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인의 문학 감성 저변을 살피다, 정읍의 고전 시가와 태인판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015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명표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에서 전승되는 고전 문학과 태인본.

[개설]

정읍은 한글로 전하는 유일한 백제 가요 「정읍사(井邑詞)」와 조선조 가사 문학의 효시인 「상춘곡(賞春曲)」이 생산될 정도로 유명한 문향이다. 「정읍사」는 한국 문학사에서 서정성의 근간인 한과 기다림의 정서로 표현되고 있다. 「상춘곡」은 유학자의 낙향에 담긴 정치성을 드러내면서 현실 비판적 정조로 이어져 오는 중이다. 또 정읍의 고전 문학은 고려 후기의 승려 백운(白雲) 경한(景閑)[1298~1374]으로부터 시작된 불교 문학이 한 축을 담당한다. 백운 경한의 선시는 백학명(白鶴鳴)[1867~1929]의 선시와 불교 가사로 계승되어 정읍 문학의 훌륭한 자산으로 남아 있다. 정읍에서는 무성서원(武城書院)용장사(龍藏寺)에서 각각 서적을 발간하고 있었고, 상업적 목적의 방각본(坊刻本)을 간행하였다. 태인방각본은 상업적 목적으로 간행된 도서답게 출판 시장의 형성과 근대 문학의 출현을 앞당겼다는 데 의의가 있다.

[「정읍사」, 한국적 서정의 시원]

「정읍사」는 한글로 된 가장 오래된 백제가요이다. 「정읍사」에는 행상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가 가창자로 등장한다. 「정읍사」의 아내는 신라 향가의 귀족들과 대조되어 고난 받고 희생하는 한국 여인상으로 정형화되었다. 「정읍사」의 기본 정서로 채택된 기다림과 한은 김소월(金素月)[1902~1934]로 계승되어 한국 서정시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문학사적 서정성의 남상(濫觴)이다. 「정읍사」는 조선 시대 궁궐에서 베풀어지는 연회에 빠짐없이 연주되는 곡이어서 음악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다음은 「정읍사」의 전문이다.

[전강(前腔)] ᄃᆞᆯ하 노피곰 도ᄃᆞ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후강(後腔)] 전(全)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ᄃᆡᄅᆞᆯ 드ᄃᆡ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과편(過篇)] 어느이다 노코시라

[금선조(金善調) 어긔야 내가논ᄃᆡ 졈그ᄅᆞᆯ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소엽(小葉)] 아으 다롱디리

불과 11행의 길이이지만 속은 차돌처럼 단단하다. ‘ㅇ’ 음이 자아내는 차분한 성조는 시어나 음성의 누수를 방지하여 시적 질서를 공고하게 유지시킨다. 정읍 사람들의 가슴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정읍사」의 율격 의식은 한국적 정서를 형상화하기에 최적이었다. 한국시의 고유한 여성 편향성과 여성적 정서가 「정읍사」의 율격을 계승함으로써 반복하여 출현하고 있다는 점은 한국 문학사의 기원을 알려 준다. 작품의 주제는 인간의 감수성이 드러낼 수 있는 정서적 스펙트럼을 확대하고 있어서 의미를 더한다. 「정읍사」의 주제는 흔히 백제 여인이 장사치 남편의 무사 귀가를 기도하는 애틋한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오르내린다. 한편에서는 행상하는 지아비가 도적에게 해를 당하거나 주색에 탐닉할 것을 우려하는 아내의 걱정이나 질투로 보기도 한다. 사실 사랑과 질투는 양면의 단면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정읍사」에서 양자는 여성의 섬세한 감성적 동선을 솔직하게 표백한 것이다.

[불교 문학의 전통]

정읍의 고전 문학에서 불교 문학은 한 축을 담당한다. 특히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었던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 공개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한 고부 출신의 백운화상(白雲和尙)[경한]은 누락되어서는 안 된다. 백운화상이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행장들을 남기지 않는 통에 사승이나 일대기 등이 자세하지 않지만 다행히 제자 석찬화상(釋璨和尙)이 1378년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 상하권을 간행하여 스승의 행장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대문호 이색(李穡)[1328~1396]이 서문에서 “슬프도다! 선비로서 같은 세대에 태어나서 서로 조우하지 못한 이가 한없이 많겠으나, 지금 백운화상에 있어서는 더욱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라고 애석함을 숨기지 않았고, “고려 조계 대선사 경한께서는 호가 백운이며 강남 하무산(霞霧山)의 석옥청공(石屋淸珙) 선사로부터 법을 전수받으셨다”라고 적어서 중국의 선풍이 백운화상에게 전수되었음을 안팎에 밝혔다.

