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694
한자 金澤述
영어공식명칭 Gim Taeksul
이칭/별칭 종현(鍾賢),후창(後滄),창동처사(滄東處士)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류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4년연표보기 - 김택술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54년연표보기 - 김택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4년 - 김택술 창동서원 향사
출생지 창동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 지도보기
수학|강학지 천안 금곡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
수학|강학지 정읍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묘소|단소 김택술 묘소 -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소양면 명덕리
사당|배향지 창동서원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창골길 38-27[창동리 609-1]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남성
본관 부안

[정의]

일제 강점기 정읍 출신의 학자.

[가계]

김택술(金澤述)[1884~1954]의 본관은 부안(扶安)이며, 자는 종현(鍾賢)이며, 호는 후창(後滄)이다. 창동처사(滄東處士)라고도 불렸다. 증조할아버지는 김인성(金麟成)이고, 할아버지는 김석규(金錫圭)이다. 아버지는 김낙진(金洛進)이고, 어머니는 최석홍(崔錫洪)의 딸 전주 최씨(全州 崔氏)이다. 부인은 성주 이씨(星州 李氏)이고, 아들은 김형관(金炯觀)이다.

[활동 사항]

김택술은 1884년(고종 21)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부터 마을의 서당에서 글을 익혔으며, 커서는 천안 금곡[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에 거주하던 전우(田愚)[1841~1922]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낙요당(樂要堂)에서 후학을 양성하여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06년에는 정읍 태인[현 정읍시 태인면]에 있던 최익현(崔益鉉)의 의진을 방문하여 창의군(倡義軍)을 위로하고 전우의 서신을 전달하였다. 1915년 할머니와 어머니가 연이어 사망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여 ‘포로고행(圃老高行)’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효심 또한 깊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이후 1915년에 상사금(賞賜金)을 주면서 회유하자 김택술은 이를 거부하였으며, 일제가 맏아들을 일본 학교에 입학시키라고 강요하자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1925년에는 자신의 문집을 사후에 간행하지 말라는 스승 전우의 유지(遺旨)를 무시하고 동문인 오진영(吳震泳)이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문집을 발간하자, 다른 동문들과 함께 스승의 뜻을 저버리고 일제의 검열을 통해 문집을 발간한 오진영을 비판하였다. 이 일로 김택술은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전주검사국에 여러 차례 호출을 당하였고,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1930년 무렵에는 단발령과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아서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김택술은 왜적을 타도하여 복수할 기회를 엿본다는 뜻으로 불망실(不忘室)을 건립하여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스승 전우의 문집을 수정하여 다시 발간하였다. 김택술은 1954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택술의 저술로는 문집인 『후창집(後滄集)』이 있다. 『후창집』은 아들 김형관이 편찬하였으며, 2021년 한국학호남진흥원에서 국역본이 발간되었다.

[묘소]

김택술의 묘소는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소양면 명덕리 산수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4년 김택술의 제자들과 유림이 뜻을 모아 지금의 정읍시 이평면 창골길 38-27[창동리 609-1]에 창동서원(滄東書院)을 건립하여 향사하였다. 부안의 계양사(繼陽祠)에도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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