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717
한자 金鎭浩
영어공식명칭 Gim Jinho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1년 9월 25일연표보기 - 김진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6일 - 김진호 태인 3·1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21일 - 김진호 광주지방법원 정읍지청에서 태 90도형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45년 7월 24일연표보기 - 김진호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김진호 대통령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김진호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태흥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지도보기
활동지 태인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지도보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정의]

정읍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진호(金鎭浩)[1891~1945]는 1891년 9월 25일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김진호는 1919년 3월 김현곤(金玹坤)·송수연(宋洙淵)·박지선(朴址宣)의 권유로 태인면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김현곤·송수연·박지선은 고종황제의 인산(因山)에 참여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3·1운동을 목격한 뒤 「독립선언서」를 지니고 내려와서 태인에서도 만세 운동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후 주변 사람들과 접촉하여 뜻있는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김진호김현곤·송수연·박지선·송한용(宋漢鏞)·송진상(宋鎭相)·오석흥(吳錫興)·송영근(宋榮根)·유치도(柳致道)·김순곤(金淳坤)·송덕봉(宋德奉)·김진근(金鎭根)·백복산(白福山)·김용안(金龍安)·최민식(崔民植)·김부곤(金富坤)과 함께 비밀 결사 15인회를 조직하고 태인 장날인 3월 16일을 거사일로 정한 뒤 각자 역할을 분담하였다. 송수연 등이 태극기 300매를 제작하였고, 당시 태인면사무소 서기이던 김현곤은 면사무소의 등사기를 이용하여 12일과 13일 밤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두었다. 김진호 또한 동지들과 함께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며 시위 동참을 촉구하였다.

김진호 등은 1919년 3월 16일 사람이 많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정오에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앞장서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면사무소 부근에서부터 시작된 만세 행렬에 주변의 사람들이 호응하였고, 상인들은 상점 문을 닫고 시위 행렬에 가담하였다. 수천 명으로 불어난 시위 군중은 곳곳에서 시위를 계속하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태인을 둘러싼 사방의 산꼭대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밤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 군중 가운데 일부는 기름을 묻힌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주재소 안으로 던지기도 하였다. 태인 3·1운동은 열흘 가까이 산발적으로 지속되었으며, 김진호를 비롯하여 80여 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진호는 1919년 5월 21일 광주지방법원 정읍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태(笞) 90도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김진호김현곤·박지선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견원과 접촉하여 군자금 모금에 힘쓰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5년 7월 24일 사망하였다.

[묘소]

김진호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에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진호의 공적을 기려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진호는 2022년 3월 ‘정읍시 이달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 정읍시청(https://www.jeongeup.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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