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5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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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하학리 56-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광환 |
저술 시기/일시 | 1923년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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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 시기/일시 | 1924년 9월![]()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8년 3월 9일![]()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2021년 11월 19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변경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4년 1월 18일 - 2021년 11월 19일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로 변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4년 5월 17일 - 2021년 11월 19일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로 변경 |
소장처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하학리 56-1]![]() |
성격 | 고문서 |
저자 | 최병현 |
권책 | 2책 |
규격 | 가로 17㎝, 세로 25㎝[종리원사 부동학사] |
문화재 지정 번호 |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있는 동학교인들의 내력에 대한 기록 및 동학 전파 내력과 동학농민혁명 약사를 기록한 책.
[개설]
순교약력(殉敎略歷)은 1923년 3월 최병현(崔炳鉉)이 기록한 책이며, 종리원사 부동학사(宗理院史 附東學史)는 1924년 9월 최병현이 유태홍(柳泰洪)의 구술을 정리한 책이다. 순교약력과 종리원사 부동학사(殉敎略歷과 宗理院史 附東學史)는 남원대접주 김홍기(金洪基)[1856~1895]의 3대 손인 김동규(金東圭)가 집안에 전하여 오던 것을 공개함으로써 일반에 알려지게 되었다. 2023년 현재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소장되어 있다. 순교약력과 종리원사 부동학사는 2018년 3월 9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9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변경되었다. 2024년 1월 18일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로 변경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로 바뀌었다.
[저자]
최병현은 일제 강점기 천도교 남원교구의 핵심 교역자로 활동하였다. 최병현은 1888년 10월 10일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주천면 주천리에서 출생하였다. 20세 되던 1907년경 천도교에 입교하여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당시 남원교구장인 유태홍(柳泰洪)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 받아 광주지방법원 남원지청 게시판에 붙였다. 1919년 4월 4일 오후 2시, 남원 장날을 기하여 광한루 앞 광장에서 만세 운동을 한 후 남원 헌병청을 향하여 행진하였다. 최병현은 남원 헌병청에 구금되어 3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최병현은 천도교 남원교구장 등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최병현은 남원 지역 동학과 천도교의 역사를 기록한 종리원사 부동학사, 「남원군 동학사」 등의 저서를 남겼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신간회 남원지회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1957년 7월 8일에 사망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동학농민혁명 당시 남원 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유태홍이 자신과 함께 싸우다가 죽은 동지들을 추모하고 동지들의 행적을 남기기 위하여 최병현을 불러 구술하였는데 최병현이 구술 내용을 풀어 책으로 엮었다.
[형태/서지]
순교약력은 56쪽 분량의 국한문 혼용 필사본 책이다. 종리원사 부동학사는 17㎝, 25㎝ 크기의 개량 한지에 먹펜으로 기록한 50쪽짜리 필사본 책이다.
[구성/내용]
순교약력은 1923년 3월, 당시 천도교 전라북도 남원군 종리원[천도교 중앙과 지방에 있었던 사무 행정 기관] 소속 주임 종리사(宗理師) 최병현이 기록한 책이다. 순교약력 첫 머리에는 최병현이 직접 지은 위령문이 실려 있고 그 다음에는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사망하였거나, 동학농민혁명 직후 체포되어 처형된 남원 출신의 대접주 김홍기·최진악(崔鎭岳)·김낙기(金洛基)를 비롯한 유명 접주 41명의 출생지와 거주지, 동학 입교 시기와 연원 및 지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또 동학농민혁명 당시 41명이 전개한 활동 상황, 관군과 민보군에 의하여 체포된 장소와 일시도 기록하였다. 순교약력에는 체포된 동학농민군이 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터에서 처형당하였는데, 대표적인 장소가 남원장터, 오수장터, 장수장터, 운봉장터 등이라고 밝히고 있다. 처형당한 방식도 포형(炮刑)[총살형] 또는 참수 등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매질이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한 병사, 고문을 견디다 못하여 음독 자살한 개인별 사례까지 기록하였다. 이어 동학농민혁명 이후 남원 지역 동학교인 47인의 동학교단 내 직책과 활동, 자연사 또는 병사 등의 사인 및 사망 일시 등이 간략히 정리되어 있다.
종리원사 부동학사는 1924년 9월 최병현이 1892년 삼례집회 당시 전봉준(全琫準)과 함께 전라감영에 소장(訴狀)을 전달하였던 유태홍의 구술을 정리한 책이다. 종리원사 부동학사는 남원시 이백면 남계리에 거주하는 천도교인 김동규가 소장하고 있던 자료이다. 김동규의 할아버지는 1894년 남원대접주로 활동한 김홍기로 유태홍을 동학에 입교시킨 인물이다.