인생칠십세(人生七十歲)[인생 70세는]

고래역희유(古來亦稀有)[고래로 드문 일이다]

칠십칠년래(七十七年來)[77년 살다가]

칠십칠년거(七十七年去)[77년에 가나니]

처처개귀로(處處皆歸路)[곳곳이 다 돌아갈 길이요]

두두시고향(頭頭是故鄕)[머리 두는 곳이 바로 고향이거늘]

하수리주즙(何須理舟楫)[어찌 나룻배를 몰아]

특지욕귀향(特地欲歸鄕)[특히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랴]

아자본무유(我自本無有)[내 몸은 본래 없으며]

심역무소주(心亦無所住)[마음 또한 머물 곳이 없나니]

작회산사방(作灰散四方)[재를 만들어 사방에 뿌리고]

물점단나지(勿占檀那地)[시주의 땅을 범하지 말라]

대덕(大德)의 임종게(臨終偈)답게 담담하다. 일생 동안 허명을 멀리하고 선승의 삶을 살다 가는 백운화상의 유언이라 할 만하다. 77세에 입적하는 노승이 남겨 둔 시향으로 사바가 그윽하여진다. 별로 어려운 구석이 없어서 막힘없이 읽히니 접근성도 뛰어나다. 마음이 본래 없는데 몸이라고 형상이 있을 리 없다. 그러니 하직하는 이가 제 모습을 감추어 달라고 부탁한다. 백운화상은 왕궐과 거리를 두고 명예를 탐하지 않은 고집쟁이 선승이었다. 나이 50이 넘어 진법을 구하고자 중국으로 건너가고, 배운 바를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고 제자들을 열심히 길러 내면서도 자신의 수행에 게을리하지 않았던 백운화상은 자신의 행적을 거두었다.

백운화상의 시에 담긴 선풍은 나라를 잃어버린 시기에 일본 불교화를 막고자 힘쓴 백학명에게로 이어졌다. 백학명내장사(內藏寺) 주지로 있는 동안에 여러 편의 가사를 썼다. 백학명의 가사는 『백농유고(白農遺稿)』에 필사본 「원적가(圓寂歌)」, 「해탈곡(解脫曲)」, 「참선곡(參禪曲)」, 「왕생가(往生歌)」, 「신년가(新年歌)」, 「망월가(望月歌)」, 「선원곡(禪園曲)」 등의 7편이 전하여진다. 백학명의 불교 가사는 상투적인 불교 가사와 달리, 간결하면서도 인상 깊은 표현으로 신앙심과 삶의 자세를 깨우치도록 창작되었다.

백학명은 일제가 환락장으로 타락시킨 내장사를 정화하고자 벽련선원(碧蓮禪院)을 신설하였다. 당시 벽련선원을 방문한 사람들마다 이상적 선원이라고 칭송하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백학명의 가사 창작은 포교를 목표로 하면서도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고자 불교를 혁신한 방책이었다. 더욱이 백학명의 포교는 가무까지 곁들여졌으니, 소년의 발달 단계까지 고려하여 창작한 줄 알 수 있다. 벽련선원에서 불렸던 「선원곡」은 166구에 이르는 긴 가사이다.

다음은 「선원곡」의 일부분이다.

方便비러 道에든者 古今天下 멧멧인가[방편비러 도에든자 고금천하 멧멧인가]

時機따라 ᄯᅩ變하니 鶴鳴手中 農器로다[시기따라 또 변하니 학명수중 농기로다]

야야우리 農夫님네 農夫되기 ᄭᅡ닭업다[야야우리 농부님네 농부되기 까닭업다]

高樓巨閣 閒逸터니 田中勞力 왼일인가[고루거각 한일터니 전중노력 왼일인가]

俗風따라 農業하니 外道知見 이안인가[속풍따라 농업하니 외도지견 이안인가]

야야우리 스승님네 僧侶되기 ᄭᅡ닭업다[야야우리 스승님네 승려되기 까닭업다]

