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사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589
한자 召募事實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하학리 56-1]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조광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19년 12월 20일연표보기 - 소모사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64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소모사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변경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4년 1월 18일 - 소모사실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로 변경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4년 5월 17일 - 소모사실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변경
소장처 동학농민혁명기념관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하학리 56-1]지도보기
성격 전적
편자 조시영
문화재 지정 번호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정의]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소모사 조시영이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면서 각급 기관과 주고받은 공문서 등을 모은 개항기 전적.

[개설]

1894년 11월 13일, 김산(金山)은 호남과 영남의 요충지에 있으니 조시영을 소모사(召募使)[조선 시대에 병란이 발발한 지역의 향병(鄕兵)을 모집하기 위하여 국왕이 임시로 임명하던 관리]로, 김산군수 박준빈(朴駿彬)을 조방장(助防將)[조선 시대에 외적이나 변란을 막기 위하여 임시로 파견한 종2품 군사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방어를 철저히 하자는 의정부의 건의를 고종이 윤허함에 따라 김산소모영(金山召募營) 설치가 결정되었고, 1894년 11월 21일부터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조시영이 이끄는 김산소모영은 김산군 관아 인근의 봉계(鳳溪)[현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에 있었다. 관할 구역은 김산을 비롯하여 인동·칠곡·선산·성주·개령·군위·의흥·비안·고령 등지였다.

소모사실(召募事實)에는 김산소모영 관할 각 읍에 보낸 감결(甘結)[상급 관아에서 하급 관아로 내리는 공문]과 전령 등의 공문서와 의정부, 내무아문, 군무아문,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호서와 호남의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1894년 10월 조선 정부가 발족한 부대]과 순영(巡營)[경상도 감영] 등의 각급 기관과 주고받은 이문(移文)[동등한 급의 관청이나 기관에 보내는 공문]이 실려 있다. 또 관할인 김산군의 16면과 김산 장시에 주둔한 군사들에게 보내는 감결과 전령 등을 잇달아 보내 할 일을 지시하고 단속한 문건들도 모두 기재하였으며, 마을 책임자인 존위(尊位)와 두민(頭民)들에게 지시하거나 당부하는 문건들도 모았다.

소모사실은 2019년 12월 20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6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변경되었다. 2024년 1월 18일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로 변경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바뀌었다. 소모사실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

조시영(曺始永)[1843~1912]의 본관은 창녕이며, 자는 치극, 호는 후계이다. 동지중추부사 위의 12세손으로 아버지는 조진만이며 어머니는 진주 강씨로 강처중의 딸이다. 187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고, 1882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의 수찬, 교리, 응교, 사간원헌납, 사헌부지평, 장령, 집의, 성균관사성, 장악원정 병조정랑, 통례원의 좌통례, 우통례 등을 지냈다. 1890년 통정대부에 올라 돈녕부도정을 거쳐 병조의 참지, 참의, 동부승지가 되었다. 외직으로는 흥양현감, 고령군수, 여산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김산소모영은 1895년 1월 22일, 군무아문, 내무아문, 순영에 문서를 보내는 것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으며, 조시영은 이병휘가 올린 계로 포상을 받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최시형과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동학농민군은 1894년 11월 27일, 전라도 태인 전투에서 패한 후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북상하는 동학농민군이 경상도로 들어올 것을 대비하여 조시영을 소모사로 임명하고 김산소모영을 설치하였다. 소모사실 표지에 ‘갑오십일월 이십일일부터 을미 정월 이십이일’이라고 쓰여 있어 김산소모영의 활동 기간을 확인할 수 있다. 흥양현감이었던 조시영은 1894년 11월 13일, 김산소모사로 임명받았다. 소모사실은 조시영이 당시 조방장 박준빈과 함께 1894년 11월 21일부터 1895년 1월 22일까지 약 2개월 동안 동학농민군 토벌을 지휘하면서 관련 사실을 모은 자료이다.

[형태/서지]

소모사실은 총 132면으로 구성되어 있는 필사본 문서이며, 책장마다 소모영의 간인이 찍혀 있다. 소모사실 표지에는 책의 제목과 함께 말 3마리가 있는 마패가 찍혀 있다.

[구성/내용]

주요 내용으로는 소모영 관할 구역 내 각 동리마다 오가작통(五家作統)을 조직하여 실시토록 하였다는 내용, 보부상과 수성군이 동학농민군을 잡는다는 핑계로 민간에 끼친 폐단이 심하여 원성이 자자하니 이를 금한다는 내용, 군기와 군량의 수집 확보 과정과 동학농민군의 재산과 집기를 탈취한 사항 등이 있다.

특히 경영(京營)[경기감영]에 보낸 공문에는 일본군과 합세하여 충청도 보은군 종곡에서 동학농민군을 격파하였다는 내용과 무주의 전천순(全千順)과 김원창(金元昌)을 체포하였는데 전천순과 김원창은 전봉준의 폐부(肺腑)[허파] 역할을 하는 괴수로 영남에 출몰하면서 기포(起包)[동학의 포의 조직을 중심으로 하여 봉기하는 것]를 독려하는 자이니 당장에 포살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영남 지역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동학농민군과 연계되어 활동하였음을 알려 주는 사실로 다른 사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내용이다.

또 남홍언(南洪彦)과 편사흠(片士欽)을 체포하였는데 남홍언과 편사흠은 5~6만 명의 포(包)를 거느린 영남의 큰 도둑이라는 내용, 남홍언과 편사흠이 김개남 처소에 가서 신하라 일컫고 이런 뜻을 담은 소초(疏草)[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의 초고]를 올린 것을 남홍언과 편사흠의 집에서 찾아냈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이는 경상도 김천군의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남원에 있던 김개남의 지휘를 받고 움직였으며, 김개남이 왕을 자처하였다는 일각의 주장을 뒷받침하여 주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1595년 1월 3일, 16개 면의 약정에게 보낸 전령에는 “지금 군수(軍需)는 대단히 시급한 문제이니 향론에 의하여 5등급으로 나누어 정하여서, 1등급은 8명, 2등급은 5명, 3등급은 3명, 4등급은 2명, 5등급은 1명으로 하여 사람마다 매월 삭료를 17냥씩으로 하였으니 이렇게 알리고 이달 초 8일 안으로 기한을 정하여 약정(約正)이 군문에 수납하라. 만일 혹시라도 기한을 넘기거나 납입을 거절한다면 단지 약정만을 엄하게 다스릴 뿐 아니라 해당 가호도 해당 병정 몇 명을 내려보낼 것이니, 십분 두렵게 여기는 생각을 가지고 앞을 다투어 의금을 내어 죄를 짓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여 동학농민군 진압에 소요되는 비용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직접 부담토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부분에는 이병휘(李秉輝)가 영남우도를 시찰한 후에 조정에 포상을 요청한 보고서인 계(啓)가 나오는데, “남홍언, 편사흠이 5~6만 명을 거느리고 김개남에 상소를 올렸는데 그 죄가 전봉준에 못지않다”라고 하였다.

[의의와 평가]

소모사실은 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북도 일대 동학농민군에 대한 조선 정부와 김산소모영의 진압 활동, 전라도 동학농민군과 경상도 동학농민군의 연계, 그리고 김개남의 혁명 의식 등을 연구하는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된다. 2023년 5월 24일, 동학농민혁명은 민중이 주체가 되어 자유, 평등,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기 위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받았으며, 소모사실을 비롯한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물 185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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