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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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永相 |
영어공식명칭 | Gim Yeongsang |
이칭/별칭 | 승여(昇如),춘우정(春雨亭),김승화(金昇和)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혜영 |
출생 시기/일시 | 183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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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김영상 최익현 의진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11년 5월 9일![]() |
추모 시기/일시 | 1945년 - 김영상 필양사 향사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추모 시기/일시 | 1978년 - 김영상 춘우정투수순절추모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출생지 | 산북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정우면 산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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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이주지 | 무성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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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지 | 정읍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성격 | 애국지사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 강점기 정읍 출신의 애국지사.
[가계]
김영상(金永相)[1836~1911]의 본관은 도강(道康)이며, 자는 승여(昇如), 호는 춘우정(春雨亭)이다. 다른 이름은 김승화(金昇和)이다. 아버지는 김경흠(金景欽)이다.
[활동 사항]
김영상은 1836년(헌종 2) 고부군 수금면 산북리[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정우면 산북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증조할아버지에게 학문을 익혔고, 장성한 뒤에는 홍직필(洪直弼)의 제자인 소휘면(蘇輝冕)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영상은 스승 소휘면의 뜻을 이어 외세와 타협하지 않고 국가를 위기에서 건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는 등 일제의 침략이 이어지자 김영상은 비상시에 먹을 약을 가지고 다니며 죽음에 대비하였고, 이후에는 은거하며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장의를 맡고 있던 1906년에 최익현(崔益鉉) 등이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손자 김균(金均)과 함께 참여하였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 강제 병합 후 일제가 지역의 원로들을 포섭하기 위하여 은사금을 교부하였는데, 김영상은 은사금을 받아가라는 안내장이 오자 대한의 선비가 일본인의 돈을 받았다는 문서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이름이 쓰인 문서를 찢어 버렸다고 한다. 1911년 4월 일제 헌병대장이 직접 찾아와서 은사금을 주겠다고 하였으나 거절하자 정읍 동곡(東谷)의 역참에 구금하였다. 이후 군산 감옥으로 이송되던 중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 신창나루에 도착하여 만경강을 건널 때 허리띠에 절명시(絶命詩)를 써 두고 물속에 투신하였다. 호송하던 헌병이 구하여 군산 감옥에 수감되었지만 김영상은 죽기로 작정하고 단식에 들어가 9일 만인 1911년 5월 9일 순국하였다.
[저술 및 작품]
김영상의 저술로는 1961년 간행된 『춘우정문고』 6권이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영상의 공적을 기려 1963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45년 정읍 지역의 유림이 지금의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14-10[무성리 311]에 필양사(泌陽祠)를 건립하여 김영상을 배향하였고, 1978년 6월 30일에는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에 김영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춘우정투수순절추모비(春雨亭投水殉節追慕碑)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