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019
영어공식명칭 Religious Ritual for the Mountain Spirit in Naedong-maeul
이칭/별칭 매정리 내동 당산제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옹동면 매정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성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의례 장소 내동마을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옹동면 매정리 지도보기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옹동면 매정리에서 정월 초닷새부터 이틀 동안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내동마을 제웅 인형 소몰이 당산제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옹동면 매정리 내동마을 주민들이 해마다 정월 5일과 6일, 이틀에 걸쳐 마을 사람들의 건강과 풍농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공동체 의례이다. 일반적인 명칭으로는 매정리 내동 당산제라 불리며, ‘내동마을 제웅 인형 소몰이 당산제’라는 명칭은 당산제 과정 중에 제웅[짚으로 만든 인형]을 만들고 소몰이를 한다고 하여 붙여졌다. 다른 마을 당산제와 비교할 때 ‘제웅치기’와 ‘소몰이’가 결합된 무척이나 독특한 당산제이기에 2022년 문화재청의 ‘미래 무형문화유산 발굴·육성’ 사업에 전라북도에서는 유일하게 선정된 바 있다.

[내동마을과 당산제의 유래]

내동마을은 한때 마을이 컸을 때는 80호 정도 되었으나 2000년대 초반에는 50호 정도로 줄었다. 지리적으로 산도 들도 아닌 지대라서 논농사와 밭농사가 절반씩 차지하고 있다. 내동은 마을 동남쪽에 조성된 내동저수지의 ‘안골’이라는 의미에서 붙은 지명이다.

내동마을 제웅 인형 소몰이 당산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주민들은 대체로 마을이 형성되면서부터 당산제를 시작하였을 것으로 여긴다. 매정리 내동마을 토박이들이 시제 때 모시는 조상을 근거로 삼으면, 마을이 형성된 지 최소 500년은 되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또한 당산제의 유래에 대해서는 마을의 풍수지리적 형세와 관련이 있다고 전하여진다. 내동마을은 풍수지리상 배의 형국인데, 돛대와 닻이 굳건하여야 배가 풍랑을 견딜 수 있다. 돛대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마을 중앙에 자리 잡은 당산나무이고 주민들은 내동마을의 풍요와 제액초복을 기원하고자 당산신에게 정성껏 제를 지내 온 것이다.

한편, 배를 정박시키는 기능의 닻은 마을 남쪽 들판에 있는 ‘작은당산’ 입석(立石)에 해당한다. 들판 농삿길 길가에 있는 작은당산 입석은 1990년대 경지 정리 사업 때 공사를 하던 업자의 부주의로 땅에 묻혀 유실된 상태이다. 과거 내동마을 제웅 인형 소몰이 당산제가 TV에 소개된 적이 있는데 그 화면에 작은당산 입석의 모습이 남아 있다.

[내동마을 당산 형태와 원리]

내동마을 제웅 인형 소몰이 당산제는 당산 세 곳과 당집, 그리고 두 곳의 저수지가 당산제의 제의 공간에 포괄된다. 먼저 당산은 신체가 느티나무 두 그루이고 신격은 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인데, 주민들은 ‘큰당산’이라고 부른다. 마을 중앙에 있는 모정(茅亭)과 함께 있다. 또 당산나무 바로 옆에는 당집이 건립되어 있는데, 정면 250㎝, 측면 220㎝ 규모의 단칸으로 이루어진 제의 공간이다. 애초 초가였는데 새마을운동 때 지붕만 함석으로 개량하였다. 벽체는 시멘트로 미장하였다. 당집 내부 상량에 ‘광무 9년’이라고 쓰인 기록으로 볼 때 1905년에 건립되었거나 중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내부는 마룻바닥이며 바닥 절반 정도는 제물을 차릴 수 있게 약 10㎝ 높이의 층을 두었다. 내부 상단에는 선반을 만들어 제기와 굿물을 보관한다. 당집 당호가 ‘천제당’이다.

