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에 깃든 문학, 무성서원 배향 문인들의 문학 세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016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무성리 500]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영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재지 정읍 무성서원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무성리 500]지도보기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무성서원에 배향된 문인들의 문학 세계.

[개설]

1968년 12월 19일 사적으로 지정된 정읍 무성서원(井邑 武城書院)은 17세기 말 숙종(肅宗)에게 ‘무성(武城)’이라는 사액을 받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아 정읍뿐만 아니라 전라도를 대표하는 교육과 문학, 사상 및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이 되었다. ‘무성’은 신라 때 서원이 있던 정읍 지역 고을의 이름이면서 공자(孔子)의 제자 자유(子遊)가 다스렸다는 고을 이름이기도 하다. 정읍 무성서원에 일곱 명의 선현을 배향하고 있는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1491~1554], 정극인(丁克仁)[1401~1481], 송세림(宋世琳)[1479~?], 정언충(鄭彦忠)[1491~1557], 김약묵(金若默)[1500~1558], 김관(金灌)[1575~1635] 등이다. 최치원신잠은 정읍 지역에서 수령을 지낸 외지인이고, 1630년에 추가 배향된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은 모두 정읍 지역 출신의 선비, 즉 향현(鄕賢)들이다.

보통 서원의 제향 인물은 지역 사회 강학 활동과 성리학 연구를 중심으로 선정하는 것과 달리 정읍 무성서원의 제향 인물들은 모두 15~17세기 태인을 연고지로 하여 ‘지역의 유교적 향촌 문화’를 보여 주었던 선비들이었다. 1696년 전라도 내 유생 202명이 서원의 사액을 청한 것도 향촌 문화에 이바지한 공헌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정읍 무성서원을 품은 고문(古文)의 원류, 고운 최치원]

최치원은 잘 알려진 것처럼 신분제가 확고하였던 통일 신라 후기 육두품(六頭品)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문명을 떨쳤던 인물이다. 특히 황소(黃巢)의 난[875~884]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이름을 높였다. 당나라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최치원은 귀국 후 887년(정강왕 1)에 태산[지금의 정읍 지역] 태수로 와서 8년간 군수로 선정을 베풀었다. 최치원이 떠나자 최치원의 인품과 선정을 기리고자 지역민들이 고려 시대 때 태산사(台山祠)를 건립하여 최치원을 추모하였다. 이후 태산사는 신잠의 사당과 합하여져 지금의 정읍 무성서원의 바탕이 되었다.

최치원은 강수(强首)[?~692], 설총(薛聰)과 함께 신라 3대 문장가로 알려져 있으며, 한국 한문학사에서 고문의 근원을 최치원에서 찾고 있기도 하다. 최치원은 시문을 비롯하여 비명·승전·결사 발원문 등의 불교 관련 저술, 외교 문서, 연표, 시부 등의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특히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은 현전하는 한국 최고(最古)의 문집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최치원의 저술은 시부와 『계원필경집』에 실린 일부의 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저술이 국왕이나 상관을 대신하여 작성한 것이었다.

『계원필경집』은 당나라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있던 4년 동안에 지은 1만여 수의 시문을 귀국 후 골라 20권으로 편찬한 저작이다. 『계원필경집』은 886년 1월에 헌강왕에게 진상한 뒤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조선 시대 홍석주(洪奭周)[1774~1842]와 서유구(徐有榘)[1764~1845]는 서문에서 “우리 동방에서 뛰어난 문장력으로 저술을 하여 후세에 전한 사람은 고운 최공이 처음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동문선(東文選)』에도 『계원필경집』의 일부가 전한다. 1478년(성종 9)에 대제학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왕명을 받아 노사신(盧思愼)[1427~1498]·강희맹(姜希孟)[1424~1483]·양성지(梁誠之)[1415~1482] 등 당대의 문인들과 『동문선』을 편찬하면서 최치원의 저술로 시 26수, 각종 글 169편 등 무려 195편을 실었다. 『계원필경집』뿐만 아니라 고려 말까지 전하여진 최치원의 또 다른 저술을 수록한 것이다.

『동문선』에도 수록된 최치원의 두 편의 한시는 다음과 같다.

