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암면 대흥리 면직물산업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0817
한자 笠岩面 大興里 綿織物産業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재영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직물 공장과 염색 공장.

[설립 목적]

입암면 대흥리의 면직물 공업은 보천교의 자급자족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보천교에서는 직물 공장을 비롯하여 염색 공장, 유리 공장, 농기계 공장, 갓 공장 등을 설치하였다. 왜산 물건을 쓰지 않겠다는 민족의식의 발로이자, 보천교의 ‘경제 공동체’이자 ‘종교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변천]

1922년 8월 발행된 『개벽(開闢)』에 필명이 ‘비봉산인(飛鳳山人)’인 진주 사람이 ‘정읍의 차천자를 방문하고’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 차월곡은 순연히 ‘조선산’으로만 된 옷을 입었다고 하였다. 보천교에서는 서양의 염색 기술을 도입하여 근대적 염색 공업을 권장하였다. 또 중공업의 중요성을 깨닫고 제철과 제련소 등을 건설하려고도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하지만 직물 위주의 염색 공업이 주가 된 것으로 보인다. 입암에 염색 공업이 발달하게 된 배경에 독특한 시각이 있다. 원래 교인들은 흰옷을 입고 다녔는데 교인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제는 흰옷에 푸른 물감을 뿌려 교인 검거에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교인들이 흰옷을 아예 푸르게 염색하여 입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 대흥리에서 염색 공업이 발달한 이유라고 보는 시각이다.

보천교에서는 도로를 ‘정자(井字)’ 형태로 나누어 뚫고, 도로가에 공장과 상가를 연달아 지어 교인들에게 무상으로 분양하였다. 이때부터 상가나 공장을 분양받은 교인들을 중심으로 집단 생산 체제에 들어갔으며, 잉여가치는 모두 교단에서 관리하였다. 그리고 노동의 강도에 따른 이른바 ‘집단 생산 차별 분배제’라는 획기적인 제도를 시험하기도 하였다.

1924년에는 일종의 노동조합인 기산조합(己産組合)을 설치하였다. 기산조합을 중심으로 산업 활동을 활성화하여 나갔다. 노동조합 제도는 매매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 아닌 일종의 계약과 조건에 따른 ‘임대’의 성격을 띠었다. 지금의 노조나 다름없는 생산자들의 권리 확보를 위한 조직이었다. 이로써 보천교에서는 일찍부터 노동의 개념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노자협조를 운동의 주요 명분으로 내건 것으로 보인다.

1923년 일어난 외화 배척·외래 물품 배격, 자급자족의 경제적 자립을 목적으로 하는 물산장려운동은 운동의 성격상 차경석의 자급자족운동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2023년 현재도 대흥리에서 직물 공장이 일부 가동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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