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 뒤풀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1261
이칭/별칭 「국문 뒷풀이」,「한글 뒤풀이」,「한글풀이」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민요와 무가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승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 시기/일시 1985년 4월 15일 - 「국문 뒤풀이」 서보익에게 채록
채록 시기/일시 1985년 4월 21일 - 「국문 뒤풀이」 이순덕에게 채록
채록 시기/일시 1985년 5월 12일 - 「국문 뒤풀이」 심임섭에게 채록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7년 4월 30일 - 「국문 뒤풀이」 『한국구비문학대계』5-5에 수록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7년 4월 30일 - 「국문 뒤풀이」 『한국구비문학대계』5-6에 수록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7년 4월 30일 - 「국문 뒤풀이」 『한국구비문학대계』5-7에 수록
채록지 태성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지도보기
채록지 정량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 지도보기
채록지 대흥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 지도보기
가창권역 정읍시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성격 유희요
박자 구조 4·4조 운율
가창자/시연자 서보익|이순덕|심임섭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에서 한글 자모를 노래로 풀어 부르는 유희요.

[개설]

「국문 뒤풀이」는 한글 자음과 모음을 결합한 ‘가갸거겨’를 첫 구절로 삼아 한글 자모의 순서에 따라 말을 만들어 엮어 나가며 부르는 유희요이다. 「한글 뒤풀이」 또는 「한글풀이」라고도 한다. 한글 자모로 풀어낸 사설은 가창자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정든 임이나 남편과 이별하고 이별한 이를 그리워하는 외로운 심사를 담고 있다. 정읍시에 전승되는 「국문 뒤풀이」 중에는 정읍에서 일어난 신흥 종교인 보천교(普天敎)와 관련된 것도 있다.

[채록/수집 상황]

「국문 뒤풀이」는 1985년 4월 15일 박순호, 김윤석, 김선례가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태성노인회관에서 서보익에게 채록하였고, 1987년 4월 30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간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5-6 전라북도 정주시·정읍군 편 2에 「국문 뒷풀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국문 뒤풀이」는 또한 1985년 4월 21일 박순호, 김윤석, 박현국이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에서 이순덕[여, 62세]에게 채록하였고, 『한국구비문학대계』 5-7 전라북도 정주시·정읍군 편 3에 「국문 뒷풀이」라는 제목으로 수록하였다. 「국문 뒤풀이」는 또한 1985년 5월 12일 박순호, 김윤석, 박현국이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에서 심임섭[남, 74세]에게 채록하였고, 『한국구비문학대계』 5-6 전라북도 정주시·정읍군 편 2에 「국문 뒷풀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한국구비문학대계 웹사이트에서 가사와 음원을 제공한다.

[구성 및 형식]

「국문 뒤풀이」는 4·4조 운율로 여러 가지 말을 엮어서 부른다. 통절 형식의 노래이며 혼자서 부르는데 흥겹고 경쾌한 부분도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애조를 띠고 있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결합한 언문표의 순서에 따라 말을 이어 가는 사설 전개에 중점을 둔다. 한글 자모를 결합한 첫 음절과 동일한 음절로 시작하는 구절을 만들어 붙이는 방식으로 사설을 엮어 나간다. 예컨대 ‘가갸거겨’로 시작한 구절에서는 ‘가’로 시작하여 “가이없는 이내 몸은 거리 없이도 되었구나”로, ‘아야어여’로 시작한 구절에서는 ‘아’로 시작하여 “아다담속 잡은 손목 인정 없이도 떨어진다”와 같이 사설을 이어 붙이는 식이다.

[내용]

1. 태인면 태성리 서보익이 가창한 「국문 뒤풀이」

가갸거겨 가나다라 마바사 자차카타 파하

기역니언 지귿리을 기역자로다 집을 짓고 지긋지긋이 사잤더니

가갸거겨허니 가이없는 이내 몸은 거리 없이도 되었구나

나냐너녀 낫을 갈아 지게 꽂고 첩첩산중을 들어가니 라도라도 전라도를 무얼 헐려고 내가 왔나

다쟈더져 다다담속 잡은 손목 인정 없이도 떨어진다

라랴러려 날개 돋히는 학이나 되면 구만리장천 높이 떠서 세상만사를 구경헐걸

바뱌버벼 밥을 먹어도 님의 생각

보뵤부뷰 보고지고 보고지고 우리 님만 보고지고

사샤서셔 사시 행차 떠난 길은 점심참도 늦어 간다

소쇼수슉허니 소슬단풍 찬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럭은 한양 성중에 가거들랑 이내 소식을 전코 가소