종리원사 부동학사에는 동학을 창시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1861년 당시 남원군 교룡산성 내의 은적암(隱跡庵)으로 피신하여 수행하였던 시기로부터 1924년까지 남원 지역 동학 교단의 연혁이 기록되어 있다. 종리원사 부동학사의 끝 부분에는 동학농민혁명 직후 남원 지역 동학교단의 재건 과정이 나온다. 1908년부터 1924년까지의 남원군 종리원 임원의 명단과 직책, 남원 지역 내 각 면 단위 종리원 임원의 명단과 직책. 그리고 인근에 있는 운봉군교구사(雲峰郡敎區史) 및 구례군교구사(求禮郡敎區史)의 연혁과 임원 명단도 부록으로 정리되어 있다.
후반부에는 ‘남원군동학사’라는 별도의 제목으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이 비교적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주요 내용으로는 1861년 12월 15일, 최제우가 남원 광한루 아래 오작교 옆 서형칠(徐亨七)의 집에 찾아와 머물며 서형칠 등 6명에게 포교한 사실과 이후 교룡산성 내에 있는 은적암으로 거처를 옮겨 「논학문」·「권학가」·「도수가」·「검가」 등 동학의 경전을 저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남원군동학사」에는 다른 사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전봉준의 행적이 실려 있어 주목된다. 1892년 11월에 있었던 삼례집회 당시 서병학(徐丙鶴)이 쓴 소장을 전라감영에 전달하여야 하는데, 서로 눈치만 보고 나서는 사람이 없던 차에 바로 전라우도의 전봉준과 전라좌도의 유태홍이 자원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이는 전봉준이 문헌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이며 최소한 삼례집회 때부터 전봉준은 이미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1893년 정월 초에는 전봉준이 직접 지은 창의문(倡義文)을 1893년 1월 10일, 남원(南原) 김영기(金榮基), 운봉(雲峰) 김성기(金聖基), 곡성(谷城) 김재홍(金在弘), 구례(求禮) 유태홍 등을 시켜 동시에 각군아문(各郡衙門)에 게시토록 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전봉준이 직접 지은 글이 각 군 관청에 게시될 정도로 조직 내부에서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었으며 거기에 호응하는 전라도 각지의 인물들과 조직적 연계가 이뤄지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다. 또 1892~1893년에 전개된 교조 신원 운동을 주도하였으나 구체적 행적이 밝혀지지 않았던 서인주(徐仁周)가 삼례집회 때 파견되었던 전라감영 영장(營將) 김시풍(金始豊)과 담판하는 내용, 보은집회와 해산, 금구집회 세력의 활동과 해산 등에 관한 내용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삼례집회 해산 당시 전봉준 등의 동향이 나오는데 “전라도 동학교인 김개남(金開南)·전봉준·김덕명(金德明)·손화중(孫華仲) 외 수백 인이 무장군수(茂長郡守)에게 빼앗긴 돈 1,000냥을 돌려받고자 무장으로 향하는 도중에 이 소식을 접한 무장군수가 황급히 보낸 무장좌수(茂長座首)와 이방(吏房)을 금구(金溝) 원평(院坪)에서 만나 빼앗긴 1,000냥을 되돌려 받았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훗날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가 되는 전봉준·김개남·손화중·김덕명 등이 이미 삼례집회 때부터 서장옥과 함께 행동하며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것으로 대단히 주목되는 내용이다.
「남원군동학사」에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였을 당시 남원 지역과 전라좌도 지역의 상황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사용하였던 장태의 모습이다. 이 당시 동학농민군은 장태 7개를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길이는 21척이오 높이는 7척인데, 양쪽 머리에 십자형으로 전륜(轉輪)을 하고 시(塒) 안에 마룻대[棟]를 가로질러 얽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 김개남이 이끈 남원 지역 동학농민군의 편제와 집강소의 직임 등과 동학농민혁명 당시 남원 지역 내의 활동 내역도 소개하고 있다. 2차 봉기 직전, 전봉준과 김개남이 남원에서 8일 동안 비밀 회담한 사실과 운봉 지역 박봉양(朴鳳陽)이 이끈 민보군이 남원의 동학농민군을 공격한 내용 등도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순교약력은 남원 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의 이름과 활동, 성분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역사 자료이다. 또한 남원 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전후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종리원사 부동학사는 1894년 이전 서인주와 전봉준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으며 장태에 대하여 구체적인 내용이 실려 있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료라 할 수 있다. 2023년 5월 18일, 동학농민혁명은 민중이 주체가 되어 자유, 평등,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기 위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받아 순교약력과 종리원사 부동학사를 비롯한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물 185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