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021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성실

[정의]

식민지 수탈, 일본인 지주와 농장, 근대 의료, 근대 교육 등 정읍 지역 근현대사를 엿볼 수 있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의 역사.

[개설]

화호리(禾湖里)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신태인읍에 있는 농촌 마을이다. 화호리는 일제 강점기 구마모토 리헤이와 다우에 타로 등 일본인에 의하여 농장이 건설되어 식민지 수탈을 경험한 곳이다. ‘화호(禾湖)’라는 이름을 통하여 알 수 있듯, 벼가 호수처럼 펼쳐진 호남평야의 중심 지역으로 ‘지평선 축제’가 개최되는 김제 벽골제와도 인접하여 있다. 화호리는 일제 강점기 신태인읍에 기차역이 생기기 전까지만 하여도 주변 지역 행정·상업의 중심지였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원래 부안군 백산면으로 가는 나루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재까지도 곳곳에 식민지 유산들이 잔재하여 있다. 화호리에는 의학 박사 이영춘과 연관된 자혜진료소가 있었으며, 화호자혜진료소는 1945년 해방 이후 화호중앙병원 건립의 토대가 된다. 화호리에는 여중, 여고 등 명문 학교들이 설립되어 교육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으로 식민지 역사, 한국의 현대사, 의료, 교육 등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화호리 옛 지명에 얽힌 이야기]

화호리는 조선 시대부터 숙구지(宿拘地)마을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숙구지’는 마을의 지형에서 비롯된 이름인데, 마을이 자고 있는 개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지명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조선 말 한 도사가 이 마을을 지나면서 마을의 지형이 마치 개가 자고 있는 형상과 같다고 하여 숙구지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개가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는 형상이니 사람들이 살기에도 좋은 곳이란 뜻을 갖고 있다.” 마을의 원로들은 “사람은 발이 따숴야[따뜻해야] 자고 소는 등허리가 따숴야 자는데 개는 주둥아리가 따숴야 잔다. 이 숙구지는 개가 자는 형상이어서 구마모토가 창고를 지을 적에 따뜻한 개 주둥이 자리에다 지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마을의 명당을 구마모토가 차지하였다는 것인데, 구마모토가 실제로 ‘숙구지 설화’를 인식한 채 ‘명당’에 집을 지었는지 그 진위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구마모토의 가옥과 농장 사택, 창고 등이 들어선 자리가 바로 ‘개의 주둥아리에 해당하는 곳’, 즉 마을의 ‘명당’이었다는 점을 주민들은 힘주어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믿어 온 숙구지 이야기에는 ‘마을의 명당을 일본인에게 빼앗겼다는 분노’와 ‘빼앗길 만큼 이 마을 터가 좋다는 자부심’, 이 두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다. 한편 숙구지의 ‘구지’가 ‘곶이’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과거 화호는 동진강 물줄기가 지나던 곳으로 나루터에 배가 드나들었고 곶이의 형태가 지금도 남아 있다. 따라서 일부 전문가들은 이 같은 주장도 타당하다고 여긴다.

[화호리의 일본인 농장과 식민지 수탈]