‘작은당산’은 마을에서 남쪽으로 펼쳐진 들판 중심부에 세워졌던 입석을 말한다. 농로 길가에 세워진 입석은 기둥형 자연석으로, 크기는 성인 가슴 높이 정도였는데 경지 정리 사업 때 유실하였다. 그럼에도 내동마을 주민들은 당산제 때 입석이 있던 곳에서 ‘작은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마을 형국상으로 ‘닻’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정읍 지역 입석의 역할이 대부분 수구막이와 비보라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고 내동마을 역시 전면이 툭 터져 있고 수로가 지나는 것으로 보아 입석의 기능은 수구막이나 비보였을 것이다.

당산제 제의 공간 중 하나인 내동저수지는 벼농사에 물을 공급하는 절대적인 공간이다. 그렇기에 당산제 때 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를 신체화한 두 제웅을 내동저수지 제방 아래에 하룻밤 합방을 시키는 것은 농업용수를 확보하고 풍년을 기원하고자 하는 상징적 행위와 절차로 보인다.

한편, 내동마을 동쪽으로 야산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야산을 주산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주산 꼭대기에 큰 당산나무가 있었다고 하는데, 새마을운동 때 이 당산나무가 사라지고 그 후로 마을에 흉흉한 일이 많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당산제 준비 과정]

내동마을 제웅 인형 소몰이 당산제는 정월 5일과 6일에 시행한다. 당산제 준비는 3일과 4일에 하는데, 제사 비용 마련, 제관 선정, 제물 장보기, 제물 장만이 해당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특이한 점은 풍물패의 걸립으로 제사 비용을 먼저 마련하고 나서 이어서 제관을 선정한다는 점이다. 정월 3일에 풍물패를 앞세워 가가호호 지신밟기를 하면서 각 가정의 가족 수대로 내는 인구전(人口錢)으로 제사 비용을 걷는다. 이 기간에 마을에 방문한 친척이나 손님도 예외 없이 인구전을 내야 한다. 풍물패 구성이 어려운 경우에는 주민들 가운데 깨끗한 사람을 선정하여 집마다 방문하면서 걷는다.

제관은 원칙적으로 길일인 생기복덕을 가려서 선정하지만 대개는 형편을 잘 아는 이장이 깨끗한 사람들 중에 지정한다. 제관으로는 제주 2명, 제관 1명, 축관 1명이다. 제주를 내동마을에서는 ‘원화주’와 ‘섭화주’라고 부른다. 원화주가 주도하고 섭화주는 보좌한다. 제관으로 선정되면 목욕재계한다. 뒷간을 이용하였다면 의복을 갈아입어야 하기에, 옷 갈아입기가 성가셔서 음식을 거의 먹지 않는다고 한다.

제물 장만은 원화주, 섭화주의 부인들이 하는데, 이들을 각각 ‘원받이’, ‘서받이’라고 부른다. 현재는 제물 장만을 회관에서 부녀회장과 이장이 주관한다. 장보기는 정월 4일에 정읍 구시장[정읍 제1시장]에서 수행한다. 장보기는 본래 깨끗한 사람을 골라서 맡겼고, 전날 인구전으로 걷은 돈 중에도 혹여 부정한 사람의 돈이 섞일 수가 있다고 하여 깨끗한 돈을 융통하여 장보기를 하였다. 현재는 부녀회장과 이장이 작성한 물목에 따라 제물을 구매한다.

장보기에서 돌아오면 당일 1차 제물을 장만한다. 본래는 섭화주 집에서 원화주와 두 부인, 즉 원받이와 서받이까지 함께 장만한다. 이들은 제물을 장만할 때 말도 하지 않고 간도 보지 않는다. 그래서 백지로 입마개를 하고 장만한다. 제물 장만 때 사용할 우물도 미리 봉하여 놓는다. 이 기간에 동네 사람들은 그 우물을 들여다볼 수도 없고 사용하여서도 안 된다. 제수 중에 ‘벼락술’이라는 제삿술을 담근다. 술을 누룩으로 담그되 이틀 만에 내린 술이라서 그렇게 부른다. 충분히 발효되지 않은 술이라 맛이 시고도 달다고 한다.

