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5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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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學農民革命 最初 蜂起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249-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광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6년 -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 상징 조형물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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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지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2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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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농민군 집결지 |
관련 인물 | 전봉준|조병갑|안길수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지.
[개설]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지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249-1 일대 예동(禮洞)마을 입구이다. 1893년 고부군은 군수 조병갑의 혹독하고 포악한 정치와 수탈 그리고 호남전운사(湖南轉運使) 조필영(趙弼永), 균전사(均田使) 김창석(金昌錫)의 수탈까지 더하여 농민들의 불만이 드높았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만석보 물세로 백성들에게 거둬들인 700여 섬의 쌀을 예동을 비롯한 두전, 백산 3곳에 쌓아 놓았다. 1893년은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흉년이 들고 전염병마저 돌아 농민들의 생활은 비참하였다. 1893년 11월 고부 농민 40여 명이 고부 관아로 몰려가 만석보의 물세를 감면하여 달라고 진정하였으나 군수 조병갑은 오히려 양민을 선동하는 난민(亂民)으로 몰아 대표 몇 사람을 구금하였다. 농민들의 진정은 계속되어 다음 섣달에는 또 60여 명이 몰려갔으나 쫓겨나고 말았다. 전봉준은 사발통문 거사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하였다. 1894년 1월 10일 석양 무렵, 전봉준은 배들평야 10여 마을의 농악을 동원하여 예동에 걸군(乞軍)[음력 정월에 집집마다 돌면서 액막이 농악을 치면 농악대에 쌀 등 곡식을 주는 것]을 소집하였다. 농악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들자 인근 말목장터로 이동하였다. 말목장터에는 이미 통문을 받고 고부군 15개 마을에서 모인 백성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전봉준은 집결한 군중 앞에서 조병갑의 학정에 대하여 일장 연설을 한 후 군중을 두 대로 나눠 고부 관아를 습격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위치]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지(東學農民革命 最初 蜂起地)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249-1 일대 예동마을 입구이다. 이평면사무소에서 지방도 제736호를 따라 신태인읍 방면으로 약 1.5㎞ 되는 지점에 있다.
예동마을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신태인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앞에는 배들평야가 펼쳐져 있다. 배들평야는 이평면 하송리 동쪽에 있는 평야로 정읍천이 동진강에 합류하는 유역에 해당한다. 조선 시대에는 태인현과 고부군의 경계 지역이었다. 조선 최초의 마을 기록인 1789년(정조 13) 작성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예동리(禮洞里)’라는 마을 이름이 보인다. 1917년 발행된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명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圖府郡面里洞名稱一覽)』에도 ‘예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나온다. ‘이평(梨坪)’이라는 지명은 『세종실록』 권40에 태인(泰仁)과 고부(古阜)의 경계에 있는 이평제(梨坪堤) 등의 농경지가 수해로 농사를 망칠까 걱정이라는 기사로 말미암아 그 이전부터 ‘예동’ 지명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현황]
2016년 전라북도 정읍시에서 예동 입구에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 상징 조형물’을 건립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 상징 조형물에는 전봉준을 비롯한 고부 농민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군상(群像)과 더불어 전봉준·최경선·송두호 등 사발통문 거사 계획 참여자 20명의 이름이 새겨 놓았다.
[의의와 평가]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지는 전봉준이 걸군을 동원하여 전라도 고부군 예동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은 최초의 장소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