다. 비신의 높이는 130㎝, 폭 43㎝, 두께 22㎝이다. 앞면 중앙에 제액이 있고, 좌우측에 관련 내용이 있다. 좌측면에 건립 연대가 새겨져 있다.

⑬ 어사 성공이호 거사비는 기단 없이 비신을 세우고 뚜껑돌이 없다. 비신의 높이는 118㎝, 폭 42㎝, 두께 19㎝이다. 앞면의 중앙에 제액이 새겨져 있고, 좌우측에 관련 내용과 건립 연대가 새겨져 있다.

⑭ 현감 정후이원 영세불망비는 기단 없이 비신을 세우고 뚜껑돌이 없다. 비신의 높이는 126㎝, 폭 40㎝, 두께 14㎝이다. 앞면 중앙에 제액이 있으며, 좌우측에 관련 내용이 있다.

⑮ 어사 이공후선 구폐불망비는 기단 없이 비신을 세우고 뚜껑돌이 없다. 비신의 높이는 110㎝, 폭 49㎝, 두께 18㎝이다. 앞면 중앙에 제액이, 좌측에 건립 연대가 새겨져 있다.

⑯ 현감 김후이회 영세불망비는 기단 없이 비신을 세우고 뚜껑돌이 없다. 비신의 높이는 93㎝, 두께 16㎝이다. 앞면에 제액이 새겨져 있다.

⑰ 어사 이공후선 영세불망비는 기단 없이 비신을 세우고 뚜껑돌이 없다. 앞면 중앙에 제액이 있으며, 높이는 110㎝, 폭 49㎝, 두께 18㎝이다. 우측에 건립 연대가 새겨져 있다.

⑱ 현감 민후관호 청덕선정비는 기단 없이 비신을 세우고 뚜껑돌이 없다. 비신의 높이는 109㎝, 폭 41㎝, 두께 14㎝이다. 앞면 중앙에 제액이 새겨져 있고, 좌우측에 관련 내용이 새겨져 있다. 좌측면에 건립 연대가 새겨져 있다.

⑲ ○○[현감]신후석관 청덕비는 기단 없이 비신을 세우고 뚜껑돌이 없다. 비석의 상단이 잘려 현감의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남아 있는 비석의 높이는 111㎝, 폭 52㎝, 두께 17㎝이다. 앞면 중앙에 제액이 새겨져 있고, 좌측에 내용과 건립 연대가 새겨져 있다.

⑳ ○[순]찰사 김공흥근 영세불망비는 기단 없이 비신을 세우고 뚜껑돌이 없다. 비신의 상단이 잘려 ‘순’ 자가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비신의 하단도 땅에 묻혀 비(碑) 자가 보이지 않는다. 남아 있는 비석의 높이는 115㎝, 폭 54㎝, 두께 18㎝이다. 앞면에 제액이 새겨져 있고, 후면에 건립 연대가 새겨져 있다.

㉑ 현감 조후규순 영세불망비는 시멘트로 기단부가 되어 있으며, 뚜껑돌이 없다. 앞면에 제액이 있으며, 후면에 조병갑이 개수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금석문]

① 군수 홍후범식 애민선정비(郡守 洪侯範植 愛民善政碑)

〈원문〉

興學善治 鄕人立碑頌德 庚戌立碑

〈풀이〉

학문을 진흥시키고, 통치를 잘하여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우고 그 덕을 칭송한다. 경술년 세웠다.

② 순찰사 이공서구 영세불망비(巡察使 李公書九 永世不忘碑)

〈원문〉

道光二年壬午 十月 十八日 立 別有司 秋芳郁 鄭龍周

〈풀이〉

도광 2년 임오년(1822) 10월 18일 세우다. 별유사 추방욱, 정용주

③·④ 현감 이후성징 청백선정비(縣監 李侯星徵 淸白善政碑)

〈③ 원문〉

甲申二月三日到任 頌之壬寅登第官至

○水侵恐顚仆字畵 ○○○面手○改刻

〈④ 원문〉

○七月二日外難去民立石 ○使此碑立於獨山內大路傍

○○缺孫○任○移竪池上 ○(七)十一年丙申閏三月七日也

〈풀이〉

갑신년(1644) 도임하였으나 ○ 7월 2일 외난(外難)으로 떠나자[1646], 주민들이 칭송하여 비석을 세웠다. 임인년(1662)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사를 역임하였다. 이 비석을 독산내(獨山內) 큰길 곁에 세웠다. 그러나 어떤 사정으로 비석을 연못[지상(池上)] 곁으로 옮겨 세웠다. 그것은 공이 이임한 지 71년이 되는 병신년(1716) 윤3월 7일이다.