「추야우중(秋夜雨中)」[가을밤 비는 내리고]

추풍유고음(秋風唯苦吟)[가을 바람에 오직 괴로이 읊을 뿐]

세로소지음(世路少知音)[세상에는 나를 알아주는 이 적구나]

창외삼경우(窓外三更雨)[깊은 밤 창밖에는 비 내리는데]

등전만리심(燈前萬里心)[등불 앞의 이내 맘은 만 리 먼길 달려가네]

이수광(李睟光)[1563~1628]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추야우중」을 최치원의 시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이라 하였고, 허균(許筠)[1569~1618] 역시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가장 빼어난 시라고 하였다.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가야산의 독서당에 쓰다]

광분첩석후중만(狂奔疊石吼重巒)[첩첩이 쌓인 바위 사이로 미친 듯이 내달려 겹겹이 들어선 산봉우리를 울리니]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사람들 말소리를 지척 간에서도 구분하기 어려워라]

상공시비성도이(常恐是非聲到耳)[항상 남들의 시시비비 소리가 귀에 들릴까 두려워하여]

고교류수진롱산(故敎流水盡籠山)[일부러 흐르는 물로 하여금 온 산을 둘러싸게 하였네]

최치원은 신라에서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가야산(伽倻山)에 은거한 후 종적을 감추었다. 최치원의 전기에는 최치원의 마지막에 대하여 ‘부지소종(不知所終)’, 즉 ‘마친 바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여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 미상으로 처리하고 있다.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최치원의 불우함, 그리고 정확한 사망 연도의 미상, 거기에 최치원의 명문장가적인 입지가 덧붙여져서 전국에는 많은 최치원 설화들이 만들어져 구전되고 있다. 때로는 천재적인 문인의 모습으로, 때로는 선정을 베푸는 목민관의 모습으로, 때로는 신선의 모습으로, 『수이전(殊異傳)』의 최치원에서는 전기(傳奇)의 주인공으로, 「최고운전(崔孤雲傳)」에서는 영웅적 인물로 전승되기도 한다. 민간에서는 최치원이 가야산에 은거하다가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최치원의 영정을 애초에 신선풍으로 제작하게 된 데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해석된다[이후 점차 문인풍으로 변화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의 「쌍묘분 전설」은 정읍 지역 신라 화랑들의 장송가 무속 신앙이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천재 문인, 목민관, 신선, 전기의 주인공, 영웅 등 다양한 호명을 가진 최치원무성서원에 배향됨으로써 무성서원은 더 이상 유학자들만의 성리학적 논리 터가 아니다. 최치원을 품음으로써 고문(古文)의 원류이며 갖은 설화와 심지어 무속 신앙의 주인공인 최치원의 상징성이 더하여져 정읍 무성서원은 정읍 문화의 상징성을 품게 된 것이다.

[영천자 신잠과 무성서원]

신잠은 신숙주(申叔舟)[1417~1475]의 증손자이며, 예조참판 신종호(申從濩)[1456~1497]의 아들로 시서화에 능하다. 신잠은 1519년(중종 14)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실시한 현량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검열 등의 관직을 지냈다. 하지만 1521년(중종 16) 안처겸(安處謙)[1486~1521]의 옥사에 연루되어 전라남도 장흥에 유배되어 17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이때 묵죽(墨竹)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으로 전한다.

신잠은 1543년(중종 38)에 다시 등용되어 정읍 태인현감으로 부임하는데, 1548년까지 약 6년간 태인현감으로 재직하였다. 당시 전국에 큰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닥쳤는데, 실록에 의하면 신잠은 어려움에 처한 태인현의 백성들을 잘 구휼하였다. 태인현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다른 백성들까지 구제하여 품계가 올랐다.

신잠은 시서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렸으며 특히 묵죽과 포도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저서에 『영천집(靈川集)』, 그림에 「운중기로도(雪中騎驢圖)」 등이 있다. 신잠의 시는 유배지에서 지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신잠의 시 세계는 주로 세 갈래의 주제 양상을 보인다. 첫째, 쓸쓸한 유배 생활에서 느끼는 비감과 혈육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읊은 시, 둘째, 산중의 일상사를 읊으며 감회를 서술한 시, 셋째, 영락하는 노년기에 인생 회고와 은거의 뜻을 표현한 시 등으로 대별된다.

신잠의 차운시 한 편을 살펴보자.

지벽환여소은거(地僻還如小隱居)[땅이 궁벽하여 도리어 아담한 은거지 같으니]

좌래심사자소소(坐來心事自蕭疎)[앉아 보매 마음이 절로 한가롭네]

정전송노응서학(庭前松老應棲鶴)[뜰 앞에 소나무 늙었으니 응당 학이 깃들 것이요]

함외지청합양어(檻外池淸合養魚)[난간 밖에 못이 맑으니 물고기 기르기에 적합하네]

퇴식기회문회우(退食幾回文會友)[공무에서 물러와서는 몇 번이나 글로써 벗을 모았던고]

분향갱희야관서(焚香更喜夜觀書)[향을 태우고서 다시 밤에 책 보는 것이 기쁘네]

간군정리공부득(看君靜裏功夫得)[그대의 고요한 가운데서 터득한 공부를 보니]

방촌무진수월허(方寸無塵水月虛)[마음에 티끌 없어 수면에 비친 달처럼 비어 있네]

“창산 부원군(昌山 府院君) 성희안(成希顔)의 살던 집이 남산 아래 있는데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었다. 가정 신축년에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가 세를 얻어 살았다.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이 방문하자 규암이 시를 지어 사례하였더니 일시의 문인들이 많이 차운하여 큰 책이 되었다.”

