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4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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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교동3길 14[고부리 16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광환 |
건립 시기/일시 | 176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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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시기/일시 | 1906년 - 고부관아터에 사립 광화학교 설립 |
폐지 시기/일시 | 1938년![]()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5년 6월 3일![]()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고부관아터 전라북도 기념물로 변경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4년 1월 18일 - 고부관아터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변경 |
소재지 | 고부관아터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교동3길 14[고부리 161]![]() |
성격 | 관아터 |
지정 면적 | 17,370㎡ |
소유자 | 전북특별자치도교육청 |
관리자 | 전북특별자치도교육청 |
문화재 지정 번호 |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에 있는 조선 후기 지방 행정 기관인 고부관아가 있던 곳.
[개설]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지역은 지리적으로 호남의 삼신산(三神山)이라 불리는 두승산이 있고 고창 방장산에서 발원하는 눌지천이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눌지평야·팔왕평야·백산평야·배들평야·수금평야·달천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서해안의 부안 땅 일부를 관할하고 있어 해산물 또한 풍부한 고을이었다. 백제 시대의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으로 후기에 5방 중 중방(中方)이 설치된 요지였다. 고부군으로 불린 것은 신라 통일 후 757년(경덕왕 16) 때부터였다. 고려 시대 936년(태조 19) 영주(瀛州)로 이름이 바뀌었고 951년(광종 2)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가 설치되었다. 고부관아는 1894년 1월 10일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고부농민봉기 때 전봉준이 이끈 동학농민군이 점령하여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냈던 곳이다. 고부관아터는 2005년 6월 3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전라북도 기념물로 변경되었다. 2024년 1월 18일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변천]
1019년(현종 10) 고부군(古阜郡)의 치소를 현재의 고부리인 성황산(城隍山)[영원면]으로 옮겼다. 따라서 고부관아는 성황산 산기슭을 둘러싼 읍성 내에 있었다. 그러다 1765년(영조 41) 성황산 동남쪽 고부군 남부면(南部面) 고부리(古阜里)[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의 조선 시대 지명]로 고부관아가 옮겨졌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된 역사적 장소인 고부는 해체되고 고부관아도 철거되어 현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1872년 지방지도』를 통하여 살펴보면 고부관아 건물은 동헌 뒤에 내아가 있고 내아의 서북쪽에 객사가 있었다. 객사의 서북쪽에는 향교가 있으며 향촌의 양반이 수령을 보좌하던 기관인 향청이 동헌 서남쪽에 있었다. 향청 서쪽 바로 옆에는 감옥의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읍치 주변의 각 면에는 소속 마을 명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1906년 5월 고부군수 정룡기(鄭龍基)에 의하여 고부관아 순교청(巡校廳) 건물에 사립 광화학교(匡化學校)가 들어섰다. 이후 고부관아 건물은 1927년, 1938년 두 차례에 걸쳐 모두 철거되었다.
[위치]
고부관아터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교동3길 14[고부리 161] 고부초등학교에 있다. 왼쪽에 고부향교가 있고, 오른쪽에 성황산[영원면] 진입로가 있다.
[현황]
고부관아터에는 현재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고부초등학교 좌측에는 고부향교의 명륜당이 있으며 고부관아 관련 시설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군자정(君子亭)이 마을의 남쪽에 있다. 고부초등학교 정문 진입로 왼쪽 화단의 석축 윗부분에 관아 건물의 유구(遺構)로 추정되는 주춧돌[초석(礎石)], 기단석(基壇石)이 남아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현장이었음을 알려 준다. 2023년 현재 정읍시는 일제 강점기 훼손된 고부관아를 복원할 계획을 세우고 추진 중이다.
[의의와 평가]
고부관아터는 동학농민혁명의 발원지인 옛 전라도 고부군의 행정 중심지로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점령하여 농민 자치를 편 상징적 공간이다. 현재 동학농민혁명의 시초가 된 고부농민봉기와 고부관아는 역사와 문화적인 측면에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