終日토록 閒談하고 밤새도록 잠자기네[종일토록 한담하고 밤새도록 잠자기네]

才操적이 잇다하나 佛法信心 全혀업고[재조적이 잇다하나 불법신심 전혀업고]

四敎大敎 맛처스나 佛法知見 茫然하네[사교대교 맛처스나 불법지견 망연하네]

新式文學 갈처스나 山鷄野鶩 되고만다[신식문학 갈처스나 산계야목 되고만다]

아하우리 農夫님네 밋친이내 말삼듯소[아하우리 농부님네 밋친이내 말삼듯소]

佛祖巢窟 처부수고 寺刹廢風 改良하세[불조소굴 쳐부수고 사찰폐풍 개량하세]

勞働하고 運動하니 身軆따라 健康하다[노동하고 운동하니 신체따라 건강하다]

精中工夫 그만두고 鬧中工夫 하여보세[정중공부 그만두고 요중공부 하여보세]

백학명이 지향하는 불교 개혁 운동의 방향과 반농반선(半農半禪) 운동의 의미를 금세 간취할 수 있다. 백학명은 ‘고루거각’에 머무는 선가의 폐풍을 힐난하고 ‘전중노력’을 권유한다. 가사는 철저히 4·4조를 준수하며 나아간다. 엄격한 4·4조 형식은 근대의 애국 가사들에서도 나타난다. 조선조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가사가 연면한 생명력을 과시하면서 근대까지 내려온 것이다. 백학명의 가사는 이를 입증하는 문학사적 사료의 가치를 갖는다. 백학명의 가사에 담긴 견고한 형식은 가사의 강인한 성격을 내외에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상춘곡」, 가사 문학의 효시]

정읍의 유가 문학은 887년(정강왕 1) 태산태수로 부임한 최치원(崔致遠)[857~?]에서 비롯되었다. 최치원은 태인의 피향정(披香亭) 주위에 가득한 연당에서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겼다. 포석정처럼 술잔을 돌리며 시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시설을 갖춘 정읍 피향정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89호로 지정된 호남 제일의 정자이다[정읍 피향정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보물로 변경되었다]. 조선 시대 하연지(下蓮池)를 추가로 조성하여 최치원의 문덕을 기렸다는 피향정의 정취에 취한 묵객들은 다수의 시편을 남겼다

최치원은 정읍 문학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고, 그의 문학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 정극인(丁克仁)[1401~1481]이 창작한 「상춘곡」으로 개화되었다. 「상춘곡」은 한국 문학사에서 가사 문학의 효시로 손꼽힌다. 정극인은 처가가 있는 칠보면 무성리 무성서원 앞 남전마을에 정착하고, 당호를 ‘불우헌(不憂軒)’이라고 이름하였다. 정극인은 한국 최초의 향약인 태인 고현동 향약을 제정하고, 주민들의 풍속 교화에 힘썼다. 정극인「상춘곡」에서 낙향을 선택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한편, 당쟁에 골몰하는 조정의 벼슬아치들을 힐난하며 성은을 기대하였다. 정극인이 교육에 전력한 공로로 성은을 입자마자 「불우헌가(不憂軒歌)」를 상신한 것을 보노라면, 「상춘곡」이 유학자의 문학에 함의되어 있는 전형적인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상춘곡」에 담긴 비판 의식은 정읍 문학사에서 현실 비판적 성향의 표출로 승인되었다.