『동각잡기(東閣雜記)』에 있는 기록이다. 이때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1491~1570],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1484~1555],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 임형수(林亨秀)[1514~1547], 임억령(林億齡)[1496~1568], 박충원(朴忠元)[1507~1581] 등 당대의 쟁쟁한 문인들의 시와 함께 위의 신잠의 한시가 실려 전한다. 가정 신축년이면 1541년으로 신잠이 장흥 유배지에서 돌아와 서울 아차산 아래에 살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잠은 ‘거(居), 소(疎), 어(魚), 서(書), 허(虛)’의 운자를 써서 사는 곳의 그윽함과 거기에 사는 인물의 깊은 정취를 동시에 보여 주는 작품을 완성하였다.

태인 지역에서 신잠에 대한 추승은 최치원에 버금간다. 지역민들은 스스로 신잠에 대한 선정비를 세우고 생사당에 모셨으며 무성서원신잠을 배향하였다. 무성서원의 배향 인물 중 최치원을 제외하면 신잠이 유일한 외지인이라는 점에서 신잠에 대한 추승의 정도를 증거할 수 있다. 신잠이 이렇게 지역민의 추승을 받게 된 데에는 목민관으로서 구휼과 선정에 힘을 썼을 뿐만 아니라 태인 지역의 교육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잠은 많은 서당을 세워 정읍 태인 지역의 교육에 힘썼다. 결국 신잠의 이런 노력이 무성서원을 세울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1696년 예조에서 무성서원을 사액할 것을 올린 계목 가운데 “신잠이 학문을 흥기시키고 인재를 육성하여 우뚝하게 유교의 교화가 있었던 것은 오늘날까지도 고을 사람들에게 그 은덕이 미치고 있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통하여 신잠이 태인의 학문 진흥, 무성서원의 성립 등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태인현읍지』「선생안」에서도 신잠부터 기재되어 있는데, 신잠이 지역민에게 미친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정읍의 향촌 문화, 정극인·송세림과 향현들]

1. 상춘의 향기

정극인은 세종(世宗) 대 상소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뒤 처가가 있는 정읍 태인의 고현내(古縣內)에 내려와 불우헌(不憂軒)을 짓고 은거하였다. 단종(端宗) 대 관직에 나아갔다가 세조(世祖)가 왕위를 찬탈하자 사직하고 태인으로 돌아와 지금의 무성서원 자리에 서당인 ‘향학당(鄕學堂)’을 짓고 고을의 자제들을 가르치며 지냈다. 향악당은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는 무성서원의 바탕이 되었다.

정극인은 강학 활동과 함께 지역민들과 함께 조선 시대 최초의 향약(鄕約)이라 할 수 있는 태인 고현동 향약(泰仁 古縣洞 鄕約)[보물]을 시행하였다. 또 고을 선비들이 모여 학덕과 연륜이 높은 사람을 주빈으로 모시고 술을 마시며 잔치를 벌이는 의례인 향음주례를 거행하여 태인 지역을 유교적 공동체로 교화하는 데 힘쓰기도 하였다.

정극인『불우헌집(不憂軒集)』을 남겼는데 권2 가곡 편에 가사 「상춘곡(賞春曲)」과 단가 「불우헌가」, 경기체가 「불우헌곡」이 실려 있다. 국문학사에서 「상춘곡」의 가치와 의미는 충분히 알려져 있다.

「상춘곡」의 구절을 음미하여 보자.

[전략]

몇 칸 초가를 푸른 시내 앞에 지어 놓고[數間茅屋을 碧溪水 앏픠두고]

송죽이 우거진 속에 풍월주인 되었도다[松竹鬱鬱裏예 風月主人 되여셔라]

[중략]

복사꽃 살구꽃은 석양 속에 피어 있고[桃花杏花 夕陽裏예 퓌여잇고]

푸른 버들 꽃다운 풀은 가랑비에 푸르도다[綠楊芳草 細雨中에프르도다]

칼로 재단하여 내었는가 붓으로 그려 내었는가[칼로아낸가 붓으로그려낸가]

[중략]

한가한 속에 진미를 아는 이 없이 혼자로다[閒中眞味 알니업시호재로다]

여보게 이웃 사람들아 산수 구경 가자꾸나[이바니웃드라 山水구경가쟈스라]

