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6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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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陽洙 |
영어공식명칭 | Gim Yangsu |
이칭/별칭 | 김후일(金後一)l김성문(金性文)l유재(柳齋)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소성면 애당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순순 |
출생 시기/일시 | 1849년 11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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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6년 6월 4일 - 김양수 최익현 의진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김양수 파리장서 서명자로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30년 8월 7일![]() |
추모 시기/일시 | 2001년 8월 15일![]() |
출생지 | 두암마을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소성면 애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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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지 | 정읍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성격 | 의병|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 강점기 정읍 출신의 의병이자 독립운동가.
[가계]
김양수(金陽洙)[1849~1930]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호는 유재(柳齋)이다. 아버지는 김석구(金錫龜)이며, 김후일(金後一)·김성문(金性文)으로도 알려졌다.
[활동 사항]
김양수는 1849년(헌종 15) 11월 11일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소성면 애당리 두암마을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김양수는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으며, 1906년 최익현(崔益鉉)이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정하자 고예진(高禮鎭)·고석진(高石鎭)·고제만(高濟万) 등과 더불어 격문을 작성하여 8도에 배포하고 의병 규합과 무기 구입에 힘썼다.
1906년 6월 4일 최익현 의진이 결성되자 김양수는 고성열(高聖㤠)·고시덕(高時德)·고학진(高鶴鎭)·고제욱(高濟郁)·고화숙(高和叔)·고제영(高濟榮)·김청일(金淸一)·김평일(金平一)·이인숙(李仁淑)·황종관(黃鍾寬)·고하진(高河鎭)·최태근(崔太根)·강익문(姜益文)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김양수는 최익현 의진이 순창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구국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4년에는 7월에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의 참모관이 되어 1915년 4월까지 경상도·전라도·충청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적극 참여하였으며, 경상북도 성주의 유림 김창숙(金昌淑)이 중심이 되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탄원서[일명 파리장서]를 작성할 때 137명 중의 한 명으로 서명하였다. 김양수는 1930년 8월 7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양수의 공적을 기려 2001년 8월 15일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양수를 기리기 위하여 정읍시 소성면 보애길 368[애당리 779-4] 두암서원 옆에 애국지사 김양수 선생 추모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