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708
한자 李東煥
이칭/별칭 도상(道常),향산(香山)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평사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순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1년 1월 9일연표보기 - 이동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1년 4월 - 이동환 한성강습소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22년 4월 - 이동환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등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26년 6월 10일 - 이동환 6·10만세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26년 6월 10일 - 이동환 서대문형무소 수감
활동 시기/일시 1926년 11월 3일 - 이동환 징역 2년 선고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27년 4월 1일 - 이동환 징역 1년 선고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27년 9월 20일 - 이동환 서대문형무소 출옥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이동환 신간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45년 9월 - 이동환 전북공립고등여학교[현 전주여자고등학교] 역사 강사 및 교사로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51년 - 이동환 전주공업고등학교 교감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53년 - 이동환 임실오수중학교 교장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68년연표보기 - 이동환 대통령 표창 수여
몰년 시기/일시 1982년 6월 23일연표보기 - 이동환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이동환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평사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평사리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중앙고등학교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창덕궁길 164]
활동지 전주여자고등학교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덕진구 모래내6길 14[인후동2가 35-1]
활동지 전주공업고등학교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덕진구 여산로 101[여의동 548-2]
활동지 임실동중학교 -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임실읍 봉황로 147[이도리 751]
활동지 오수중학교 -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오수면 충효로 2099-15[오수리 459-1]
활동지 고창중학교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창읍 보릿골로 35[덕산리 248]
활동지 마령중학교 -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마령면 임진로 2086[평지리 580-4]
활동지 칠보중학교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검단1길 53[와우리 711-1]지도보기
활동지 청웅중학교 -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청웅면 청웅로 131-7[구고리 251]
활동지 해리중학교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해리면 해리중앙로 120[하련리 245]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성격 독립운동|교육자
성별
대표 경력 6·10만세운동 주도자|해리중학교 교장

[정의]

일제 강점기 정읍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가계]

이동환(李東煥)[1901~1982]은 1901년 1월 9일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평사리 노은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도상(道常), 호는 향산(香山)이다. 아버지는 이기순(李起舜)이다.

[활동 사항]

이동환은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나, 21세 되던 해 신학문을 배우라는 친구의 말에 공감하여 서울로 올라가 신식 학교에 들어가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이하였다. 1921년 4월 말 백남규(白南奎)가 경영하던 한성강습소(漢城講習所)에 들어가 6개월 만에 보통학교 과정을 마치고, 1922년 4월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26년 4월 5학년에 진급하여 을반(乙班)의 반장이 되었다. 1926년 4월 26일 순종이 사망하자 일제는 27일 각급 학교와 관공서에 3일간의 휴업을 지시하였다. 이동환은 반 학생들을 교실에 모아 묵곡(默哭)을 하고, 학생 대표로서 전교생 800여 명을 인솔하고 돈화문 앞으로 가서 일본 경찰의 반대에도 3분간 외곡(外哭)을 하였다고 한다.

순종의 죽음은 3·1운동 이래 주권 회복을 바라던 다수의 학생들에게 독립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순종의 인산일[장례일]인 6월 10일을 기하여 일어난 만세 운동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朝鮮學生科學硏究會)와 공산당 계열 및 이동환 등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각각 별도로 주동한 것이었다.

이동환은 중앙고등보통학교 박용규(朴龍圭)와 함께 6·10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동교생 18명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1926년 11월 3일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검사의 공소로 1927년 4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체형 1년의 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으며, 1927년 9월 20일 만기 출옥하였다.

이후 이동환은 고향 정읍으로 돌아가 1927년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고 지부를 중심으로 야간농민학교를 설립하여 문맹퇴치와 농민들의 민족의식과 독립 정신 계발을 위하여 힘썼다. 1931년 신간회가 해소되었으며, 6·10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일본 경찰로부터 이른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 찍혀 감시당하는 처지에 있던 터라 결국 야간농민학교는 폐쇄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동환은 일본 도쿄에 있는 주오대학[中央大學]에 유학하여 법학을 전공하고 곧바로 귀국하였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어떤 직업도 갖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전북공립고등여학교[현 전주여자고등학교]에서 6년 동안 역사 강사 및 교사로 재직하였다. 당시 이동환은 학교 강의뿐만 아니라 신문 기고를 통하여 조선 왕조의 몰락 과정과 항일 독립운동에 힘쓴 애국지사들의 행적 등을 소개하였다. 1951년 전주공업고등학교 교감이 되었고, 임실동중학교 교감을 거쳐 1953년 오수중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후 1961년 9월 퇴직할 때까지 고창중학교, 마령중학교, 고현중학교[현 칠보중학교], 청웅중학교, 해리중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

[저술 및 작품]

이동환의 저서로는 『순종년기(純宗年紀)』, 『육십만세체험록(六十萬歲體驗錄)』, 『금석편람(金石片覽)』, 『일득록(一得錄)』, 『사고록(私稿錄)』, 『시득록(時得錄)』, 완성되지 않은 『잡록(雜錄)』 등이 있다.

[묘소]

이동환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동환의 공적을 기려 1968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평사리 886-1에 이동환 공적비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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