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7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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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準承 |
이칭/별칭 | 성래(聖來),자암(紫菴)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원기 |
출생 시기/일시 | 1866년 11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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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890년 - 박준승 동학 입교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 7월 - 박준승 동학농민혁명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897년 - 박준승 동학 접주, 수접주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02년 3월 - 박준승 동학 도집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1월 - 박준승 천도교중앙총부 의사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 박준승 장성대교구장 겸 전라도순유위원장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15년 - 박준승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으로 이주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일 - 박준승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 경찰에 검거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0월 30일 - 박준승 경성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 선고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11월 5일 - 박준승 만기 출옥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 박준승 천도교 종법사 추대 |
몰년 시기/일시 | 1927년 3월 23일![]()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3월 1일![]() |
출생지 | 남산리 -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 |
거주|이주지 | 산외면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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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충무공원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수성동 6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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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독립운동가|종교인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민족 대표 |
[정의]
일제 강점기 정읍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가계]
박준승(朴準承)[1866~1927]은 1866년(고종 3) 11월 24일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성래(聖來), 천도교에서 사용하는 도호(道號)는 자암(紫菴)이다. 아버지는 박호진(朴昊鎭), 어머니는 변씨이다.
[활동 사항]
박준승은 7세에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하였고, 15세 되던 해인 1880년 김영원(金榮遠)에게 사숙하였다. 1890년 김영원이 동학에 입교하자 박준승도 같이 입교하였다. 1892년 삼례에서 있었던 교조신원운동 집회에 참석하였고, 이듬해인 1893년 원평에서 열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운동을 위한 집회에도 참여하였다. 1894년 고부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1894년 7월 임실에서 최승우·김영원 등 동학도들과 함께 참가하였다. 전주화약이 맺어진 이후에는 임실에서 집강소 운영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하고 동학에 가담한 사람들에 대한 색출이 있었지만, 박준승은 동학 교단 재건 및 포교에 노력을 계속하였다. 1897년 접주(接主), 수접주(首接主)가 되었다. 1902년 3월 도집(都執)에 임명되었고, 1903년 이병춘과 함께 전라남북도 책임을 맡게 되었다. 1904년 8월 동학 교단에서 문명개화를 목적으로 만든 진보회(進步會) 지회를 임실에 조직하였다. 진보회에서 실시한 흑의단발운동(黑衣斷髮運動)에 참여하기 위하여 머리카락을 자르기도 하였다. 이후 진보회가 친일 성격의 일진회(一進會)와 통합하여 친일 행위에 앞장서자 손병희(孫秉熙)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고 일진회에 참여한 사람을 제거하여 나갔다. 박준승도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 활동을 이어 가면서 임실군 천도교 교구장·교령·도훈(道訓)을 차례대로 지내고, 임실 천도교 교단을 재정비하였다.
1907년에는 자암(泚菴)을 도호로 받았고, 이듬해인 1908년 수접주에 올라 정읍·고창지구 천도교구 등을 맡았다. 1909년 1월에는 천도교중앙총부 의사원을 맡았다. 1912년에는 장성대교구장 겸 전라도순유위원장을 맡아 장흥·담양·광주·곡성·고창·무장·순창 지역을 책임지게 되었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이후 박준승은 1915년 교직 수행을 위하여 임실을 떠나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으로 이주하였다. 1916년 천도교 전라도 지역 지도자인 전라도 도사(道師)에 임명되었다. 1917년 10월에는 천도교 원로기구인 경도사(敬道師)에 추대되었고, 이후 도사실(道師室)의 도사(道師)를 역임하였다. 박준승은 천도교의 주요 직책을 맡으면서 종교를 통한 민족의식과 배일사상 전파에 노력을 기울였다.
1919년 2월 24일부터 27일까지 박준승은 천도교 도사로서 종료 보고 및 고종의 국장에 참배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권동진(權東鎭)을 만나 3·1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참여하기로 하였다. 천도교에서는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김상규(金相圭)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를 검토하였다. 이어 박준승은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吳世昌), 최린(崔麟), 권병덕(權秉悳), 김완규(金完圭), 나용환(羅龍煥), 나인협(羅仁協), 양한묵(梁漢默), 이종일(鍾一), 이종훈(李種勳), 임예환(林禮煥), 홍기조(洪基兆), 홍병기(洪秉箕)와 함께 천도교 측 민족 대표 15인 가운데 1인으로 선임되어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동시에 수교도(首敎徒)인 박영창(朴永昌)·김의규(金衣圭) 등에게 독립선언서 5,000매를 배부하여 장성·임실·남원 지역에서 궐기하게 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에 다른 민족 대표와 모인 박준승은 독립선언서를 읽고 “조선 독립 만세”를 삼창한 뒤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후 1920년 10월 30일 경성고등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1월 5일 만기 출옥하였다. 이후 1922년 천도교중앙종리원 감사정(監査正)과 종리사(宗理師)로 활동하였다. 1926년에는 천도교 최고 예우직인 종법사에 추대되었다. 1927년 3월 23일 사망하였다.
[묘소]
박준승의 묘소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수성동 615-1 충무공원에 있다.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갑성(李甲成)이 묘비문을 기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박준승의 공적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