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7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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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在一 |
영어공식명칭 | Gim Jaeil |
이칭/별칭 | 상숙(相淑),양재(陽齋)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노석 |
출생 시기/일시 | 186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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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2년 - 김재일 흉년 때 정조 300여 석 희사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김재일 읍원정 중건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김재일 흉년 때 3,000여 원 희사 |
몰년 시기/일시 | 1950년![]() |
출생지 | 태흥리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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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지 | 정읍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성격 | 자선가 |
성별 | 남 |
본관 | 광산 |
[정의]
일제 강점기 정읍 출신의 자선가.
[가계]
김재일(金在一)[1865~1950]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상숙(相淑), 호는 양재(陽齋)이다. 아버지는 김한식(金漢植)이고, 부인은 조동순(趙東順)이다.
[활동 사항]
김재일은 1865년(고종 2)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서 태어났다. 1912년 흉년이 들자 정조(正租)[도정하지 않은 벼] 300여 석을 희사하여 군내의 빈민들을 구제하였으며, 몇 년 뒤에는 향교가 퇴락하자 거액의 사비를 들여 중수하였다. 1920년에는 읍원정(挹遠亭)[1855년 건립]을 중건하였다. 1924년 흉년 때에는 3,000여 원을 내놓아 부근 4~5개 면의 이재민(罹災民)을 구제하는 동시에 3~4년간의 호세를 대납하였고, 이후 각지의 수해 이재민에게 500~600원의 구제금을 출연하였다. 1928년 읍원정 중수비 2,000여 원과 읍원정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 재산으로 논 10여 마지기를 의연하였고, 성황당의 유지비 50원을 갹출하였다. 1930년에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사망한 문선명(文鮮明)[1877~1894]의 부인 밀양 박씨의 열녀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태인 강삼마을 출신 문선명은 태인 전투가 끝난 뒤 태인 수성군에 잡혀 장살당하여 죽었고, 부인 밀양 박씨는 문선명의 삼년상을 치른 뒤 자결하였다.
김재일은 광복 후에도 태인중학교[현 태인중고등학교] 설립에 3만 6000평의 땅을 희사하였고, 태인 노휴재(老休齋)를 중건하고 많은 전토를 희사하여 노휴재 유지 관리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김재일은 1950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26년 주민들이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읍원정 앞에 김재일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비석의 중앙에는 ‘사인 김재일 구휼 기념비’라 쓰여 있다. 또한 읍원정에서 내려가다 보면 왼쪽에 김재일 공적비가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