화호리정읍시 신태인읍에서 서쪽으로 5㎞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신태인역이 문을 열었던 1914년 이전까지는 용북면에 속하였다. 마을에는 과거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로 가는 나루터가 있어 교통의 요지로 기능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일본 정부는 조선 투자 및 이주 정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이에 다양한 목적을 가진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대거 이주하였는데 특히 농사에 관심 있던 이들은 호남의 곡창 지대로 몰려들었다. 화호리는 일본인 농장주들과 농업 이주민이 선호하는 지역 중 하나였다. 일제 강점기 전북 최대의 일본인 지주였던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가 화호지장(禾湖支場)을 설치하여 조선 쌀 수탈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나가사키현[長崎縣] 출신의 구마모토 리헤이는 전북에 진출한 최초의 일본인 지주이다. 구마모토 리헤이는 1902년 농장 지배인으로 조선에 건너와 1903년에는 독립하여 옥구군과 화호리에 자신의 농장을 창설하였다. 국책 회사인 동양척식회사를 제외하고 개인으로서는 전북 지역 최대의 지주였다. 구마모토의 농장은 전라북도 여러 곳에 있었는데 완주, 정읍, 옥구, 김제, 익산 등지에 농지를 구입하면서 각 지역에 농장 사무실을 두고 농장을 관리하였다. 1933년 당시 통계를 보면 구마모토의 소유지는 전답(田畓) 2,913정보에 달하였다. 1937년에는 ‘주식회사 웅본농장’을 창설하였다. 구마모토는 화호리에 농장 사무실을 두고 둘레에는 관리인들을 위한 일본인 사택촌을 조성하였다. 구마모토는 다수의 관리인을 두어 농사 기술 지도를 하였는데, 관리인의 숫자만 하더라도 동양척식회사의 두 배가량이었다고 한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인을 상대로 농업 이민자를 모집하였다. 1913년 화호리에도 일본인 스물다섯 가구가 이주하여 왔다. 이주한 일본인들은 일본의 고치현[高知縣] 출신이었으며 고치에서 종이를 뜨던 장인들이었다고 전한다. 화호리에는 농업 이민자뿐 아니라 대장간, 여관, 상점 등을 경영하고자 이주한 이들도 있었다. 조선인이 살던 마을에 갑자기 이주한 일본인들로 인하여 근대식 건축물이 들어섰고 전에 없던 새로운 경관이 형성되었다. 지금도 화호리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지은 생활의 터전들이 대부분 남아 있어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일본인의 이주 이후, 화호 주민들의 생활에는 다양한 영역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화호리에 정착하게 된 일본인들은 식민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고 토지를 매입하였으며 집을 짓고 화호에서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곧 이어 마을에는 학교와 의료 시설, 상점이 생겨났다. 일본인 가옥, 근대적 기관과 시설물이 들어서면서 마을은 일본인들로 인하여 재구성되었다. 이러한 광경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구조의 재편성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화호리의 근대 문화유산]

신태인읍 화호리 용서마을에 있는 정읍 화호리 구 일본인 농장 가옥은 일제 강점기에 축조된 근대 문화유산으로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정읍 화호리 구 일본인 농장 가옥은 구마모토 리헤이가 별장으로 사용하던 가옥이다. 구마모토 가옥의 최초 건립 시기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920년대에 지은 것으로 전한다. 지상 1층 구조에 건축 면적은 184.5㎡이다. 마을 원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구마모토는 일본 본토에 거주하면서 농장이 있는 군산, 정읍 일대를 한 번씩 시찰하였다고 한다. 구마모토가 화호리에 방문할 때마다 구마모토의 가옥에서는 시끌벅적한 음악과 기생들의 웃음소리가 밤새도록 들렸다고 한다.

