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6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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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炳贊 |
영어공식명칭 | Im Byeongchan |
이칭/별칭 | 시중(時中),중옥(中玉),둔헌(遯軒)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원기 |
출생 시기/일시 | 1851년 2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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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6년 6월 4일 - 임병찬 태인의병 봉기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1월 14일 - 임병찬 황태자 가례 기념으로 쓰시마에서 석방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1월 29일 - 임병찬 태인에서 국채보상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4년 3월 24일 - 임병찬 독립의군부 육군부장 겸 전라남북도순무총장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14년 5월 3일 - 임병찬 함경남도관찰사 겸 순무총장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14년 6월 13일 - 임병찬 거문도 유배 |
몰년 시기/일시 | 1916년 5월 23일![]()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출생지 | 상평리 -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
거주|이주지 | 산내면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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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지 | 정읍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성격 | 의병장|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 강점기 정읍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가계]
임병찬(林炳贊)[1851~1916]의 본관은 평택(平澤)이며, 자는 시중(時中)·중옥(中玉), 호는 둔헌(遯軒)이다. 아버지는 임용래(林榕來)이고, 어머니는 개성 왕씨(開城 王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임천 조씨(林川 趙氏)이고, 두 번째 부인은 여산 송씨(礪山 宋氏)이다. 동생은 임병대(林炳大)이고, 아들은 임응철(林應喆)이다.
[활동 사항]
임병찬은 1851년(철종 2) 2월 5일 전라도 옥구군 서면 상평리[현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남산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익혔고, 1867년(고종 4) 옥구의 향방으로 들어가 1872년 호장(戶長)이 되었다. 1882년에 가족을 데리고 태인현 산내면[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내면]으로 이주하였다. 태인으로 이주한 뒤 임병찬은 성리학 공부에 매진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했을 때에는 성리학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장남으로 하여금 함열 영소전(靈昭殿)에 있는 공자의 영정을 모사하여 오게 하였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주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원수를 갚을 방법을 생각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1906년 1월 19일 최익현(崔益鉉)의 제자 최제학(崔濟學)이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는 최익현의 편지와 고종의 밀지를 전달하였고, 2월에는 최익현이 찾아와 사제의 예를 행하고 임병찬에게 의병에 관한 일을 부탁하였다. 임병찬과 최익현은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창의하기로 결정하였고, 임병찬은 사재(私財)를 내어 무기를 만들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1906년 6월 4일 임병찬은 스승 최익현을 모시고 포수 등 100여 명과 함께 무성서원으로 가서 의진을 조직하였고, 최익현과 함께 태인향교를 근거지로 삼아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태인의병[병오창의]은 봉기 후 정읍·내장사·순창·곡성 등지를 순회하며 의병 세력 확산에 노력을 기울였다. 임병찬이 중심이 된 태인의병이 호남 지역에서 확산되자 일제는 군부와 진위대를 파견하여 태인의병을 진압하였다.
임병찬은 관군에게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이후 일본군 사령부에 넘겨져 최익현과 함께 쓰시마[대마도]에 유배되었다. 1907년 1월 14일 황태자 가례 기념으로 쓰시마에서 석방되어 귀국한 임병찬은 1907년 1월 29일 태인에서 단연동맹을 맺고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자 이를 분통해 하였고, 1910년 11월 12일 순창군 일본헌병소장이 일왕의 은사금을 받으라고 하자 거절하였다.
1914년 3월 24일 고종이 비밀리에 칙명을 내려 임병찬은 독립의군부 육군부장 겸 전라남북도순무총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이명익·이순익 등과 함께 독립의군부 편제를 조직하고 각도 대표를 선정하였다. 1914년 5월 3일에는 함경남도관찰사 겸 순무총장에 임명되어 독립의군부 조직을 북쪽 지역까지 확대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5월 23일 동지 김창식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조직을 자백하는 바람에 독립의군부의 국권회복운동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임병찬은 체포된 후 감옥에서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914년 6월 13일 거문도에 유배되었다가 1916년 5월 23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임병찬의 저술로는 1925년 아들 임응철이 편집하고, 1957년에 손자 임진(林鎭)·임경(林鏡)과 문규선(文奎先) 등이 간행한 『돈헌유고(遯軒遺稿)』가 전한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임병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