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301164
영어공식명칭 Well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재영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에서 물을 긷고자 땅을 파서 맑은 지하수가 괴게 한 시설.

[개설]

우물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를 상징하는 중요한 문화 요소 중의 하나이다. ‘정읍(井邑)’이라는 지명 자체가 우물 정(井) 자를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읍 내에도 마을 지명에 우물이나 샘이 들어간 곳이 15곳이나 있다. 예를 들어, 상교동에 있는 칠정(七井)은 마을에 일곱 개의 우물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또, 태인면 태흥리 도창현 아래 치마바위 근처에 있었던 유천(乳泉)은 ‘젖샘’이라고도 불렸는데, 1925년 도창현 아래에 도장을 세운 무극대도(无極大道) 도인들이 음용수로 사용하였으니 종교적인 연관이 있는 곳이다. 역사적인 인물과 관련된 우물로는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에 있는 전봉준 고택 앞에 있는 우물 등이 일부 남아 있다.

[정촌과 정해, 오늘날의 정읍]

정읍은 한 자만 파면 물이 나온다고 할 만큼 물이 풍부한 지역이다. 백제 때의 지명도 우물 정자를 쓰는 정촌현(井村縣)이었다. 오늘날 정해마을이 백제 때 정촌현이었음은 첨단방사선연구센터가 있는 신정동 일대에서 청동기 시대 집터가 발견되었고, 입암면 신면리 일대에서 마한 시대와 백제 시대의 마을 및 집터 유적과 분구묘 등이 발굴됨으로써 고고학적으로도 이미 증명되었다. 즉, ‘정촌(井村)’이 ‘정해(井海)’가 되고 오늘날 ‘정읍(井邑)’이 된 것이다. 정촌과 정해마을 그리고 오늘날의 정읍은 모두 우물 정자를 쓰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물의 변천]

우물은 돌로 담을 쌓아 축조된 우물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고 물을 긷기 위하여 도르래를 매달아 두레박이나 양동이로 물을 뜨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우물은 정읍 고부면 남복마을 한옥 마당과 영원면 흔랑마을 조씨가 우물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우물은 현재 고부면 소재지에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상권이 발달하였던 장문마을과 남복마을에 많이 분포하여 있다. 도시화가 빨랐던 시내권에서 우물과 샘을 보기 어렵고, 다만 퇴락이 빠르게 전개된 고부면장문리 장문마을 장터 근방의 민가와 남복리 남복마을 민가에는 우물이 많이 확인된다. 이러한 우물은 대체로 밭작물을 재배하기 위하여 남겨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르래로 물을 뜨는 방식의 우물은 펌프의 등장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곧이어 등장한 공기 압축을 통하여 물을 끌어올리는 펌프 방식의 우물은 정읍에서 우물을 작두로 풀을 써는 동작을 닮았다 하여 ‘작두시암’으로 불렀다. 태인 김부곤 가옥에 이 같은 형태의 대형 작두시암이 현재 남아 있다. 작두시암은 1980년대 전기모터의 등장으로 이내 사라지게 되었다.

1970년 무렵부터 농촌에서는 마을 공동으로 관정을 파서 마을의 높은 곳에 물을 저장하는 간이상수도의 물탱크[대형 수조]를 만들고 각 가정으로 수돗물을 보급하였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우물과 샘물을 이용하는 방식에서 수돗물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변모한 것이다.

[유명 한옥에 보존된 우물]

한옥이 보존된 경우에 우물이 함께 보존되는 경우가 많다. 현재 산외면 정읍 김명관 고택[국가민속유산, 1971년 지정], 상교동 안진사 고택, 고부면 은진사 고택 등에 우물이 남아 있다. 근대 한옥인 고부면 관청리 정읍 관청리 근대 한옥[국가등록문화유산, 2005년 지정]은 주방에 우물이 들어간 특이한 사례이다. 정읍 관청리 근대 한옥은 입암면 대흥리에 있던 보천교 간부 소유의 건물을 이축한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여러 가지 유래가 전하는 우물]

정읍을 상징하는 우물이 관내에 두 군데 있다. 하나는 신정동 정해마을에 있는 우물이고, 하나는 덕천면 하학리 가정(佳井)마을에 있는 동학농민군이 사용하였던 우물이다.

정해마을은 일명 ‘샘바다’로 불린다. 옛날부터 정자형 우물의 큰 새암이 있었다고 전한다. 촌로들에 의하면 옛날에 바다였다는 구전이 있으며, 풍수상으로는 마을 지형이 배의 형국으로 가정에서 우물을 파면 배의 밑바닥에 구멍이 뚫리는 형태이고, 배의 밑바닥에 구멍이 뚫리면 배가 침몰된다는 논리에 따라 예전에는 가정에 우물이 없었다. 따라서 각 가정에 우물이 없었기 때문에 마을 공동 우물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1973년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마을 길 포장 공사를 하면서 예전 위치에서 우측으로 약 5m 정도 이전되어 있던 것을 정읍의 상징 우물로 삼고자 1994년 7월 원래의 위치에 우물을 복원하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정읍사문화제 행사 시 채수 의식을 행하고 있다.

가정마을에 있는 동학농민군 우물은 가로 110㎝, 세로 110㎝ 크기에 정방형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1894년 4월 6일부터 7월경까지 동학농민군이 사용하였던 우물이며, 그 이전에도 마을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난간 받침대는 186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우물물이 서쪽으로 흐를 수 있도록 난간에 물길을 낸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군의 우물은 황토현 전적지와 가까운 거리에 있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가정은 ‘아름다운 우물’이라는 뜻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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