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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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井邑 全琫準 遺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조소1길 20[장내리 458-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광환 |
건립 시기/일시 | 187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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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894년 - 정읍 전봉준 유적 소실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74년 - 정읍 전봉준 유적 복원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1년 11월 28일![]()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1년 7월 28일![]()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정읍 전봉준 유적 사적으로 변경 지정 |
현 소재지 | 정읍 전봉준 유적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조소1길 20[장내리 458-1]![]() |
성격 | 고택 |
양식 | 초가집 |
정면 칸수 | 4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정읍시 |
관리자 | 정읍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사적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 있는 개항기 전봉준의 거주 가옥.
[개설]
정읍 전봉준 유적(井邑 全琫準 遺蹟)은 전봉준이 살았던 집으로 1878년(고종 15) 지어졌으며, 앞면 4칸, 옆면 1칸으로 된 남향의 초가집이다. 1894년 1월 10일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났을 때 전라도 고부군 백성들에 의하여 전봉준이 지도자로 추대 되었던 역사적인 곳이다. 전봉준의 집안은 몰락 양반의 후예로 어느 한 지역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곳으로 떠도는 유동 생활을 하였다. 전봉준은 전라도 고창현(高敞縣) 덕정면(德井面) 죽림리(竹林里) 당촌(堂村)에서 태어나 13세 때 부모를 따라 전라도 고부군(古阜郡) 남부면(南部面) 진장문하(鎭長門下) 차복리(次福里)[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덕안리 진선마을]로 이주하였으나 곧 전라도 태인현(泰仁縣) 감산면(甘山面) 계봉리(桂峯里) 황새마을[현 정읍시 감곡면 계룡리 관봉마을]로 옮겨갔다.
황새마을은 1894년 당시 전라도 금구현(金溝縣) 원평(院坪)의 동학 대접주이자 갑오년 백산봉기 때 농민군 총참모로 활약한 김덕명(金德明)을 비롯하여 어머니와 같은 성씨인 언양 김씨가 많이 살던 거야(巨野)마을에서 채 10리[3.9㎞]도 안 되는 곳에 있다. 전봉준은 황새마을에서 18세 때까지 살다가 전라도 태인현 산외면(山外面) 동곡리(東谷里) 지금실(知琴室)[또는 지금곡(知琴谷)]로 이사하였다. 이 시기에 전봉준은 김개남을 만났으며 훗날 김개남이 중매하여 전봉준의 딸을 혼인시킬 정도로 막역한 교우 관계를 쌓았다. 이후 전봉준은 네 살 연상인 송두옥(宋斗玉)의 딸과 결혼하여 슬하에 두 딸을 두었으나 아내는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첫 번째 부인과 사별을 한 이후, 다섯 살 연하인 이문기(李文琦)의 딸을 후실로 맞이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전봉준이 31세경에 전라도 고부군 이평면 양교리(陽橋里)로 이사하였으나 바로 고부군 이평면 조소리(鳥巢里)[현 장내리]로 옮겨 살았다. 여기서 전봉준은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고부농민봉기 지도자로 앞장선 것이다. 2개월 간 지속되었던 고부농민봉기가 소강 상태에 접어들면서 동학농민군은 1894년 3월 13일 일단 해산하였다. 그러자 안핵사(按覈使) 이용태(李容泰)가 고부군으로 들어와 사건 조사를 빌미로 800명의 역졸을 동원하여 고부군민과 동학교도들의 재물을 빼앗고 집을 불태웠다. 이때 정읍 전봉준 유적도 불타 버렸는데 1974년 당시 정읍군에서 국비와 군비를 들여 복원하였다. 복원을 위하여 정리하던 중 상량문에 ‘무인 2월 26일(戊寅二月二十六日)’이라는 글자가 발견되어 1878년(고종 15)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정읍 전봉준 유적은 1981년 11월 28일 ‘전봉준선생고택지’라는 명칭으로 사적 제293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 7월 28일 ‘정읍 전봉준 유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사적으로 변경되었다.
[위치]
정읍 전봉준 유적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조소1길 20[장내리 458-1]에 있다.
[변천]
정읍 전봉준 유적은 1878년 건립되었으나 1894년 소실되었다. 1974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형태]
정읍 전봉준 유적은 앞면 4칸·옆면 1칸의 초가집으로 안채가 구성된 남향집이다. 동쪽부터 부엌·큰방·웃방·끝방 순서의 일(一)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현황]
정읍 전봉준 유적의 전체 면적은 817㎡이며 큰방과 웃방은 장지로 칸막이가 되어 필요한 경우 공간으로 터 놓을 수 있으며 끝방에는 전봉준의 얼굴 사진이 담긴 액자가 걸려 있다. 두 방의 전면에는 툇마루를 놓았으며 대살문으로 드나드는 끝방 전면에 반쪽에는 짧은 담을 둘렀다. 부엌의 전후 벽에는 널문을 달아 필요한 때에는 잠글 수 있도록 하였다. 대문의 동편에는 잿간을 겸한 초가(草家)로 된 화장실이 있으며 출입문으로는 한 짝의 열매 문을 달았다. 주위에는 흙담이며 짚으로 된 이엉을 덮었다. 또한 집 주위에 흙 담을 두르고, 옆으로는 집터만 한 마당을 내어 잔디를 심었다.
[의의와 평가]
정읍 전봉준 유적은 전봉준이 훈장 생활을 하며 거주하였던 곳으로 동학농민혁명을 구상한 곳이며 1894년 1월 10일 고부농민봉기 때까지 살았던 동학농민혁명의 산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