답청은 오늘 하고 욕기는 내일 하세[踏靑으란오고 浴沂란來日새]

아침에 산나물 캐고 저녁에 낚시질하세[아에採山고 나조釣水새]

[중략]

공명도 나를 꺼리고 부귀도 나를 꺼리니[功名도날우고 富貴도날우니]

청풍과 명월 외에 어떤 벗이 있을까[淸風明月外예 엇던벗이잇올고]

[중략]

아무튼 한평생 즐거움이 이만한들 어떠하리[아모타百年行樂어이만엇지리]

「상춘곡」의 시상에 따라가 보면, 화자는 몇 칸 초옥을 시냇가에 지어 놓고 송죽 우거지 그곳의 풍월주인이 된다. 때는 복사꽃,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푸른 버들이 싱그럽게 흩날리는 봄이다. 봄날의 아름다움은 붓으로 그린 듯, 칼로 재단해 놓은 듯 형용하기 어려운데 그 맛과 정취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에 화자는 자신에게는 공명도 부귀도 없지만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벗삼아 산수 구경하고 답청하고 산나물 캐고 낚시하는 한평생이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자족하고 있다. 비유와 대우를 통한 표현 기교와 풍류미가 일품인 작품으로 무성서원이 상춘의 자족미를 갖추게 되는 순간이다.

2. 패설의 웃음

한편 정극인의 영향을 받았다는 송세림은 홍문관교리에 이르렀고 당대 문명을 떨쳤으며 그림과 글씨에 모두 뛰어난 인물이었다. 송세림은 조선 중기 재지사족(在地士族)의 전형적인 인물이며 성리학적 사유를 당당하게 주장하고 실천한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적극적으로 교육에 힘썼고 향촌을 중심으로 한 지역 공동체를 이끈 유학자로서 후세의 교육을 담당한 사표(師表)로서의 삶을 영위하였으며, 풍류와 멋을 즐기는 처사형 선비였다. 즉, 송세림은 정읍 향촌 사회의 명망 있는 유학자이자 선비, 스승이었다.

무엇보다 국문학사에서 주목하는 것은 송세림의 저서 『어면순(御眠楯)』이다. 송세림『어면순』은 성(性) 소화담(笑話談)이 주를 이루는 작품으로 필기(筆記)와 구별되는 전형적인 패설(稗說)이다. 패설은 필기의 저술 대상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민간의 사유와 풍속이 포섭된 것이다. 「정읍사」에서 시작되는 풍류와 멋을 내재한 송세림은 태인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지역의 민간 풍속과 정읍민들의 삶을 기록하여 두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견문을 기록하는 잡기류 전통에 패설이 출현하며 문학적 상상력이 확대되게 된다. 필기가 기록 정신에 근거한 사실의 영역이라면 패설은 구비에 의한 허구의 영역으로 전거를 따지지 않아도 되고, 이야기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패설은 현실과 상상이 결합한 풍자와 해학, 웃음 속에서 문학적 영역이 확대될 수 있는 장르인 것이다.

물론 현대적 시각에서 보았을 때 『어면순』 속 개별 성 소화담들은 남성 주체의 ‘엿보기’와 ‘엿듣기’를 통하여 여성의 육체를 물신화시키고 섹슈얼리티의 대상으로서 파편화시키고 있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장르적 관점에서 송세림은 유학자로서 의외의 패설류 『어면순』을 남김으로써 근엄함이 해체되는 대신 지역적 친근성과 웃음을 남겼다고 할 수 있겠다.

송세림송세림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의 학행은 당대는 물론 사후에도 지역 사회를 넘어 높이 평가받는다. 정읍 무성서원의 배향 인물 정언충송세림의 제자이자 조카사위이며, 김약묵송세림의 조카이면서 제자이다. 김약묵의 경우, 송세림에게 배운 후 벼슬에 나가 청백리로 이름을 떨쳤으며 만년에 『성리지서(性理之書)』를 읽으며 지냈다. 무성서원 배향 인물은 아니지만 「면앙정가(俛仰亭歌)」를 지은 송순(宋純)[1493~1583]은 과거를 앞두고 송세림을 찾아가 글을 배웠다고 한다.

무성서원은 신선으로 회자되는 최치원부터, 전형적인 시서화의 문인 신잠, 상춘의 향기와 패설의 웃음, 향촌의 문화의 자존심인 향유들을 품은 서원이다. 정읍 무성서원에 배향된 최치원신잠을 비롯하여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의 글들은 정읍 문학의 근간이 되었고, 나아가 지역민과 함께 향유되어 정읍 지역 향촌 문화의 기틀을 형성하였으며, 현재까지 전승되어 정읍의 상징성을 확립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