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4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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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阜農民蜂起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광환 |
발단 시기/일시 | 1893년 - 만석보 수세 징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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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시기/일시 | 1894년 1월 10일![]() |
종결 시기/일시 | 1894년 3월 13일![]() |
발생|시작 장소 | 말목장터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두지리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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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장소 | 말목장터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두지리 191-2 |
성격 | 농민 봉기 |
관련 인물/단체 | 전봉준|최경선|정익서|김도삼 |
[정의]
1894년 1월 10일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에서 탐관오리 조병갑 타도와 봉건 정부의 개혁을 위하여 일어난 농민 항쟁.
[개설]
전라도 고부군(古阜郡)[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일대에 있던 옛 고을 이름]의 백성들은 탐관오리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수탈에 견디다 못하여 1893년 11월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봉기를 준비하였다. 1894년 1월 10일 전봉준과 농민들은 봉건 정부와 조병갑의 탐학에 맞서기 위하여 고부농민봉기를 일으켰다. 전봉준과 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점령하고 만석보를 허물었다. 전봉준은 말목장터에 장두청을 설치하고 농민군을 지휘하였으며 각 지역에 봉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보냈다. 이로서 마침내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었다.
[역사적 배경]
19세기 후반 봉건 정부의 부패와 외세의 침략이라는 현실 속에서 동학의 교조 신원 운동은 동학교인들의 염원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당시 지역적 한계를 넘어 일시에 수만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정부에 맞서는 시위를 전개한 조직은 동학뿐이었으며 동학의 상층부는 이러한 힘을 토대로 동학의 공인을 이루려 하였다. 이와는 달리 남접 세력은 동학의 사상과 조직망을 통하여 잘못된 사회 자체를 바꿔보려는 입장을 지녔고, 서장옥과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 남접 세력에 의하여 투쟁의 형태와 성격이 이원적으로 진행되어 갔는데, 교조 신원 운동 과정을 통하여 서로 결합되면서 사회 변혁의 주체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주역인 전봉준은 이미 삼례집회 때부터 공식적으로 이름을 드러내고 일단의 세력을 형성하여 갔으며, 또 이를 통하여 교조 신원과 동학의 종교적 자유, 동학교도에 대한 지방관의 탐학 금지 외에 더욱 정치적인 구호인 외세 배격의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1893년 2월 동학 교단에서 준비한 복합 상소가 이루어질 때 비록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으나 남접 세력들은 상경한 동학교도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무장을 시켜 궁궐을 습격하여 중앙 고관들을 제거하고 조정을 개혁하고자 하는 가히 혁명적인 항쟁 방법을 구상하고 있었다.
보은집회와 금구집회 이후 남접 세력들은 동학 상층부를 움직이는 것에 한계를 느꼈고 마침내 독자적인 행동을 결심하게 되었다. 동학교도와 농민이 함께한 민중 봉기를 위한 최적의 조건을 지닌 장소는 전봉준이 살고 있던 전라도 고부군이었다. 고부 지역은 호남 제일의 쌀 생산지이며 농산물 집결지였다. 또한 서해안을 끼고 있어 해산물 또한 풍부하였다. 그런 만큼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봉건적 수탈과 일제의 경제적 침략이 극심한 곳이었다. 고부는 군수 조병갑과 호남전운사(湖南轉運使) 조필영(趙弼永), 호남균전사(湖南均田使) 김창석(金昌錫)의 탐학까지 가세됨으로써 농민들의 불만이 높아 농민 봉기의 여러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경과]