구마모토 리헤이는 생산한 쌀을 보관하고자 마을 내에 다섯 동의 쌀 창고를 지었다. 6·25전쟁 당시 네 개 동은 불타 없어졌다고 전하며 화호리 용서마을회관 뒤편에 있는 창고만이 남아 있었으나 안전 상의 이유로 허문 다음 새로 지었다. 현재 쌀 창고는 정읍근대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1940년대의 한 인터뷰에서 구마모토는 화호농장 재산이 500만 원이었고 연간 수익은 약 40만 원 정도로 추정된다고 밝힌 바 있다. 현재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축물 크기만 보더라도 당시 수익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쌀 창고는 건축 면적 약 315㎡인 시멘트 건물로 지붕은 일식 기와로 덮여 있었다. 쌀 창고는 8·15해방 후 화호중앙병원 건물로 사용되었다. 정면부의 계단과 벽면의 창문들은 창고로 쓰일 당시에는 없던 것으로 개원할 당시 건물을 개수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화호중앙병원 건립은 이영춘, 김성환 두 의학 박사의 공이 컸다. 한편 화호중앙병원이 문을 닫은 후에는 잠시 화호여자고등학교[현 인상고등학교] 건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쌀 창고 건물은 화호중앙병원, 화호여자중학교 등으로 사용되면서 일부가 변형되기도 하였으나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구마모토 리헤이는 다른 일본인 지주들과 달리 조선에 거주하였던 것이 아니라 한 번씩 시찰 목적으로 다녀갔다. 구마모토 리헤이가 화호리에 머무르지 않고도 대규모 농장을 관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인 직원인 경리과장과 농산과장 덕이었다. 구마모토는 화호리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집을 지었고 자신의 가옥 대문 양 옆으로는 경리과장과 농산과장의 사택을 마련하였다. 두 일본인 관리의 집은 구마모토 가옥 다음으로 규모가 컸다[각각 건축 면적 72.73㎡, 79.33㎡이었다]. 두 건축물은 건축물 대장에 사용 승인일이 1934년과 1936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그 이전에 신축된 건축물로 판단된다. 광복 이후 마을 사람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구조가 상당히 변경되었으나 곳곳에 일식 주택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두 주택 외에도 일본인 직원 합숙소, 일본인 직원 사택 등 구마모토 농장 직원들이 생활하였던 건물이 화호리 곳곳에서 발견된다. 농산과장 사택은 정읍 화호리 구 일본인 농장직원가옥으로서 전북특별자치도 시도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구마모토 농장 직원들의 사택에서 50m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2층 근대 건축물이 있었다. 다우에 타로[田植太郞]가 살았던 곳인데, 식민지 시기 화호리에 유일하였던 2층 주택이었다. 다우에는 농업 이민으로 화호리에 왔는데 토지 경영과 사채업으로 재산을 불려 구마모토 버금가는 지주로 성장하였다. 구마모토가 화호리에 거주하지 않고 일본과 조선을 왕래하며 농장을 경영한 것과 달리 다우에는 가족 모두가 이주하여 왔다고 전한다. 광복 후 다우에 가옥은 화호우체국으로 사용되다가 개인 소유가 되었으나 현재 해당 가옥은 허물어졌다. 지금은 빈 터만 남아 있다.

구마모토는 농장 소작인의 질병 치료를 목적으로 화호리에 진료소를 세웠다. 군산 옥구군 개정에 있던 본장(本場)에 본소를, 화호에는 지소를 두었다. 화호리에 세운 진료소 이름은 ‘화호자혜진료소’였다. 1939년에 설립되어 진료소와 농촌위생연구소 등으로 사용되었는데, 현재는 마을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사진 자료에 의하면 본래 건축물은 ‘ㄱ’자 형태였으나 훗날 일부가 소실되어 현재는 ‘ㅡ’ 자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화호자혜진료소 건물은 근대농촌 의료 활동과 역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적 증거물이자 광복 이후 화호중앙병원 개원의 초석을 마련하였다는 데서 그 의의가 크다. 화호자혜진료소 후신인 화호중앙병원은 1947년 개원한 종합병원이다. 구마모토의 쌀 창고를 개조하여 문을 열었고 내과, 소아과, 외과, 산부인과, 이비인후과 다섯 개의 과를 갖추고 있었다. 입원 환자 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대규모 병원이었다. 당시 부안, 정읍, 김제 인근에서 가장 큰 병원이었고 의술이 뛰어나기로 소문나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화호중앙병원은 1960년 같은 자리에 화호여자중학교가 생기기 전까지 운영되다 폐원하였다.

화호리가 일본인 거류민촌으로 유명하여지자 일본인 여행객들이 자주 방문하였다. 여행객들이 머물 공간이 필요하자 화호리에 소화여관이 세워졌다. 여관을 운영하던 미츠다 겐사부로[水田原三郞]는 1914년 화호로 이주하여 숙박업으로 모은 돈으로 마을의 농지를 사들였고 여느 일본인 소지주들처럼 조선인에게 소작을 주었다. 소화여관 건물은 광복 후 양조장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개인 소유이다.