아야어여 아다담속 잡은 손목 인정없이도 떨어진다

오요우유 오마오마 오마더니 언제 다시 돌아올까

자쟈저져 자주종종 만난 님은 어이 그리도 못 오든고

차챠처쳑은 차곡차곡 길을 찾어 첩첩산중을 들어가니 처꾹새도 슬피 울어 이내 간장을 다 녹이네

타탸터텨허니 타도타도 월타도에 타관살이가 더욱 섧다

토툐투튜 토주지신이 감했든가 어이 그리도 못 오든가

파퍄퍼펴 파요파요 보고파요 우리만 보고파요

포표푸퓨 폭폭한 이내 마음 어느 누가 알어주리 아이고 답답해라

카캬커켜 카콕카콕 칼은 벗고 우리 낭군을 만나보세 어찌 아니가 좋을쏘냐

코쿄쿠큐 코끼리는 코가 길고 이내 몸은 옥중에 누웠으니 님에 생각이 발광이 난다 어찌 아니가 원통허냐

하햐허혀 하도낙서 천지 있게 하도낙서 깨달으니 우리 임을 만났으니

호효후휴 호의있게 만난 님을 정시럽게도 놀아 보자 얼씨구나 절씨구

마먀머며 맞아맞아 맞았드니 임 생각이 절로 난다

임을 멀리 떠나보낸 여인이 화자이다. 집을 짓고 같이 살자던 임이 멀리 떠나 돌아오지 않자, 임을 그리는 마음을 애절하게 표현하였다. 가창 과정에서 가창자의 착오로 ‘마먀머며’와 ‘카캬커켜’의 위치가 순서에서 어긋나 있다. 자모 결합의 순서가 일부 뒤바뀌었어도 사설 전개에는 무리가 없다.

2. 산외면 정량리 이순덕이 가창한 「국문 뒤풀이」

기역니은 지긋자로 집을 지어 지긋지긋 사잤더니 지그시를 말으시고

가갸거겨 가이없는 이내 신세 거이없이 되얐고나

나냐너녀 나귀 등에 소절하고 조선 팔도 유랑헐까

라랴러려 날아가는 춘금새는 나 놔두고 너나가냐

마먀머며 마나사친 우리 형제 언제 만나 면회 볼까

바뱌버벼 밥일라컨 지어 놓고 벗이 없어 못 먹겄네

사샤서셔 서울 가신 사돈님은 오실 줄도 바이없네

아야어여 아홉 식구도 많다는디 열한 식구를 보태란가

자쟈저져 자동차는 가자하고 거동을 핀디 정든 님은 못 가게 낙루를 허네

차챠처쳐 첫책일라컨 옆에 찌고 차창 밖으로 나서나 보세

카캬커켜 칼일라컨 옆에 차고 크게라컨 웃어 보세

파퍄퍼펴 퍼진 밥을 못다 먹고 고내장으 나는 가네

바버와워 과수 보고 약을 말소 나도 죽어 황천 가서 옥녀선녀 거나리고 마상에나 놀을라네



사설 전체 내용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집을 지어 살고자 하였으나 이를 이루지 못한 화자가 형제들과 헤어지고 임과도 이별한 데다 밥을 함께 먹을 벗조차 없는 외로운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이다. 전반적으로 이별, 부재, 유랑, 상실 등이 주된 정서이다. 가창자의 착오로 ‘다’, ‘타’, ‘하’로 시작하는 자모 조합이 누락되었으나 각 사설이 어느 정도 독립성을 띠기 때문에 사설 전개에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3. 입암면 대흥리 심임섭이 가창한 「국문 뒤풀이」

가갸거겨 가고 가는 세월 따라 거런저런 전진하믄

고교구규 고명하신 우리 성사 구전심수가 이 아닌가

나냐너녀 나의 할 일 무엇이면 너그러신 소인 말씀

노뇨누뉴 놀 때도 잊지 말고 누워서도 명심허소

다댜더뎌 더 나오게 보천교르

더디더디 지체 말고

도됴두듀 더 지체도 하지 말고 두말 말고 어서 오쇼

라랴러려 나의 할 일 무엇이면 너그러신 소인 말쌈

로료루류 놀 때도 잊지 말고 누워서도 잊지 말고

마먀머며 마음 놓고 잊지 말고 머무르세

바뱌버벼 바다같이 너른 들에 뿌리 넘은 초목덜은

사샤서셔 사시장천

아야어여 아이라고 멸시 말고 어른이라고 자신 말소

자쟈저져 자자행친 자쟈저져 자고나니

차챠처쳐 차차

파퍄퍼펴 파래같이 너른 들에 뿌리 넘은 초목덜은

하햐허혀 하해 같은 우리 성사 구전심수가 이 아닌가

정읍시에서 일어난 신흥 종교인 보천교와 관련된 내용이다. 보천교정읍시 입암면 대흥리를 중심으로 일어나 일제 강점기에 크게 번성하였다. 교인들에게 구전심수(口傳心授)하는 포교를 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우리성사 구전심수”가 바로 그 내용이다. 보천교가 정읍에서 발흥하고 번성하였던 영향으로 정읍에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국문 뒤풀이」는 한글을 전수하는 하나의 수단이었을 것이다. 노래의 형성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한글 자음과 모음을 결합하여 한글 교육에 활용된 언문표가 노래의 형성과 수용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현황]

신분제가 붕괴되고 신분과 성별의 차별 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한글은 근대의 주도적 문자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고 한글 학습자도 급증하였다. 문맹률이 매우 높은 수준이었던 해방 직후에도, 한글 교육이 정착된 1950년대 이후에도 「국문 뒤풀이」가 가창되었다. 문맹률이 급감하고 「국문 뒤풀이」로 한글을 익히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한글이 보편화된 시대가 되면서 노래의 전승도 거의 단절되었다. 그러나 「국문 뒤풀이」가 재외 동포의 한글 교육에 활용되는 사례를 간간이 찾아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국문 뒤풀이」는 한글 자모를 이용한 언어유희로 한글에 흥미를 주는 기능이 있는데, 결말로 갈수록 가창자의 심정을 더욱 진솔하게 드러내는 서정적 특성도 있다. 인접 장르인 잡가나 가사와 상호 교섭하면서 한글 유희요라는 독특한 노래 문학을 형성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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