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718
한자 金玹坤
영어공식명칭 Gim Hyeong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0년 3월 3일연표보기 - 김현곤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6일 - 김현곤 태인 3·1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15일 - 김현곤 광주지방법원 정읍지청에서 징역 1년 6월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19년 9월 11일 - 김현곤 고등법원 상고 기각으로 형 확정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김현곤 출옥
몰년 시기/일시 1955년 1월 21일연표보기 - 김현곤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0년연표보기 - 김현곤 대통령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김현곤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태흥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박산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박산리 지도보기
활동지 태인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정의]

정읍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현곤(金玹坤)[1900~1955]은 1900년 3월 3일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서 태어나 박산리에 거주하였다. 1919년 당시 태인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던 김현곤은 고종황제의 인산(因山)에 참여하기 위하여 송수연(宋洙淵)·박지선(朴址宣)과 함께 상경하였다. 김현곤 등은 서울에서 3·1운동을 목격한 뒤 「독립선언서」를 지니고 내려와서 태인에서도 만세 운동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후 송한용(宋漢鏞)·송진상(宋鎭相)·오석흥(吳錫興)·송영근(宋榮根)·김진호(金鎭皓)·유치도(柳致道)·김순곤(金淳坤)·송덕봉(宋德奉)·김진근(金鎭根)·백복산(白福山)·김용안(金龍安)·최민식(崔民植)·김부곤(金富坤)과 함께 비밀 결사 15인회를 조직하고 태인 장날인 3월 16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각자 역할을 분담하였다. 김현곤은 태인면사무소의 등사기를 이용하여 12일과 13일 밤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두었다.

김현곤 등은 1919년 3월 16일 사람이 많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정오에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앞장서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면사무소 부근에서부터 시작된 만세 행렬에 주변의 사람들이 호응하였고, 상인들은 상점 문을 닫고 시위 행렬에 가담하였다. 수천 명으로 불어난 시위 군중은 곳곳에서 시위를 계속하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태인을 둘러싼 사방의 산꼭대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밤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 군중 가운데 일부는 기름을 묻힌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주재소 안으로 던지기도 하였다. 태인 3·1운동은 열흘 가까이 산발적으로 지속되었으며, 김현곤송수연 등을 비롯하여 80여 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현곤은 1919년 5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정읍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1919년 7월 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치안방해죄는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김현곤은 1920년 출옥한 뒤에도 김진호·박지선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견원과 접촉하여 군자금 모금에 힘쓰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55년 1월 21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현곤의 공적을 기려 1980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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