정월 4일 이른 아침에 마을 입구에 주민들이 ‘인줄’이라 부르는 금줄부터 친다. 내동마을은 지형상 사방으로 진입로가 형성되어 있다. 동쪽은 마을 주산으로 통하는 산길이고 남쪽은 농지이다. 북쪽은 옹동면 소재지로 통하는 옛 도로이다. 현재 주민들의 주 통행로는 서쪽 길이다. 따라서 금줄은 서쪽 마을 어귀에만 두른다. 또 이곳부터 제관 집 대문까지 군데군데 붉은 황토를 연결하여 신성성을 표시한다. 주민들은 이날부터 당산제가 끝나는 6일까지 일절 육고기와 비린 생선을 먹어서는 안 된다.

[당산제 진행 과정]

정월 5일이 되면 여자들이 마을 회관에 모여 제물을 장만하는 동안 남자들은 70여 개의 ‘오방신기(五方神旗)’를 만든다. 한지로 만든 기에는 각각 동방청제장군(東方靑帝將軍), 남방적제장군(南方赤帝將軍), 북방흑제장군(北方黑帝將軍), 서방백제장군(西方白帝將軍), 중앙황제장군(中央黃帝將軍)이라는 글씨를 쓴다. 이렇게 제작된 오방신기는 한 줄로 이어진 긴 새끼줄에 연달아 끼워 둔다.

이어 초저녁에 풍물 소리가 울리면 남자들은 볏짚을 들고 당산나무 아래로 나와 볏짚으로 만든 사람 크기의 등신(等神)을 만든다. 과거에는 등신이라고 불렀는데 현재는 제웅이라고 하며, 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의 신체에 해당하는 제사 도구가 된다. 만드는 방법은 볏짚과 새끼줄로 몸체 형상을 만든 뒤에 얼굴 부위에 백지를 씌우고 이목구비를 그리는 식이다. 이때 당산할아버지의 성기를 돌출시키는 것도 잊지 않는다. 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가 곧 합방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제웅을 만들 때 볏짚이 비록 거칠더라도 손에 침을 묻히면 안 된다. 제웅이 완성되면 당산나무 아래에 모셔 둔다.

이어 신위(神位)와 축문을 쓰는데, 2022년 정월 6일에 오방신에게 제를 올리며 사용한 축문은 다음과 같다.

“유 세차(維 歲次)/ 임인 일월 을유삭 초육일 경인(壬寅 一月 乙酉朔 初六一 庚寅)/ 전라북도 정읍시 옹동면 매정리 내동(全羅北道 井邑市 瓮東面 梅井里 內洞)/ 주민대표 임영택 감소고우(住民代表 林永澤 敢昭告于)/ 내동 중앙당산지양신 동방청제대장군(內洞 中央堂山之兩神 東方靑帝大將軍)/ 서방백제대장군 남방적제대장군(西方白帝大將軍 南方赤帝大將軍)/ 북방흑제대장군 서방백제대장군(北方黑帝大將軍 西方白帝大將軍)/ 제신위전 금택길일 진설소반주효(諸神位前 今擇吉日 陳設蔬飯酒肴)/ 공궤우제신 동민소원 구축동중(供饋于諸神 洞民所願 驅逐洞中)/ 수화적환 각종제해 일시소멸(水火賊患 各種諸害 一時消滅)/ 농사대풍 재복형통 소원성취(農事大豐 財福亨通 所願成就)/ 영뢰신덕우 갑자생 남녀(永賴神德于 甲子生 男女)// 상향(尙饗.).”

