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인 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437
한자 泰仁戰鬪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조광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4년 11월 27일연표보기 - 태인 전투 발발
종결 시기/일시 1894년 11월 27일 - 태인 전투 종결
발생|시작 장소 태인 성황산 일대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산151-1[성황산]지도보기
종결 장소 태인 성황산 일대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산151-1[성황산]
성격 전투
관련 인물/단체 전봉준|손병희|김문행|유공만|문행민

[정의]

1894년 11월 27일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성황산 일대에서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을 맞아 싸운 최후의 전투.

[개설]

동학농민혁명 당시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금구의 원평으로 철수하여 11월 25일 원평 구미란[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에 있는 마을]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싸웠으나 다시 패하고 전라도 태인으로 후퇴하였다. 전봉준은 11월 27일 아침 8,000여 명의 동학농민군과 함께 성황산·항가산·도이산 일대에서 최후의 혈전을 벌인 후 패하자 후일을 기약하고서 휘하의 동학농민군을 해산하고 정읍으로 피신하였다.

[역사적 배경]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전봉준 부대와 청주성 전투에서 패퇴한 김개남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 부대에 쫓겨 남하하였다. 김개남전봉준은 11월 14일 밤 논산에서 합류하였다. 논산 전투에서 패하고 전주로 후퇴하여 군대를 나누어 전봉준과 손병희는 고부 방향으로 향하고, 김개남은 남원 방향으로 분산하여 이동하였다. 전주를 출발한 전봉준의 주력 부대는 금구현에 이르렀다. 동학농민군은 원평장터로 이동하였고, 일본군과 관군 연합군이 추격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원평[김제시 금산면 원평리]과 구미란 사이에 위치한 구미산(龜尾山)에 진을 쳤다. 동학농민군은 1894년 11월 25일에 원평에 들어온 일본군과 관군 교도중대에 맞서 산의 삼면을 지키며 ‘품자(品字)’ 모양을 이루어 방어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 진군한 일본군과 관군은 원평천 천변에 진을 치고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오후까지 동학농민군을 집중 공격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지형 상의 이점을 누리고 있었지만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동학농민군은 11월 27일까지 전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결국 패하고 태인 방향으로 후퇴하였다. 원평 삼거리의 점포와 민가 40여 호가 불탔고, 일본군과 관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경과]

원평 구미란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남쪽 20리[약 7.85㎞]에 위치한 태인으로 후퇴하였다. 1894년 11월 27일 전봉준은 손병희·김문행·유공만·문행민 등의 접주와 함께 8,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지휘하여 태인의 주산인 성황산·항가산·도이산 등 3개 산 9개 봉우리에 진을 쳤다. 장위영 대관 윤희영, 이규식, 교장 오순영, 장세복, 양기영, 이경진, 홍선경으로 구성된 관군 병정 230명과 일본 병사 40명은 태인까지 추격하여 왔다. 관군과 일본군, 그리고 동학농민군과의 사이에 11월 27일 오전 10시부터 약 12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관군과 일본군은 먼저 항가산을 공격하였다. 동서로 나뉘어 산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관군 90명은 일본군 20명과 함께 동학농민군이 있는 산 서쪽 길에서부터 공격하고, 관군 140명과 일본군 20명은 동쪽 길을 따라 진격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일제 사격을 가하며 저항하는 한편 성황산의 주력 부대에 깃발로 신호를 하려는 순간에 두 길목에 있던 관군과 일본군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빠르게 산으로 올라가 공격하였다. 당황한 동학농민군은 대열이 무너지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후퇴하였다가 다시 성황산으로 합류하였다.

1차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관군과 일본군은 성황산에 모인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회룡총을 연속으로 쏘며 크게 나팔을 불고 일제히 사격을 하며 저항하였다. 거센 저항에 물러선 관군과 일본군은 산을 내려와 군사를 재정비한 후 다시 네 갈래 길로 나누어 성황산을 포위하며 돌격하였다. 결국 동학농민군은 막아내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여세를 몰아 관군과 일본군은 동서로 경계까지 20리까지 추격하여 동학농민군을 총으로 쏘아 죽이거나 생포하였다. 이때 총을 맞아 죽은 동학농민군이 40여 명, 생포된 동학농민군이 50여 명이었다. 이에 비하여 관군과 일본 병사들은 아무도 상해를 입은 이가 없었다고 하였다. 농민군이 쏜 총알은 관군의 발밑에도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참패를 당한 농민군은 고부와 남원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전봉준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후일을 기약하면서 동학농민군의 해산을 선언하였다. 태인 전투는 동학농민군의 최고 지도자 전봉준이 지휘한 마지막 전투였다.

태인 전투에서 동학농민군과 고을 사람들의 피해가 컸다. 성황산에 있던 성황사(城隍祠)가 이때 불타 없어졌다가 뒤에 복원되었다. 성황산태인현의 진산으로 원래의 이름은 죽사산(竹寺山)이다. 태인 전투 전후의 태인읍의 사정에 대하여 『선봉진상순무사서부잡기(先鋒陣上巡撫使書附雜記)』의 11월 30일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금구현에서] 길을 떠나 17리[약 6.68㎞]쯤에서 태인의 석현점에 이르렀는데, 수십 채의 민가도 불에 타서 연기가 아직도 나고 있어 매우 비참하였습니다. 장위영 대관 윤희영과 이규식이 소대를 인솔하여 원평에서 후원하여 와서 바로 태인읍에 이르러 비류 몇 천 명을 토벌하였는데 쏘아죽인 자가 매우 많았고, 생포한 자와 노획한 자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태인읍에 묵을 때에 이 점사의 앞길에서 척후를 기다려 상세한 소식을 듣고 바로 행진하여 3리[약 1.18㎞]쯤의 태인읍에 도착하였더니 7~8호가 또 불에 탔는데 모두 비류가 흩어질 때에 불을 놓았다고 합니다. 몇 백호의 집과 각 관청의 건물들이 모두 비어 있었습니다.”

[결과]

태인 전투 패배를 마지막으로 전봉준은 남은 동학농민군을 해산시키고 정읍 입암산성으로 피신하였으며 손병희는 정읍·순창 복흥을 거쳐 임실 갈담(葛潭)으로 이동하였다. 갈담에서 최시과 함께 장수·무주·영동·황간을 거쳐 충청도로 향하였다.

[의의와 평가]

태인 전투는 동학농민혁명사에서 남접과 북접 동학농민군이 힘을 합쳐 싸운 마지막 전투이며, 태인은 전봉준 부대가 싸운 최후의 전투 장소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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