紅塵(홍진)에뭇친분네이내生涯(생애)엇더ᄒᆞᆫ고녯사ᄅᆞᆷ風流(풍류)ᄅᆞᆯ미ᄎᆞᆯ가ᄆᆞᆺ미ᄎᆞᆯ가天地間(천지간)男子(남자)몸이날만ᄒᆞᆫ이하건마ᄂᆞᆫ山林(산림)에뭇쳐이셔至樂(지락)을ᄆᆞᄅᆞᆯ것가數間茅屋(수간모옥)을碧溪水(벽계수)앏픠두고松竹(송죽)鬱鬱裏(울울리)에風月主人(풍월주인)되여셔라엇그제겨을지나새봄이도라오니桃花杏花(도화행화)ᄂᆞᆫ夕陽裏(석양리)예픠여잇고綠楊芳草(녹양방초)ᄂᆞᆫ細雨中(세우중)에프르도다칼로ᄆᆞᆯ아낸가붓으로그려낸가造化神功(조화신공)이物物(물물)마다헌ᄉᆞ롭다수풀에우ᄂᆞᆫ새ᄂᆞᆫ春氣(춘기)ᄅᆞᆯᄆᆞᆺ내계워소ᄅᆡ마다嬌態(교태)로다物我一體(물아일체)어니興(흥)이ᄋᆡ다ᄅᆞᆯ소냐柴扉(시비)예거러보고亭子(정자)에안자보니逍遙吟詠(소요음영)하야山日(산일)이寂寂(적적)ᄒᆞᆫᄃᆡ閒中眞味(한중진미)ᄅᆞᆯ알니업시호재로다이바니웃드라山水(산수)구경가쟈스라踏靑(답청)으란오늘ᄒᆞ고浴沂(욕기)란來日(내일)ᄒᆞ새아ᄎᆞᆷ에採山(채산)ᄒᆞ고나조ᄒᆡ釣水(조수)ᄒᆞ새ᄀᆞᆺ괴여닉은술을葛巾(갈건)으로밧타노코곳나모가지것거수노코먹으리라和風(화풍)이건ᄃᆞᆺ부러綠水(녹수)ᄅᆞᆯ건너오니淸香(청향)은잔에지고落紅(낙홍)은옷새진다樽中(준중)이뷔엿거ᄃᆞᆫ날ᄃᆞ려알외여라小童(소동)아ᄒᆡᄃᆞ려酒家(주가)에술을믈어얼운은막대집고아ᄒᆡᄃᆞᆫ술을메고微吟緩步(미음완보)ᄒᆞ야시냇ᄀᆞ의혼자안자明沙(명사)조흔물에잔시어부어들고淸流(청류)ᄅᆞᆯ굽어보니ᄯᅥ오ᄂᆞ니桃花(도화)ㅣ로다武陵(무릉)이갓갑도다져ᄆᆡ이긘거인고松間細路(송간세로)에杜鵑花(두견화)ᄅᆞᆯ부처들고峰頭(봉두)에급피올나그름소긔안자보니千村萬落(천촌만락)이곳곳이버러잇ᄂᆡ煙霞日輝(연하일휘)ᄂᆞᆫ錦繡(금수)ᄅᆞᆯ재폇ᄂᆞᆫᄃᆞᆺ엇그제검은들이봄빗도有餘(유여)ᄒᆞᆯ샤功名(공명)도날ᄭᅴ우고富貴(부귀)도날ᄭᅴ우니淸風明月(청풍명월)外(외)예엇던벗이잇ᄉᆞ올고簞瓢陋巷(단표누항)에흣튼혜음아니ᄒᆞᄂᆡ아모타百年行樂(백년행락)이이만ᄒᆞᆫᄃᆞᆯ엇지ᄒᆞ리

「상춘곡」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학자의 비판 의식이 엿보인다. 스스로 지은 당호 ‘불우헌’에서 추량할 수 있듯이, 정극인은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한 사건이 일어나자 조정을 떠나 처가로 내려와서 근심거리를 없애고 싶었다. 그런 까닭에 「상춘곡」의 밑바탕에 조정의 신료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내비치고 있다. 정극인은 처음부터 ‘紅塵(홍진)에뭇친분네’에게 ‘이내生涯(생애)엇더ᄒᆞᆫ고’를 묻는다. 자신의 삶이 관리들의 것보다 낫지 않느냐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럴수록 정극인의 처지는 초야에 묻혀서 학문에 정진하는 은사로 자리매김이 되고, 공자(孔子)가 『논어(論語)』에서 천명한 ‘단표누항(簞瓢陋巷)’의 삶을 실천하는 안회(顔回)가 된다. 정극인은 은사로 소요한 게 아니라, 한국 최초의 향약 태인 고현동 향약을 지어서 마을 풍속의 교화에 솔선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정극인의 비판 의식은 정읍 작가들에게 내면화되어 계승되고 있다. 정극인이 개시한 「상춘곡」이나 「불우헌곡」 등의 한문학은 대일 항쟁기에도 열린 시회(詩會)에서 되살아났다.