이 외에도 일제 강점기 화호리 마을 중심부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고바야시[小林] 상점, 대장간, 장제소 등이 들어서 있었다. 상점에는 일본인이 필요로 하는 식료품과 생필품을 취급하였고 대장간에서는 농기구를 제작하였다. 장제소는 말의 편자를 바꾸어 주는 곳으로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장제소가 화호리에 존재하였다는 사실로도 얼마나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정읍 화호리 식민지 아픔을 넘어 미래를 열다]

화호리에는 일제 강점기의 물리적 공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살았던 다양한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가 전하여 오고 있다. 개인과 집단이 경험한 삶의 서사가 오늘을 사는 마을 주민들에 의하여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중 화호리가 경험한 식민지 근대의 소용돌이에서 마주한 한 가족의 이야기가 전하여진다. ‘오사와 신조[大澤新藏]’라는 일본인 가족의 이야기는 기승전결의 구조가 있는 완결된 서사로서 화호리의 식민 지배와 주민의 구체적 삶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마을 원로가 들려주는,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가족사는 다음과 같다.

“퇴역 군인 신분으로 화호리에 이주하여 온 오사와는 조선인 여성과 혼인하여 아들 셋, 딸 하나를 두었다. 광복 후 오사와는 처와 자식을 남겨둔 채 혼자 일본으로 야반도주하였다. 지병이 있던 조선인 부인은 충격으로 쓰러져 사망하게 되고 남겨진 아이들은 일부 조선인에게 ‘일본 놈은 다 물러가라’며 매를 맞기도 하였다. 세 아들은 아버지를 찾아 일본으로 갈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당시 겨우 5살이던 막내 여동생은 너무 어렸기에 동네 구둣방 주인에게 맡아 달라 부탁하였다. 걸어서 부산까지 간 세 아들은 겨우 일본행 배를 타고 일본에 도착하였으나 결국 아버지를 만날 수는 없었다. 훗날 세 아들은 일본에서 자수성가하여 헤어진 여동생을 찾으러 화호리에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여동생의 행방은 묘연하였고 남매의 상봉은 요원하게 되었다. 그렇게 세 형제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 어느 날, 택시에서 막 내린 한 여성이 화호삼거리 근처에서 ‘숙구지가 어딘지’를 수소문하고 있었다. 바로 그 여성이 구둣방에 맡겨진 오사와의 막내딸이었다. 어렸을 때 자신이 숙구지마을 우물이 있던 집에 살았다는 기억을 더듬어 서울에서 화호리까지 찾아온 것이다. 오빠들을 찾겠다며 구둣방에서 나와 가출한 어린 소녀는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서울 동대문에 터를 잡고 평생 헤어진 가족을 찾는 꿈을 꾸었다. ‘숙구지’라는 명칭이 공식 행정명이 아니었기에 아무리 수소문하여도 고향이 어딘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대문 상가에 온 전주 사람이 숙구지가 ‘정읍’에 있는 한 마을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길로 정읍 화호리에 간 그 여인은 식민지 시기를 경험하였고 오사와가 누군지도 잘 알고 있는 한 마을 노인의 도움으로 오빠들이 동생을 찾으려고 다녀갔다는 사실을 전하여 들었다. 마침내 오사와 가족은 극적으로 상봉하였다.”

현재 그들이 살았던 집은 비록 허물어졌으나 그 터와 우물은 지금도 화호리 마을에 남아 있다. 행복한 결말의 이 이야기는 지금도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훈훈하게 전하여지고 있다.

화호리는 비록 수탈의 아픔을 품고 있는 마을이지만 그 역사적 중요성이 부각되며 최근 정읍시와 학계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과거 흉물스럽게 방치되던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재정비되어 쌀 창고는 정읍근대역사관으로 새롭게 개관되었고 일본식 가옥들도 역사적 장소로서 관람객을 맞고 있다. 이제껏 식민지 시기 유산은 대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여 ‘청산’의 대상이었으나 현재 일제 강점기 시대의 유산은 교육 자료 혹은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화호리의 경우도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곳 가운데 하나이다. 정읍근대역사관 내부에는 화호리 일대 일제 강점기 잔재가 사진과 영상으로 전시되어 있으며 전시관에는 문화 해설사가 상주하면서 정읍근대역사관을 찾는 이들에게 마을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