밤 9시 무렵이 되면 제웅을 들고 마을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내동저수지로 향한다. 주민들은 횃불을 들고, 풍물패가 인도한다. 풍물패 뒤에 남성 두 명이 각각 제웅을 안고 행진한다. 저수지에 도착하면 제방 중턱에 두 제웅을 내려놓는다. 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 제웅은 하룻밤 합방의 시간을 가진다. 제웅을 내려놓고 돌아와 한바탕 풍물굿을 치며 놀다가 주민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제관들만 남아 자정 무렵부터 당산제가 시작된다. 당산제는 당집에서 시행한다. 제의 장소에는 본상과 성주상을 각각 차린다. 제물은 떡, 삼색과실, 팥밥, 식혜, 벼락술, 탕국, 메 2그릇과 소고기국 등으로 차린다. 제물 중에 특이한 것은 당집 바깥 뒤쪽에 물동우[물동이]를 마련한다는 점이다. 물동우에는 생미역을 담가 놓는다. 생미역을 먼저 가져가려고 당산제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벼르는 사람들이 곳곳에 은신한 채 대기한다. 특히 아들 없는 집에서 생미역을 다투어 가져가는데, 이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당산제는 유교식 제의 절차에 따라 강신, 초헌, 독축, 상식, 아헌, 종헌, 소지, 음복 순이다. 과거에는 술을 열두 잔까지 올렸으며, 첫닭 우는 6일 새벽 3시까지 지냈다고 한다. 당산제가 끝나면 징을 쳐 동네에 알리고 음복하고 나서 상을 물린다.

[파젯날 오방신제와 소몰이 행렬]

정월 6일은 당산제 이틀째이자 파젯날이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소몰이’이다. 이날 아침이면 주민들은 모두 집에서 기르는 가축을 끌고 나온다. 주로는 소와 염소이다. 과거에는 5~60여 마리의 가축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집에 가축이 있으면서도 이날 끌고 나오지 않으면 그 가축은 죽거나 병이 든다고 한다. 그만큼 당산이 ‘세기 때문’이고, “당산님의 조화”라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모든 가축을 끌고 나온다. 당산제 때 가축을 몰고 나와 동참시키게 된 배경은 나중에 “당산제와 관련한 전설” 대목에서 살펴보겠다.

한편, 가축과 함께 오방신기도 이날 행렬에 동참한다. 주민들이 오방신기를 들거나 가축을 몰고 행진하는 곳은 내동저수지이다. 풍물패가 앞장선 이 행렬이 장관을 이룬다. 저수지 제방에는 전날 안치하여 둔 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 제웅이 합방한 후 대기하고 있다. 일행이 저수지에 당도하면 제일 크고 건강한 소 두 마리 등에 담요를 씌운 뒤 제웅을 태운다. 제웅을 모신 행렬은 다시 마을 앞을 크게 돌면서 남쪽 들판 한복판에 세워진 작은당산 입석으로 향한다. 작은당산에 당도하면 준비한 제물을 간단히 차리고, 그 앞에 제웅을 내려서 모셔 놓고 ‘작은당산제’를 지낸다. 이어 주민들과 가축은 마을로 귀환하고 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 제웅은 당집 ‘천제당’에 안치한다.

원화주와 섭화주가 다시 당집 안에서 제사를 지낸다. 이를 ‘오방신장제’라고 한다. 이때의 특징은 두 제관 외에 당집 안에 한 사람이 더 동참한다는 점이다. 그 사람을 ‘짐작하는 사람’ 또는 ‘짐작관’이라고 부른다. ‘짐작관’은 당산신이 주민들에게 일종의 공수[신이 내린 무당이 신의 소리를 내는 일]를 내려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제사를 지내면서 원화주가 당산신을 향하여 “전라북도 정읍시 옹동면 매정리 내동 주민 일동은 구축동중 수화적환 각종제해 일시소멸 농사대풍 재복형통 소원성취를 당산할아버지, 당산할머니께 기원합니다”라고 말로 고하면, 제웅 옆에 앉아 있던 짐작관이 “오! 다 짐작한다. 너그들 정성이 대단하니 너그들 만수무강과 농사 대풍, 자식들 소원 성취를 들어 주마”라고 응대한다. 이런 방식으로 당산신을 대신하여 제관과 주민들에게 공수를 내려 주는 것이다.

