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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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潛 |
영어공식명칭 | Shin Jam |
이칭/별칭 | 원량(元亮),영천자(靈川子),영천자(靈泉子),아차산인(峨嵯山人)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송만오 |
출생 시기/일시 | 149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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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19년 - 신잠 현량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21년 - 신잠 안처겸의 옥사에 연루, 장흥으로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543년 - 신잠 태인현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52년 - 신잠 상주목사 부임 |
몰년 시기/일시 | 1554년![]() |
추모 시기/일시 | 1668년 - 신잠 예양서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696년 - 신잠 정읍 무성서원 배향 |
출생지 | 한성 - 서울특별시 |
부임|활동지 | 태인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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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활동지 | 간성 -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간성읍 |
부임|활동지 | 상주 - 경상북도 상주시 |
유배|이배지 | 장흥 - 전라남도 장흥군 |
유배|이배지 | 양주 - 경기도 양주시 |
사당|배향지 | 예양서원 -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예양4길 15-7[예양리 83-1] |
사당|배향지 | 무성서원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무성리 500]![]() |
성격 | 문신|화가 |
성별 | 남성 |
본관 | 고령 |
대표 관직 | 예문관검열|상주목사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에 있는 무성서원에 배향된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화가.
[가계]
신잠(申潛)[1491~1554]의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영천자(靈泉子)·아차산인(峨嵯山人)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이고, 할아버지는 신주(申澍)이다. 아버지는 예조참판 신종호(申從濩)이고, 어머니는 세종의 아들 의창군(義昌君) 이공(李玒)의 딸 전주 이씨(全州 李氏)이다. 부인은 당해부수 이붕귀(李朋龜)의 딸 전주 이씨(全州 李氏)이고, 아들은 신수용(申秀溶)이다. 형은 신항(申沆)·신굉(申宏)·신순(申洵)이다.
[활동 사항]
신잠은 1491년(성종 22)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497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맏형이자 성종의 부마로 문명(文名)이 높았던 고원위(高原尉) 신항(申沆)에게 학문을 배웠다. 1513년(중종 8)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19년 현량과에 급제한 뒤 예문관검열 등을 역임하였다.
신잠은 1521년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 전라남도 장흥(長興)에 유배되었다. 이후 1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며 묵죽(墨竹)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1537년 신잠은 장흥에서 경기도 양주(楊州)로 옮겨졌고, 1538년에는 거주의 편의가 허락되어 한성 인근의 아차산(峨嵯山) 아래에 옮겨 살았다.
신잠은 1543년 다시 등용되어 태인현감으로 부임하였고, 태인에 큰 흉년이 닥쳤을 때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잘 구휼하였다. 이후 신잠은 간성군수[현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간성읍 일대]를 거쳐 1552년(명종 7) 상주목사를 부임하였다가 1554년 상주 관아에서 사망하였다. 신잠은 상주목사로 재임 중 청렴하고 근신하다는 평을 받고 조정으로부터 향표리 1습을 하사받았으며, 상주의 백성들은 신잠을 추모하여 불망비를 세웠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신잠의 작품으로는 「심매도(尋梅圖)」, 「사계화조도(四季花鳥圖)」, 「묵죽(墨竹)」 등이 있다. 신잠은 포도와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렸는데, 특히 묵죽이 유명하였다.
[상훈과 추모]
신잠은 1668년(현종 9)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예양4길 15-7[예양리 83-1]에 있는 예양서원(汭陽書院)에 배향되었고, 1696년(숙종 22)에는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무성리 500]에 있는 정읍 무성서원(井邑 武城書院)에 배향되었다. 1549년 피향정 옆에 태인현감을 역임한 신잠(申潛)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신잠비(申潛碑)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