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948
한자 井邑 花海際遇-
분야 종교/신종교
유형 유적/터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북면 화해리 344-9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안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6년 - 화해제우지비 건립
소재지 정읍 화해제우터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북면 화해리 344-9 지도보기
성격 성지
관리자 화해교당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북면 화해리에 있는 원불교 성지.

[개설]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1891~1943]은 1891년 5월 5일 전라남도 영광에서 아버지 박성삼과 어머니 유정천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부터 자연현상과 인생에 대하여 특별한 의심을 품고, 스스로 도(道)에 발심하여 20여 년간 구도하여 1916년 4월 28일 큰 깨달음[大覺]을 이루었다. 원불교 초기 교단의 경제적 기초를 세운 2만 6000여 평[약 8만 5950㎡]의 정관평 방언공사(防堰工事), 인류 구원을 위한 기도로 법계의 인증을 받은 법인성사(法認聖事), 법신불 일원상을 신앙과 수행의 대상으로 삼아 교리를 제정한 봉래제법(蓬萊制法), 교화·교육·자선의 중심지인 익산 총부 건설 등 업적을 남겼다.

정산(鼎山) 송규(宋奎)[1900~1962]는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에서 아버지 송벽조와 어머니 이운외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1917년 전라도로 건너와 정읍 화해리에서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를 만나 제자가 되었다. 초기 교단의 구인 제자 중 한 명으로 교단 창립에 노력하였고, 1943년 박중빈이 열반하자 종법사가 되었다. 두 사람은 김해운의 집이었던 정읍 화해제우터에서 만나 형제의 결의를 맺었다고 한다.

[변천]

1917년 송규는 스승을 찾기 위하여 고향 성주를 떠나 전라도에 도착한 뒤 이름난 사찰과 도인을 찾아다녔다. 모악산 대원사에 잠깐 머물 때 정읍 북면 화해리 김해운의 청을 받아 김해운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후 1918년 별을 보고 김해운의 집이었던 정읍 화해제우터를 찾은 박중빈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박중빈과 송규가 만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정읍에 사는 김해운이 태을주(太乙呪) 치성차 모악산 대원사에 갔다가 송규를 만나 감복하여 ‘조선에 없는 만국양반’으로 받들며 화해리 마동 자신의 집에서 1918년 2월부터 8월까지 7개월 간 모시게 된다. 송규는 태을주 치성을 올릴 때 종종 이적을 보여 “경상도에서 온 송 아무개가 개안(開眼)하였다”라는 소문이 났다. 초여름 모내기를 앞두고 못자리 피살이가 한창일 무렵에 대종사 박중빈이 화해리에 찾아와서 송규를 만나 형제 결의를 하고 돌아간 후, 2개월 뒤 팔산 김광선이 와서 장맛비 속에 송규를 인도하여 영광군 길룡리에 갔다고 한다. 『불법연구회창건사』에는 박중빈과 송규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루는 김성섭(金成燮)[八山金光旋]을 부르시어 말씀하시었다. ‘정읍 땅에 경북 성주에서 온 송모라는 젊은이가 있거든 데리고 오라.’ 팔산이 명을 받들어 찾아가던 즉시로 송도군(宋道君)[鼎山]을 만나 대종사의 말씀을 전하였다. 도군 또한 숙연임을 크게 깨달아 말하기를 ‘나 역시 큰 원을 품고 수백 리를 정처 없이 왔으나 항시 마음에 무엇이 걸린 것만 같아 주소로 걱정하던 중 오늘에 불러 주시니 이제 영겁대사를 해결할 날이 왔습니다’ 하며 멀리 사배를 올리고 즉시로 동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집 주인[김해운]의 지극한 만류로 일시에 정의를 떼지 못하여 팔산과는 후약을 두고 갈리었다. 팔산이 돌아와 대종사께 그 사유를 고하니 대종사 미리 짐작하신 바 있으신 듯하였다. 2~3개월이 지나매 친히 팔산을 대동하시고 그곳을 찾아가 일숙하신 후 사제 겸 부자의 의를 맺으시고 말씀하시었다. ‘이 일이 우연한 일이랴. 숙겁 다생에 기약한 바 컸었느니라.’ 대종사 정산을 영광으로 데리고 오시어 중앙 위에 오르게 하시고 수기를 주시어 제반 사무를 대행케 하시므로 8명의 제자와 일반 대중은 19세의 연소한 분이나 장형같이 숭배하며 받들었다.”

원불교 교단에서는 1986년 화해리 마동 동구 회나무 아래 박중빈과 송규가 만난 것을 기념하여 김해운의 집터에서 50m 남짓 떨어진 마을 입구에 ‘화해제우지(花海際遇址)’ 비를 건립하고 기념하고 있다. 2000년(원기 85) 7월 6일 원불교수위단회[교단 내 최고 의결 기관]에서 교단 성적지를 확정하면서 화해제우지도 교단의 23곳 성적지 중 한 곳으로 지정하였다. 2018년 화해제우지 100주년을 기념하여 30평[99㎡] 규모의 ‘만남의 집’을 신축하였다.

[위치]

정읍 화해제우터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북면 화해리 344-9에 있다. 인접한 곳에 원불교 화해교당이 있다.

[현황]

정읍 화해제우터원불교 화해교당이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박중빈이 원불교의 창시자라면 송규는 원불교 창립기 여러 가지 제도적 기초를 세운 수립자라고 할 수 있다. 정읍 화해제우터원불교를 열어 가기 위한 두 사람의 역사적,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곳으로 종교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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