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691
한자 李成化
영어공식명칭 Yi Seonghwa
이칭/별칭 이성화(李聖化),이민효(李民孝)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원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2년연표보기 - 이성화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이성화 의진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09년 4월 5일 - 이성화 신보현 의진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교전
몰년 시기/일시 1910년 7월 10일연표보기 - 이성화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0년연표보기 - 이성화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정읍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거주|이주지 신기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지도보기·우덕리지도보기 일대
활동지 정읍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활동지 김제 -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활동지 군산 -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활동지 순창 -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활동지 부안 -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활동지 영관 - 전라남도 영광군
성격 의병장
성별 남성

[정의]

개항기 정읍 출신의 의병장.

[활동 사항]

이성화(李成化)[1882~1911]는 1882년(고종 19) 정읍에서 태어났다. 1907년 7월 일제가 헤이그 특사 파견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고종 황제를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자, 해산 군인·유생·평민들이 참여하는 후기 의병 항쟁이 전국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당시 고부군 우일면 가정리 신기[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우덕리 일대]에 거주하던 이성화는 김수만(金水萬)·김치덕(金致德)·신봉렬(申奉烈)·이순화(李順化)·전덕진(田德鎭)·정인팔(鄭仁八)·한팔복(韓八福)·홍성서(洪性西) 등 의병들을 규합하여 고부를 중심으로 정읍·태인·김제·흥덕·부안·순창·군산은 물론이고 영광 등 전라남도 지역까지 넘나들며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성화 의진은 10~30명 내외의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활동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연합하여 작전을 수행하였고,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주로 새벽에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한국인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던 일제의 식민지 통치 기관과 미곡업에 종사하는 일본인들을 응징하였고, 일제 경찰·헌병·수비대와 교전을 치르면서 활약상이 주변에 알려져 의진에 참여하는 의병들도 늘어났다. 1909년 이성화는 인근 지역의 다른 의병 부대와의 연합 전선 구축에도 노력을 기울였으며, 전해산(全海山)이 전라남도 지역에서 국권 회복을 위하여 조직한 대동창의단(大東倡義團)에 참여하여 선봉군장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또한 순창에서 신보현(申甫鉉)·노찬문(盧贊文)·이학사(李學士)·정성현(鄭聖玄)과 만나서 연합 전선 구축을 논의하였다. 1909년 4월 5일에는 순창 지역에서 활동 중이던 신보현 의진과 연합하여 순창군 가포곡(加布谷)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1909년 9월부터 시작된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전라도 지역의 의병들 가운데 상당수가 해산되었지만, 이성화 의진을 비롯하여 고부를 근거지로 활동하였던 박춘화(朴春化)의 의진은 소집단 형태로 끝까지 남아서 저항하였다. 남한 대토벌 작전에도 굴하지 않고 항쟁을 이어 가던 이성화는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었고, 전주 서문 바깥에 있던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몰래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지만 완치되지 못하고 1911년 7월 27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성화의 공적을 기려 200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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