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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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象賢 |
영어공식명칭 | Song Snghyun |
이칭/별칭 | 덕구(德求),천곡(泉谷),한천(寒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망제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송만오 |
출생 시기/일시 | 155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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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76년 - 송상현 별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81년 - 송상현 경성판관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84년 - 송상현 종계변무사의 질정관으로 명나라 사행 |
활동 시기/일시 | 1591년 - 송상현 동래부사 부임 |
몰년 시기/일시 | 1592년 4월 15일![]() |
출생지 | 망제동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망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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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단소 | 송상현 묘소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1-1 |
사당|배향지 | 충렬사 -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345[안락동 838] |
사당|배향지 | 충렬사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상로18번길 44[수의동 178-1] |
사당|배향지 | 정충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흑암신흥길 62-7[흑암동 597]![]() |
사당|배향지 | 신항서원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이정골로 115-8[용정동 120] |
성격 | 문신 |
성별 | 남성 |
본관 | 여산 |
대표 관직|경력 | 공조정랑|동래부사 |
[정의]
조선 전기 정읍 출신의 문신.
[가계]
송상현(宋象賢)[1551~1592]의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또는 한천(寒泉)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송승은(宋承殷)이고, 할아버지는 송전(宋琠)이다.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송복흥(宋復興)이고, 어머니는 김승석(金承碩)의 딸 안동 김씨(安東 金氏)이다. 부인은 이온(李熅)의 딸 성주 이씨(星州 李氏)이고, 아들은 송인급(宋仁及)·송효급(宋孝及)이다.
[활동 사항]
송상현은 1551년(명종 6)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망제동에서 태어났다.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7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경성판관을 역임하였고, 1584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종계변무사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가계(家系)에 관한 중국 측의 잘못된 기록을 바로 잡기 위하여 파견한 사신을 일컫는다. 송상현은 귀국한 뒤 호조·예조·공조의 정랑을 거쳐 1591년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은 정발(鄭撥)이 지키던 부산진성을 함락시키고 동래성까지 쳐들어왔다. 이때 왜군은 동래성 앞에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못하겠으면 길을 비켜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는 내용이 적힌 푯말을 세웠다. 이를 본 송상현은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비키기는 어렵다[戰死易假道難]”라는 글을 내걸었다. 이에 왜군이 동래성을 공격하자 동래성에 머물고 있던 군관민(軍官民)은 필사적으로 맞서 싸웠지만 4월 15일 끝내 성이 함락되었다. 송상현은 성이 함락되자 조복(朝服)으로 갈아입고 단정히 앉은 채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학문과 저술]
송상현의 저술로는 문집인 『천곡집(泉谷集)』 2권 1책이 전한다.
[묘소]
송상현의 묘소는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1-1에 있다.
[상훈과 추모]
송상현은 사망한 뒤 이조판서와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1610년(광해군 2)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상로18번길 44[수의동 178-1]에 있는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으며, 청주시 상당구 이정골로 115-8[용정동 120]에 있는 신항서원(莘巷書院),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345[안락동 421-33]에 있는 충렬사, 정읍시 흑암신흥길 62-7[흑암동 597]에 있는 정충사(旌忠祠)에도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