또 축관이 축을 읽은 후 주민들 모두를 출생 연도에 따라 육십갑자 간지별로 한 사람씩 이름을 호명하면 짐작관이 “알았다. 내가 다 짐작한다. 여기같이 경을 잘 읽어 주는 마을은 없더라. 그렁게 내가 축복을 마련해 줄 텐게, 이 동네서 출생한 양반들, 이 동네서 출생해서 대처로 나간 양반들, 모든 남녀노소들 다 건강하거라. 그리 알라”라고 크게 공수를 내린다. 한편으로 이 말은 제관을 비롯한 주민들에게 당산할아버지, 당산할머니가 당산제사를 잘 받았다는 뜻을 전달하는 일종의 메시지이다. 당산제 때 이런 식의 역할극을 수행하는 모습은 다른 마을 제사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이날 오방신장제도 유교식 제의 절차에 따라 진행한다.

당집 내부에서 제사를 마치면 제사 음식 일부를 백지에 싸서 헌식(獻食)한다. 헌식 장소는 마지막 제의 장소인 ‘작은방죽’이다. 이곳은 마을에서 오른쪽으로 150m 거리에 있다. 작은방죽에 당도하면 적당한 돌을 골라 그 밑에 헌식하고 묻는다. 이때 제웅도 두 사람이 각각 등에 업고 동행한 뒤 헌식한 곁에 눕혀 놓고 돌아온다. 제웅을 이곳에 두는 것을 ‘제웅치기’라고 한다. 현재 작은방죽은 경지 정리 사업 때 논으로 만들면서 사라졌기에, 이제는 이곳 대신에 마을 북쪽 개울가에 가서 헌식과 제웅치기를 하고 돌아온다.

[복떡돌리기와 뒤풀이]

모든 절차가 끝나고 제의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의례가 ‘복떡돌리기’이다. 복떡은 주민 모두를 마을 공동 창고에 집합시키고 나서, 밖으로 한 사람씩 나오게 하면서 제공한다. 이는 마치 굿판에서 하는 ‘계면떡돌리기’와 비슷하다. 이를테면 동해안별신굿에서도 계면떡을 돌리는데, 동해안별신굿을 행하는 지역에서는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옥황상제가 혼신을 불러 “너는 계면떡을 몇 번 먹었느냐?”라고 물었을 때 세 번을 먹지 않은 사람은 이승으로 돌려보낸다고 한다. 그래서 무당들이 굿판을 벌였을 때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계면떡을 돌리며, 이때 떡을 받은 사람들은 복채를 내기도 한다. 내동마을의 복떡돌리기는 의미 면에서 계면떡돌리기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복떡돌리기까지 끝나면 당산제를 위하여 제작한 모든 제사 도구를 불태운다. 금줄을 걷어 오고, 오방신기와 이를 엮은 새끼줄을 한데 모아 당산 근처에서 불사른다. 이로써 당산제 전체 과정을 마치면 점심 무렵인데, 이어 뒤풀이로 제물과 술을 먹고 마시며 동네잔치가 벌어지고, 풍물패의 지신밟기가 시작된다.

[당산제와 관련한 전설]

내동마을에는 당산과 관련된 두 가지의 영험담이 전한다. 하나는 당산제 때 가축을 동참시키는 이유가 담긴 설화이다. 뙤약볕에서 밭을 갈던 소가 잠시 쉬는 동안 갑자기 당산나무 아래에 있는 입석을 뿔로 들이받고 말았다. 그날부터 소가 경련을 일으키더니 며칠 후에는 네 발이 오그라들고 끝내는 혓바닥까지 오그라져 죽고 말았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소가 죽은 뒤부터 당산의 영험함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산제 때 용서를 빌고자 가축까지 몰고 나와 당산제를 함께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당산신의 영험함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 후로는 당산제 때 가축 한 마리라도 집에 남게 되면, 입석을 들이받고 죽은 소처럼 그 가축은 발과 혀가 오그라들어 죽고 만다고 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당산제 때 마을에 든 도둑 이야기이다. 하루는 당산제 때 도둑이 들어와 징을 훔쳤다. 그런데 아무리 동네를 빠져나가려 하여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고 제자리걸음만 되풀이하게 되었다. 도둑은 어쩔 줄 몰라 당황하다가 징을 바닥에 내려놓자 비로소 걸음이 떨어져서 빈손으로 간신히 도망쳤다고 한다. 주민들은 그게 다 당산신이 영험함으로 조화를 부리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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