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0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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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後天開闢-民族宗敎, 普天敎 |
분야 | 종교/신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재영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지역에서 차경석이 창시한 종교.
[개설]
보천교(普天敎)는 차경석(車京石)[1880~1936]이 1909년에 창시하였다. 1907년 강증산(姜甑山)을 만나면서 동학운동을 시작한 차경석은 최제우(崔濟愚)와 강증산의 사상을 계승하여 1909년에 보천교를 창시하였다. 1918년 김연일(金蓮日)과 보천교 교인 박주석(朴周錫)이 제주의 민중을 이끌고 제주 중문리에 있는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소각하였고, 1920년대에는 국내 민족운동을 인적·물적으로 지원하였다. 1920년대 중반에는 만주의 민족운동 단체인 정의부(正義府)와 함께 군자금 모집을 시도하였다.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한 보천교는 1930년대까지 자작자급의 경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보천교의 민족운동은 고천제(告天祭)를 통하여 ‘시국(時國)’이라는 국호를 선포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일이었으므로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1930년대 일제는 보천교를 강제로 해산하였으나 보천교의 잔여 세력은 뿔뿔이 흩어져 후천선경 건설 운동을 이어 갔다. 보천교계 신종교 가운데 강원도와 황해도를 거점으로 하는 선도교(仙道敎)에서는 후천선경 신국가 건설을 선언하며 민중을 조직하였다. 전라북도의 황극교(皇極敎)와 미륵불교의 신인동맹(神人同盟)은 고천제와 수령제(受靈祭)를 통하여 민중에게 민족의식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일제의 패망을 기원하고 예언하는 비밀 집회를 이어 나가며 새로운 국가 수립을 시도하였다. 일부 지식인들은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 운동을 변화하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반계몽이자 무지몽매라 비난하였고, 일제는 이들의 민족운동이 체계적이고 이념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며 「보안법」이나 「치안유지법」으로 탄압하였다.
[보천교의 교명 변화]
‘보천교’라는 교명은 1909년에 차경석이 창시한 뒤 1922년이 되어서야 표명되었다. 그 전에는 태을교(太乙敎), 선도교(仙道敎), 흠치교(吽哆敎), 천자교(天子敎) 등으로 불렸다. 1922년 전후 차경석이 중심이 된 선도교나 태을교를 보통 보천교라 칭하였다. ‘보천교’라는 교명을 표명하기 전 일제는 차경석 일파를 선도교로, 김형렬(金亨烈) 일파를 태을교로 파악하였다. 차경석과 김형렬은 1914년까지 종교적으로 볼 때 강증산의 유지를 받드는 형제지간이었다. 따라서 일반에서는 이 둘을 혼동하였으나, 당시 언론은 차경석 일파를 ‘태을교’라고 표기하였다.
[일제의 민족종교 말살책]
일제 강점기 총독부에서 공인한 종교는 불교(佛敎)·기독교(基督敎)·신도(神道) 등이었고, 천도교(天道敎)를 비롯한 대종교(大倧敎)·보천교 등 한국 자생 종교는 전부 종교 유사 단체로 취급하였다. 공인 종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에서, 유사 종교는 경무국 보안과에서 치안 유지 및 보안 차원에서 취체·감독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일제가 민족 종교를 어떻게 탄압하고자 하였는지 잘 알 수 있다. 탄압의 가장 큰 피해는 대종교, 보천교, 천도교의 순이었다. 이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보천교가 민족적인 종교였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보천교를 포함한 범증산교의 성격이 민족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이 ‘단군과 수운과 증산’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데서 잘 나타나 있다.
[보천교의 후천개벽 사상과 정읍]
차경석의 개벽 사상은 최제우와 강증산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강증산은 최제우의 가르침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최제우의 개벽 사상을 계승하여 이상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강증산이 구도(求道)의 길에 나서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실패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강증산이 말한 해원사상(解寃思想)도 사실은 동학농민혁명에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 주기 위한 방편이었다.