정극인의 가사 문학은 소고당(紹古堂) 고단(高端)[1922~2009]의 규방 가사로 이어졌다. 고단정읍시 산외면에 살면서 다수의 규방 가사를 창작하였다. 고단의 가사는 살림을 책임지면서 겪는 다양한 가정사, 반가의 규수로서 시국을 응시하며 느낀 감흥, 국내외를 여행하며 지은 여행 가사 등이 여성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그려졌다고 평가된다. 고단은 1991년 발행한 『소고당 가사집』 등의 가사집에 그동안 창작한 가사를 집성하였다.

[태인본, 방각본의 선구]

조선 시대에는 서책의 발간을 조정에서 관리하였다. 조정은 지식의 통제로 국가 질서의 유지를 기도하며 서책의 발간 계획부터 폐기 과정까지 꼼꼼히 관리하였다. 그러나 조정이 주관하는 관판본(官版本)은 지식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다. 더욱이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으면서 조정의 권위와 유학자들의 체통은 예전보다 약하여지고, 신분제가 흔들리면서 평민들의 요구와 함께 사간본(私刊本)의 수요가 늘어났다. 상업적 이익을 표방한 방각본이 출현하게 된 배경이다.

정읍에서는 서책 발간이 네 갈래로 이루어졌다. 첫째, 조정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무성서원에서 발간하였다. 1696년에 사액된 무성서원에는 잡역을 담당하는 30여 명의 원생들이 있었다. 원생들의 노동력이 무성서원판 서책의 간행에 동원되었다. 무성서원에서 발간하는 서책은 근본적으로 유학과 관련된 것이다.

둘째, 산내면용장사에서 발간한 사찰본이다. 용장사는 1635년 14종의 불경을 간행하며 정읍 지역의 불경 인쇄를 담당하였다. 용장사의 인쇄 기술은 훗날 태인본을 낳은 원천 기술이었고, 사찰 뒤에 우거진 닥나무는 태인본의 원료로 제공되었다.

셋째, 태인방각본이다. 흔히 말하는 태인본이다. 방각본은 발행지에 따라 태인방각본, 경판방각본, 완판방각본, 달성방각본, 안성방각본 등으로 불렸다. 가장 빨리 발간된 태인방각본은 여러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하나는 다른 방각본보다 태인본의 간기(刊記)가 비교적 뚜렷하다는 점이다. 현존하는 태인본이 전이채(田以采), 박치유(朴致維)처럼 이름이 분명한 이들에 의하여 주도된 까닭이다. 대략 17세기 후반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태인본은 두 사람에 의하여 『상설고문진보대전(詳說古文眞寶大全)』, 『사요취선(史要聚選)』, 『사문유취(事文類聚)』, 『명심보감(明心寶鑑)』, 『농가집성(農家集成)』, 『신간구황촬요(新刊救荒撮要)』, 『효경대의(孝經大義)』, 『공자가어(孔子家語)』 등 14종 내외가 간행되었다. 간행 목록을 보면 태인에서는 유교 서적 외에 농업이나 빈민 구휼과 관련된 서책들도 간행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인방각본에서 사용된 목판은 전주 등지로 옮겨 재발간되기도 하였다. 태인본이 방각본의 확산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전주에서 유명하였던 서계서포(西溪書舖)나 다가서포(多佳書鋪), 칠서방(七書房) 등은 방각본의 유통에 앞장섰던 서점들이다. 태인에는 1910년까지 송재동이 운영하는 보명서관이 있어 방각본과 신간 도서를 판매하였다. 이처럼 태인방각본은 오래된 역사와 선구적 역할을 수행한 귀중본이다. 지금은 정읍 무성서원 앞에 태인 방각본 전시관이 있다.

[마무리]

정읍 문학은 한국 문학사의 근원이자 수원지이다. 백제가요 「정읍사」는 시조의 뿌리이면서, 한국 시의 고유한 3·4조 율격이 시작된 노래이다. 아울러 「정읍사」의 정서는 한국인들이 두루 간직하고 있는 기다림과 한이다. 조선 시대 가사 문학의 효시인 「상춘곡」「정읍사」의 율격의식을 계승하였고, 남녀와 반상을 초월하여 한국인에게 내재되어 있는 정서를 예증한다. 또 최치원으로부터 비롯된 태인 시회는 한국 시회의 원조에 가까우며, 태인본의 발간과 함께 정읍 지역의 문학적 전통이 오래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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