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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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琫準 |
영어공식명칭 | Jeon Bongjun |
이칭/별칭 | 명숙(明淑),명좌(明佐),녹두(綠豆),녹두장군,전철로(全鐵爐),전병호(全炳鎬)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광환 |
출생 시기/일시 | 1855년 12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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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4년 1월 10일 - 전봉준 고부농민봉기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 3월 26일 - 전봉준 백산에서 동학농민군 대장으로 추대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 11월 27일 - 전봉준 태이 전투 뒤 농민군 해산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 12월 2일 - 전봉준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 12월 18일 - 전봉준 한양으로 이송 |
활동 시기/일시 | 1895년 3월 29일 - 전봉준 사형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895년 3월 30일![]() |
출생지 | 당촌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
거주|이주지 | 차복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덕안리 진선마을![]() |
거주|이주지 | 지금실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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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이주지 | 조소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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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전봉준 묘소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 산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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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혁명가 |
성별 | 남 |
본관 | 천안 |
대표 경력 | 동학농민혁명 최고 지도자 |
[정의]
개항기 정읍 지역에서 활동한 동학농민혁명 최고 지도자.
[가계]
전봉준(全琫準)[1855~1895]의 본관은 천안(天安)이며, 자는 명숙(明淑)[족보에는 명좌(明佐)], 별호는 녹두(綠豆)이다. 어릴 적 이름은 전철로(全鐵爐)이고, 1866년에 간행된 『천안전씨세보(天安全氏世譜)』에는 전병호(全炳鎬)로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전창혁(全彰赫)이고, 어머니는 언양 김씨(彦陽 金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송두옥(宋斗玉)의 딸 여산 송씨(礪山 宋氏)이고, 두 번째 부인은 이문기(李文琦)의 딸 남평 이씨(南平 李氏)이다. 아들은 전동길(全東吉)·전동일(全東一)이고, 딸은 전옥례(全玉禮)·전옥련(全玉蓮)이다.
[활동 사항]
전봉준은 1855년(철종 6) 12월 3일 전라도 고창현 덕정면 죽림리 당촌[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에서 태어났다. 1867년(고종 4) 부모를 따라 고부군 남부면 진장문하 차복리[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덕안리 진선마을]로 이주하였고, 이후 태인현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로 이주하였다. 이 시기에 전봉준은 김개남(金開南)을 만나 막역한 교우 관계를 쌓았다. 1885년 무렵에는 고부군 조소리[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로 이주하여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1892년 전봉준은 봉건 통치 계급의 가혹한 착취와 외세의 침략 아래에서 나라 사정과 민중의 삶이 날로 피폐하여지는 것을 보고 새로운 사회 건설을 꿈꾸며 동학(東學)에 입교하였다. 1892년 10월 1일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을 내걸고 삼례에서 집회가 열렸을 때에는 전라감영에 소(訴)를 전달하는 역할을 자진하여 담당하였다. 삼례집회가 해산되자 전봉준은 김개남·김덕명(金德明)·손화중(孫華仲) 등과 함께 동학교도 수백 명을 이끌고 무장(茂長)군수에게 빼앗긴 1,000냥을 받아 내기 위하여 무장으로 향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무장군수는 무장 좌수와 이방을 전라도 금구현 원평으로 나아가도록 하여 빼앗은 1,000냥을 되돌려 주었다. 이러한 전봉준의 과감한 행동은 당시 동학교도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삼례집회 이후 점점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자 전봉준은 남원 일대에서 격문 부착과 무력 항쟁을 전개하였고,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과 전라도 금구, 경상도 밀양에서 이른바 ‘삼남 집회’가 개최되었을 때 손화중·황하일(黃河一) 등과 함께 금구집회를 주도하였다. 전봉준 등은 금구집회를 통하여 보은집회의 분위기를 종교적 차원을 넘어선 더욱 적극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의도와는 달리 보은집회의 이른 해산으로 후일을 기약하는 동시에 이전과는 다른 직접적인 투쟁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금구집회 이후 전봉준은 1893년(고종 30) 11월 고부에서 있었던 사발통문 거사 계획에 참여하였다. 이어 1894년 1월 10일 고부농민봉기를 일으켜 사발통문 거사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고부농민봉기가 소강상태에 접어들 무렵 안핵사 이용태가 역졸을 거느리고 고부로 내려와 동학교도들의 집을 방화하면서 체포와 살육을 일삼았다. 이때 전봉준은 각 지역에 봉기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고 전라도 무장현으로 내려가 접주인 손화중을 설득하여 무장에서 봉기를 선언하였다. 전봉준과 손화중이 이끈 동학농민군과 태인에서 일어난 김개남·최경선(崔景善)의 동학농민군은 다시 고부 관아를 점령한 뒤 3월 26일 부안 백산(白山)에 총집결하여 격문을 발표하였다. 백산에서 전봉준은 대장으로 추대되어 동학농민군을 이끄는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1894년 4월 7일 관군과 최초로 싸운 황토현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봉준은 4월 23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중앙군마저 격파하였다. 이어서 전주성을 점령하고 전주화약을 맺은 이후 집강소 통치 중 일본군의 경복궁 침략에 항거하여 1894년 9월 다시 전라도 삼례에서 봉기한 뒤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전봉준이 이끈 동학농민군은 10월 23일 공주 이인(利仁) 전투를 시작으로 11월 8일 우금치 전투 등 공주 일대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15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거듭하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전봉준은 노성과 논산 등에서 패전을 거듭하며 11월 27일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부대를 해산하였고, 11월 29일 부하 몇 사람과 함께 정읍 입암산성(笠巖山城)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지냈다. 일본군 부대와 이규태의 관군이 추격하여 온다는 정보를 듣고 11월 30일 입암산성에서 동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는 백양사로 이동하여 말사인 청류암에서 하룻밤을 지새운 뒤 12월 2일 전라도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현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 피노마을]에 거주하던 옛 동지 김경천을 찾았다. 전봉준 일행을 맞이한 김경천은 마을 주막으로 안내한 후 전라감영 퇴역 장교 출신인 한신현(韓信賢)에게 밀고하였고, 한신현은 김영철·정창욱 등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전봉준이 머물고 있던 주막을 포위하였다. 눈치를 챈 전봉준은 담을 뛰어넘어 도피하려다 다리에 부상을 당하고 붙잡혔고, 담양의 일본군에 인계되어 전주를 거쳐 12월 18일 한양으로 이송되었다.
전봉준은 다섯 차례에 걸쳐 조선 법관과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즈치[內田定槌]의 심문을 받았고, 1895년 3월 29일 사형을 선고 받고 3월 30일 새벽에 손화중·김덕명 등과 함께 사형이 집행되었다.
[묘소]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 산10-3에 전봉준의 가묘(假墓)인 전봉준 장군 단소가 조성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