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1146 |
---|---|
한자 | 感雲亭 |
영어공식명칭 | Kamunjeong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583-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남해경 |
건립 시기/일시 | 1880년경 - 감운정 건립 |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20년경 - 감운정 중수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95년 - 감운정 시굴 조사[1995]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2004년 - 감운정 시굴 조사[2004]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2005년~2006년 - 감운정 발굴 조사 |
개축|증축 시기/일시 | 2008년 - 감운정 재건 |
현 소재지 | 감운정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583-1
![]() |
성격 | 누정 |
양식 | 목조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2칸 |
측면 칸수 | 2칸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에 있는 개항기 누정.
[개설]
감운정(感雲亭)은 1880년경 지역 선비들이 최치원을 사모하며 계를 결성하고 건립한 누정이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는 최치원이 첫 외직(外職)으로 부임한 지역이다. 최치원은 태산태수(泰山太守)로 재임 중 검단대사와 더불어 유상대(流觴臺)에서 시를 읊고 소요하였다고 전한다. 최치원이 풍류를 즐기던 유상대는 현재는 남아 있지 않으나 감운정 주변이라고 전한다.
[위치]
감운정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583-1번지 도로변에 있다.
[변천]
최치원은 신라 시대 태산태수를 지내면서 현재의 감운정 터에서 여러 벗들과 동진강에서 끌어온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면서 소요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유상곡수(流觴曲水)라 하고 앉았던 바위를 ‘유상대’라 하였다. 이후 유상대는 없어지고 1682년 현감 조상우(趙相愚)가 유상대비를 세웠는데 황폐해지자 1784년 현감 조항진(趙恒鎭)이 중수하였다. 1880년경 지역 유지들이 최치원을 기리기 위하여 유상대 터에 감운정을 건립하였다. 이후 1920년경 중수하였는데, 당시 사진이 1936년 편찬된 『정읍군지』에 수록되어 있다. 현재와 중수 당시 사진을 비교하여 보면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1995년과 2004년 시굴 조사를 한 결과 조선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석렬이 발견되어 2005~2006년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 조사 결과 동·남·북쪽 외각에서 석렬 구조를 확인하였다. 북쪽 석렬 구조 남쪽에서는 적심석으로 추정되는 유구를 발견하였지만 유상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조선 시대 조지겸(趙持兼), 조항진이 유상대에 정자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던 당시의 유물로 추정하였다. 1910년 채용신이 그린 「칠광도」에 개천 옆의 암반을 표시한 것이나 정언충의 시에 “상대에는 유상대가 있었고 지금은 감운정이 있다”라는 내용에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2005년 발굴 당시 감운정은 일시 해체하였다가 2008년 재건하였다.
[형태]
감운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건물로 평면은 누마루로 되어 있다. 구조는 낮은 기단 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운 다음 창방과 결구하고 있다. 가구는 3량집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 양식이다. 지붕 가구는 기둥 위에 대들보를 교차로 걸치고 연등천장으로 마감하였다. 처마를 받치기 위하여 4면에 활주가 세워져 있다. 기둥과 창방 사이에는 구조적 안정을 위하여 세모형의 보조재를 사용하였다. 주변에는 유상대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석재가 있다.
[현황]
감운정은 현재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의의와 평가]
감운정은 최치원과 유상대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누정으로 자연 풍광이 빼어난 장소에 있다. 감운정에 있었던 유상대는 인공적으로 만든 포석정과 달리 동진강 물을 끌어들여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