조병갑은 1892년 5월 고부군수로 부임하자마자 갖은 명목으로 백성들을 수탈하였다. 그 수탈 내용에 대하여 전봉준은 공초(供招)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민보 아래에 다시 보를 쌓고 보세를 징수하는데 일 두락에 상답은 두 말, 하답은 한 말 씩을 받아 도합 700여 석이 되었고, 농민들에게 황무지를 개간하여 5년 간 무세(無稅) 경작키로 허가하여 주고 가을에는 세금을 받았고, 부유한 농민들에게는 불효, 불목, 음행, 잡기 등의 애매한 죄목을 만들어 2만여 량의 재산을 늑탈하였고, 일찍이 태인현감을 지낸 자기 아버지의 비각을 세운다고 1,000여 냥을 거두었고, 대동미를 민간에서는 정백미로 징수하고 국고로 보낼 때에는 하등미로 납부하여 그 이윤을 독식하였고, 보를 쌓는 데 산주의 승낙도 없이 수백 년 된 거목을 마구 베어다 썼으며, 노역을 시킨 농민들에게 임금 한 푼도 주지 않았고, 또 이 밖에 헤아릴 수 없는 수탈 행위가 있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수탈은 고부 농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농민들은 먼저 이를 소장(訴狀)을 통하여 해결하고자 시도하였다. 1893년 11월, 40여 명이 고부관아로 몰려가 만석보의 조세감면을 진정하였으나 고부군수 조병갑은 오히려 양민을 선동하는 난민으로 몰아 그 가운데 장두(狀頭) 몇 사람을 구금하였다. 이에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들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처단하고 전라감영을 점령한 후 한양으로 올라가 중앙 권력자들을 응징한다는 내용의 사발통문 거사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발통문 거사 계획은 보류되고 말았다. 고부군의 분위기가 어수선하게 되자 전라감사 김문현은 중앙에 보고하여 고부군수 조병갑을 11월 30일 자로 익산군수(益山郡守)로 발령냈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 12월 한 달 동안에 다섯 사람이나 차례로 고부군수로 임명하였으나 모두 갖은 핑계로 부임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조정에서는 조병갑을 다시 고부군수로 임명하였다. 한편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발령이 나서 1차 공격 목표를 상실하게 된 전봉준 등은 거사를 미루어 오다가 갑오년 정월(正月)에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로 유임되자 마침내 때가 왔다고 판단하여 고부관아를 습격, 군수 조병갑과 향리들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1894년 1월 10일 밤 배들평야[이평평야] 주변의 10여 마을의 농민들은 예동마을에서 풍물패에 이끌려 말목장터로 모여들었다. 이날 밤 일장 연설을 마친 전봉준은 사방으로부터 모인 군중의 대오를 정비하고 대나무로 죽창을 만들어 무장을 시킨 뒤 2개 진으로 나누어 1진은 전봉준과 정익서가 인솔하여 정읍시 영원면 운학리 운학마을을 거쳐 고부 뒷모실 방죽으로 가고, 2진은 김도삼이 인솔하여 산매리와 도계리를 거쳐 뒷모실 방죽 끝에서 전봉준이 이끈 1진과 합세하여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결과]
조병갑은 농민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전라감영으로 피신하였다. 분노한 농민들은 감옥을 부수고 무고한 죄인들을 석방하였으며, 창고 문을 열어 강탈 당한 곡식을 인근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원한의 대상인 만석보를 허물어 버리고 말목장터에 진을 치는 한편 백산에 토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1894년 1월 11일부터 14일까지 15개 마을에서 1만여 명이 봉기에 참가하였다. 전봉준은 이들 가운데 장정을 뽑고 마을마다 5명을 뽑아 자기를 따르게 하였다. 말목장터에 진을 치고 주둔하면서 관군의 공격을 대비하여 2월 25일 백산성으로 이동하였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고부에서 농민들이 봉기한 사실을 조정에 알리지 않고 본인이 진압하려고 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한 달이 지나서야 고부관아가 농민군에게 점령당하였다는 소식을 보고 받은 조정에서는 전라감사 김문현을 감봉에 처하고 군수 조병갑에게는 파직과 동시에 체포령을 내렸다. 정부는 2월 15일 조병갑을 체포하여 남해 고금도로 유배를 보냈다.
조정에서는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按覈使)로 삼고, 용안현감 박원명을 신임 고부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하였다. 2월 15일 고부군수로 임명된 박원명은 폐단을 시정할 것과 봉기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며 해산을 권유하는 등 적극적인 민심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이용태는 2월 16일에 안핵사로 임명되었음에도 병을 핑계로 시일을 보내다가 3월 2일이 되어서야 역졸(驛卒) 800명을 거느리고 고부군에 도착하였다. 이용태는 신임 고부군수 박원명의 화합 조치를 뒤엎었다. 동학교도들을 민란의 주모자로 몰아서 닥치는 대로 체포 투옥하고 동학교도들의 가옥을 불 지르며 갖은 폭행을 서슴지 않고 저질러 농민들의 원한을 샀다. 백산에 유진하고 있던 전봉준은 함열 조창(漕倉)[연해나 하천의 포구에 설치하여 세미를 보관하였던 창고] 점령을 주장하였으나 조병갑 타도에 뜻을 이룬 농민들이 더 이상의 사태 진전에 불안함을 느껴 하나 둘 빠져 나가기 시작였다. 이렇듯 상황이 급변하자 전봉준은 후일을 기약하고 3월 13일경 백산에 남은 농민들을 해산시킨 후 손화중이 활동하는 전라도 무장현(茂長縣)으로 달려갔다. 무장으로 간 전봉준은 당시 동학 조직의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손화중과 함께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고부농민봉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출발점이 된 사건으로 의의가 크다. 또한, 농민군이 고부관아를 점령한 이후 약 2개월 간 고부는 농민들의 자치 공간이 되었다. 이는 전주화약 이후 전개된 집강소 통치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