강증산의 개벽 사상은 차경석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보천교에서 강증산이 화천(化天)한 1909년을 포교 원년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도 증산 사상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차경석이 최제우의 개벽 사상을 계승하였음은 일찍이 차경석의 아버지 차치구(車致九)[1851~1894]가 동학도가 되어 정읍 지역의 접주로 활동하였고,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과 혁명의 전 과정을 같이하였으며, 혁명의 주요 과정마다 아들인 차경석을 데리고 다녔다는 점에서도 그런 추정이 가능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차경석은 동학을 익히고 아버지 차치구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이어 받았을 것이다.
보천교에서 1924년 기산조합(己産組合)을 만들어 수공업을 통한 산업 진흥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것도 동학의 ‘유무상자(有無相資)’ 정신을 본뜬 것이었다. 최제우가 주창하였던 말세의 의미를 지닌 하원갑(下元甲)의 시대가 가고, 갑자년에 새로운 세상인 상원갑(上元甲)의 시대가 온다는 말을 차경석은 1924년의 ‘갑자등극설(甲子登極說)’로 구체화시키기도 하였다.
차경석은 최제우와 강증산의 사상을 바탕으로 1925년부터 1929년까지 지금의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 일대에 후천개벽을 상징하는 45동의 건물을 건축하였다. 본소의 중심 건물은 중앙 토(土)를 상징하는 ‘십일전(十日殿)’으로 명명하였으며, 중심지는 ‘종로’라는 지명을 붙였다. 십일전 안에는 「일월오봉도」를 연상케 하는 벽화를 내걸었다. 또, 주역(周易)이 바뀌는 후천 세상을 상징하기 위하여 십일전의 좌향을 남면(南面)이 아닌 북면(北面)으로 잡았다. 주변은 동서남북에 네 개의 대문을 설치하였고, 북문은 대궐의 남문을 본떠 ‘보화문(普化門)’으로 명명하였다. 임금의 덕으로써 백성들을 교화시킨다는 의미를 모방한 것이다. 십일전 앞에는 광화문 앞에 있었던 해태상을 모방하여 설치하였고, 바닥에는 박석(薄石)을 깔았다. 지붕은 천자를 상징하는 황와(黃瓦)로 이으려다 일본 황실에 대한 불경죄라는 명분을 내세운 일제의 간섭으로 실패하였다. 다만, 교단 간부들인 60방주의 회의 기관인 정화당(井華堂)만은 궁궐을 모방하여 청와(靑瓦)로 이을 수 있었다. 차경석은 후천개벽의 중심지로 정읍을 상정하고, 이와 같은 건물을 세움으로써 정읍이 다가오는 새로운 세상의 중심지임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보천교의 신정부 건설 운동]
보천교는 전라도에서 동학운동을 주도하던 차경석이 1907년 강증산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보천교는 일제 강점기 내내 24방주 또는 60방주라는 민중 조직을 통하여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려는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보천교의 활동을 국체(國體)를 부정하는 불온한 사상으로, 그리고 독립운동으로 규정하였다. 보천교에서는 1919년 경상남도 함양군의 대황산(大篁山)에서 첫 번째 고천제를 지낸 데 이어, 1921년에는 함양 황석산(黃石山)에서 국호를 선포하였다. 이를 계기로 차경석이 대시국(大時國)의 황제로 등극한다는 ‘천자등극설’이 확산되었다.
지식인들은 『정감록(鄭鑑錄)』의 예언에 근거한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 운동을 사기 행각이라며 성토하였다. 보천교가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일본 천황을 부정하고 식민지 상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일제는 1936년 보천교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이에 보천교의 잔여 세력, 즉 보천교계 신종교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 운동을 비밀리에 전개하였고, 일제는 이들을 민족주의가 농후하고 국체를 부정한 볼온한 비밀 결사 단체라며 탄압하였다.
