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6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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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在龜 |
영어공식명칭 | Gim Jaegu |
이칭/별칭 | 준서(準瑞),만회(晩悔)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정원기 |
[정의]
개항기 정읍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개설]
최익현(崔益鉉)이 이끄는 태인의병에 참여하여 소모장으로서 활동하였다. 이후 임병찬(林炳贊)이 주도하는 독립의군부에 참여하며 항일 투쟁 활동을 전개하였다.
[활동 사항]
김재구(金在龜)[1886~1916]는 1886년(고종 23) 7월 19일 흥덕[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흥덕면 일대]에서 태어났다. 자는 준서(準瑞)이고, 호는 만회(晩悔)이다. 을사늑약 체결 후 이에 항거하기 위한 의병 항쟁이 전국에서 일어났고, 정읍 지역은 1906년 6월 4일 정읍 무성서원에서 최익현·임병찬 등이 중심이 되어 태인의병[병오창의]을 일으켰다.
태인의병이 봉기하자 인근 지역에서 1,000여 명의 유생이 참여하였다. 최익현 등 지도부는 좌·우익장, 선봉장, 후군장, 소모장, 좌·우종사, 화포장, 수포수, 서기 등의 조직 체제를 갖추었으나 실제 전투에서 총기를 사용할 수 있는 포수는 200~300명에 불과하였다. 이때 김재구는 고석진(高石鎭)·강종회(姜鍾會) 등과 함께 포수 30여 명을 이끌고 태인의병에 합류하였고, 소모장을 맡아 포수나 의병을 모집하는 등 소모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태인의병은 태인·정읍·내장사·구암사·순창 등지로 진군하면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일본 진위대의 압박과 최익현의 해산 지시로 순창객사에서 해산하게 되었다. 김재구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고석진과 최제학(崔濟學) 같은 중간 지도자들은 감금 4개월, 나머지는 태형 100대를 선고받았다.
태인의병 이후 김재구는 임병찬이 중심이 된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에 참여하였다. 대한독립의군부는 복벽주의(復辟主義)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태인의병에 가담하였던 사람들이 다수 참여한 비밀 독립운동 단체였다. 1912년 11월에는 고종 황제의 비밀 칙명을 받고 전라도 독립의군부 소모관(召募官)에 임명되어 강종회(姜鍾會)·김건(金健)·김진기(金鎭基)와 함께 흥덕 지역에서 의병을 조직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김재구는 1913년 2월 임병찬의 집에서 거사를 일으키기로 논의하였으나 3월에 발각되어 태인헌병대에서 조사를 받게 되면서 추진하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김재구는 고창 지역에서 대한독립의군부 활동을 지속하다가 1916년 7월 15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재구의 공적을 기려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