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6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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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孫弘祿 |
영어공식명칭 | Son Hongrok |
이칭/별칭 | 경안(景安),한계(寒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동희 |
출생 시기/일시 | 15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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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2년 6월 - 손홍록 태조 어진과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겨 보존 |
몰년 시기/일시 | 1610년![]() |
추모 시기/일시 | 1676년 - 손홍록 남천사 배향 |
출생지 | 고현내면 삼리촌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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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단소 | 손홍록 묘소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반곡리 산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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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배향지 | 남천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남전길 34-13[시산리 844]![]() |
성격 | 학자 |
성별 | 남성 |
본관 | 밀양 |
대표 관직|경력 | 사포서별제 |
[정의]
조선 후기 정읍 출신의 학자.
[가계]
손홍록(孫弘祿)[1537~1610]의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경안(景安), 호는 한계(寒溪)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예문관부제학 손비장(孫比長)이고, 할아버지는 손세기(孫世基)이다. 아버지는 손숙노(孫叔老)이고 어머니는 최후신(崔後臣)의 딸 전주 최씨(全州 崔氏)이다.
[활동 사항]
손홍록은 1537년(중종 32) 태인(泰仁) 고현내면 삼리촌(三里村)[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에서 태어나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20여일 만에 한성부가 함락되고 전주사고를 제외한 춘추관·충주사고·성주사고의 실록이 불타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은 전주 경기전의 태조(太祖) 어진(御眞)과 전주사고의 실록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겨 수호하기로 결정하고 어진과 실록을 지킬 사람을 뽑았다.
손홍록은 안의(安義)와 함께 자원하였고, 1592년 6월 22일 경기전참봉 오희길(吳希吉)·안의와 더불어 실록과 어진을 내장산으로 옮기고 1년간을 지켜 냈다. 1593년 7월 24일에는 왕명에 따라 실록과 어진을 아산(牙山)에 옮겨 봉안하고 충청도관찰사 이산보(李山甫)에게 인계하였다. 이후 어진과 실록은 해주에 이안(移安)하였고, 1596년 말경에는 강화도에 이안하였다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영변 묘향산에 옮겨 보존하였다. 손홍록은 이때에도 함께하였다.
손홍록은 안의와 함께 선조에게 ‘중흥 6책(中興 六策)’이라는 시무책을 올렸고, 의곡도유사(義穀都有司)를 맡아 군량미를 모아 선조가 있는 행재소와 의병장들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1593년 충청도관찰사 이산보의 건의로 손홍록은 사포서별제에 제수되었고, 1595년에 다시 귀후서별제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는 않았다.
[학문과 저술]
손홍록의 저술로는 칠언절구 4편이 남아 있다.
[묘소]
손홍록의 묘소는 정읍시 칠보면 반곡리 산95에 있다.
[상훈과 추모]
손홍록은 1676년(숙종 2) 지금의 정읍시 칠보면 남전길 34-13[시산리 844]에 있는 남천사(藍川祠)에 안의와 함께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