[보천교의 민족·독립운동]
강증산 사망 후 자칭 ‘600만 교도’를 자랑할 만큼 증산교계 교단 가운데 가장 교세가 컸던 종교가 바로 보천교다. 보천교는 1909년에 창시되어 한국 종교사상 유례없는 극적인 흥망을 보여 주었다. 그 극적인 과정이 불과 10년 안에 일어났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급격한 성장을 시작하여 1922년에 거대한 보천교 성전을 착공하고, 1923년에는 수십만 명의 신도를 거느림으로써 사실상 한국 제일의 종교로 우뚝 선 것이다.
보천교는 교세가 확장되자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하였다. 독립운동 자금 지원은 그 액수와 일의 성격상 교주인 차경석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발각되었을 경우, 교단의 해체는 물론이고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임규(林奎)가 보천교로부터 5만 원을 얻어내 나용균(羅容均)에게 전달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21년에는 전주에서 발견된 11만 원의 군자금이 보천교에서 상해임시정부로 보내려는 군자금으로 파악되었다. 1922년에는 고려공산당에서 세계약소민족회의에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나용균(羅容均)·장덕수(張德秀) 등을 파견하고자 하였을 때 최팔용(崔八龍)과 장덕수를 통하여 여비 1만 원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보천교에서 김좌진(金佐鎭)에게 2만 원의 군자금을 제공하여 무장대의 편성을 가능케 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일들뿐만 아니라 보천교에서는 언론·출판·문화 사업의 일환으로 1923년 10월 월간지 『보광(普光)』을 창간하고 보광사라는 출판사까지 설립하였다. 이어서 당시 말썽 많던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인수하였다. 또, 자급자족을 위하여 입암면 대흥리 일대에 직물 공장과 염색 공장을 세웠으며, 갓 공장과 농기계 공장, 유리 공장도 세웠다. 대중문화 운동의 일환으로 10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편성되는 대규모의 ‘보천교농악단’을 조직하여 풍물을 적극 권장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정읍농악이다. 1924년에는 보천교 내에 일종의 노동조합인 ‘기산조합’을 조직하여 수공업을 통한 산업 진흥을 도모하였다. 한편, 신지식을 보급하기 위한 ‘보천교청년단’을 조직하고 여성 신자들의 교육을 위하여 ‘보흥여자사립수학’을 설립하였으며, ‘보천교소년회’를 조직하는 등 신교육과 소년 운동에도 적지 않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이 밖에도 실력 양성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민립대학설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으며, 일본으로 유학생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민족종교 보천교의 의의와 평가]
강증산은 동학의 개벽 사상을 이어 받아 ‘남조선비기’의 예언이 실현될 곳으로 정읍을 지목하였다. 이에 증산 사상을 계승한 차경석은 갑자년에 천자로 등극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민간에 널리 유포시키고, 후천개벽을 상징하는 거대한 본소 건축물을 정읍에 지었다. 보천교기(普天敎旗)가 빨간색 바탕에 노란 글씨로 우물 정(井) 자를 새긴 것도 오행이 상행하는 화생토(火生土)를 상징하는 것으로 후천개벽의 중심이 정읍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우물은 사방에서 물이 모여들었다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니 이를 확장하면 근원이자 중앙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보천교는 강증산의 종교운동과 동학의 교조인 최제우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는 종교적 활동을 폈으며, 창시자인 차경석은 최제우과 강증산의 종교적인 가르침에 그치지 않고 이를 정치적으로 확대 해석하여 각종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일제 강점기 억압과 착취로 짓눌려 있던 민중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보천교에서 벌인 독립운동의 결과, 민족운동 과정에서 구속 기소된 자가 424명이고, 이 가운데 154명이 현재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보천교는 일제 강점기 한국 민족종교를 대표하는 종교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보천교에서 건설하고자 하였던 종교 공동체이자 경제 공동체는 천부교(天父敎)나 통일교(統一敎)[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또는 태극도(太極道)와 같은 유사한 형태의 종교 코뮌으로 재창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보천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 영향은 앞으로도 여전히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