마지막 줄에 나오는 병신년이면서 윤3월이 들어가는 해는 1716년(숙종 42, 숭정기원후 89, 강희 55)이다. 이것은 앞의 11년과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이성징이 1646년 이임하였으므로, 1716년은 이성징이 이임한 지 71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므로 11년 앞의 깨어진 글씨를 칠(七)로 보았다.

⑤ 병사 민○○(兵使 閔○○)

〈원문〉

○恤

⑥ 관찰사 김공병교 영세불망비(觀察使 金公炳喬 永世不忘碑)

〈원문〉

丁巳四月 日

〈풀이〉

정사년(1857) 4월 세웠다.

⑦ 순찰사 서공기순 청백선정비(巡察使 徐公箕淳 淸白善政碑)

〈원문〉

乙巳十月 日

〈풀이〉

을사년(1845) 10월 세웠다.

⑧ 현감 홍후계적 영세불망비(縣監 洪侯啓迪 永世不忘碑)

〈원문〉

宣○○○○○○○○一周 文廟重新○○流千春

○○月二十七日

〈풀이〉

문묘[향교]를 새롭게 하였다.

○○월 27일 세웠다.

⑨ 현감 송후지렴 청백선정비(縣監 宋侯之濂 淸白善政碑)

⑩ ○○○후수일 청덕강명 휼민선정비(○○○侯壽一 淸德剛明 恤民善政碑)

⑪ 현감 나염 휼민선정비(縣監 羅袡 恤民善政碑)

⑫ 관찰사 민공정식 청백영세불망비(觀察使 閔公正植 淸白永世不忘碑)

〈원문〉

啓罷卜定 一省咸凞

蠲除灾結 萬口豊溢

壬辰八月 日

〈풀이〉

아뢰어서 복정(卜定)을 혁파하니, 한 고을이 모두 빛이 나고, 재결(灾結)을 없애니 모든 사람이 풍요롭게 되었다.

임진년(1892) 8월 세웠다.

⑬ 어사 성공이호 거사비(御使 成公彛鎬 去思碑)

〈원문〉

決堰除害 無德不○

甲子正月日

〈풀이〉

제언을 만들어서 해를 제거하니

갑자년(1864) 정월 세웠다.

⑭ 현감 정후이원 영세불망비(縣監 鄭侯履源 永世不忘碑)

〈원문〉

惟玆決堰 ○時○減

音○成陳 ○化○均

〈풀이〉

제언을 축조하여 가뭄을 덜게 되었다는 내용

⑮ 어사 이공후선 구폐불망비(御使 李公後善 捄弊不忘碑)

〈원문〉

癸亥三月 日

〈풀이〉

계해년(1863) 3월 세웠다.

⑯ 현감 김후이회 영세불망비(縣監 金侯履會 永世不忘碑)

⑰ 어사 이공후선 영세불망비(御使 李公後善 永世不忘碑)

〈원문〉

壬戌十二月 日 居山面

〈풀이〉

임술년(1862) 12월 거산면에서 세웠다.

⑱ 현감 민후관호 청덕선정비(縣監 閔侯觀鎬 淸德善政碑)

〈원문〉

廉潔方嚴 爲政以仁 遭饑施賑 普救斯民

活千猶福 況萬其人 於戱令德 世世維新

戊寅十二月日

〈풀이〉

청렴하게 하고 인으로써 선정을 베풀며, 굶주림을 당하여서 이 사람들을 구제해 주어 그 공덕을 기린다는 내용이다.

무인년(1878) 12월 세웠다.

⑲ ○○[현감]신후석관 청덕비(○○[縣監]申侯錫寬 淸德碑)

〈원문〉

仁爲世之望 己酉七月日

〈풀이〉

어짊으로 세상의 우러름을 받았다. 기유년(1849) 7월 세웠다.

⑳ ○[순]찰사 김공흥근 영세불망비(○[巡]察使 金公興根 永世不忘碑)

〈원문〉

丁酉十月日

〈풀이〉

정유년(1837) 10월 세웠다.

㉑ 현감 조후규순 영세불망비(縣監 趙侯奎淳 永世不忘碑)

〈원문〉

癸巳二月日 子秉甲以古阜郡守 建閣改竪

〈풀이〉

계사년(1893) 2월 아들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비각을 세우고 비석을 새로 세웠다.

[현황]

피향정 비석군은 관리가 잘 이루어지고 있으나 일부는 땅에 깊이 묻힌 것이 있어 보완이 필요하다. ③번과 ④번 비석은 본래 하나였으므로 두 개를 합하여 세우거나 거리를 가깝게 두고 본래 하나였다는 설명을 붙일 필요가 있다.

[의의와 평가]

피향정 비석군은 조선 후기 태인현감이나 태인군수를 지냈던 인물을 비롯하여 선정을 베푼 공적을 기리는 비석들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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