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6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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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仍傑 |
영어공식명칭 | Bak Inggeol |
이칭/별칭 | 여웅(汝雄),모은(慕隱),박종완(朴宗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용련 |
출생 시기/일시 | 167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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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45년 - 박잉걸 구절재 치도 |
활동 시기/일시 | 1748년 - 박잉걸 굴재 길 개설 |
몰년 시기/일시 | 1766년![]() |
추모 시기/일시 | 1986년 2월 - 모은 박잉걸 선생 기적비 건립 |
출생지 | 백암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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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박잉걸 묘소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수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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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자선가 |
성별 | 남성 |
본관 | 밀양 |
[정의]
조선 후기 정읍 출신의 자선가.
[가계]
박잉걸(朴仍傑)[1676~1766]의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여웅(汝雄), 호는 모은(慕隱)이다. 훗날 박종완(朴宗完)으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박만엽(朴萬葉)이다.
[활동 사항]
박잉걸은 1676년(숙종 2)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에서 태어났다. 1745년(영조 21) 험로인 구절재[구절치(九節峙)] 길을 닦아 사람들의 통행이 가능하게 하였고, 1747년부터 1748년까지 2년에 걸쳐 굴재[굴치(窟峙)] 길을 개설하였다. 또한 태인의 대각교(大脚橋)라는 다리를 건설하였다. 원래 태거교로 불렸던 대각교는 전라북도에서 전라남도를 지나는 교통의 요지 역할을 하였으나 여름철 홍수로 인하여 피해가 집중되는 불편이 있었다. 이에 박잉걸이 튼튼한 돌로 다리를 놓으니 홍수가 나도 안전하였다고 한다. 당시 태인현 아전들의 탐욕을 걱정하여 개인 소유의 많은 토지를 관아에 바치기도 하였다.
박잉걸은 매년 춘궁기가 되면 빈곤한 백성들을 위하여 집 대문을 열어젖혀 곡식을 나누어 주고 끼니를 해결하여 주었다. 특히 마을 아래 길가에 천막을 쳐 놓고 그 안에 의복과 신발을 걸어 놓은 뒤 가난한 사람이면 언제든 사용하게 하여 사람들이 걸치기[현 백암초등학교 부근]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부처님의 자비로 마을이 이롭기를 바라며 정읍시 칠보면 반곡리에 석탄사(石灘寺)를 중건하였으며, 마을 앞에 남근석을 세워 마을의 풍요와 자손이 번창하기를 빌기도 하였다. 박잉걸은 1766년 사망하였다.
[묘소]
박잉걸의 묘소는 정읍시 칠보면 수청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박잉걸의 공덕을 기리고자 마을에서 치도비, 수도비 등을 세우고 굴재 중턱 평마암에 송덕비를 세웠다. 박잉걸이 사망한 뒤 칠보면 백암리에 영당을 세워 영정을 봉안하였으나 세월이 지나 소실되었고, 1986년 2월 영당이 있던 자리에 모은 박잉걸 선생 기적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