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301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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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북면 보림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세라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1년 - 「일재 이항의 조화」 『정읍의 전설』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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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1년 9월 25일 - 「일재 이항의 조화」 『정읍의 전설』 증보판에 수록 |
관련 지명 | 입점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북면 보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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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남고서원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북면 보림1길 392[보림리 880-1]![]() |
관련 지명 | 관동마을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고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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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이항|백부|호랑이 |
모티프 유형 | 영웅담 |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북면 보림리에서 이항의 일화와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일재 이항의 조화」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북면 보림리 입점마을에서 일재(一齋) 이항(李恒)[1499~1576]의 기이한 업적들과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이다.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항은 문무(文武)를 고루 갖춘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젊어서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즐겨하며 유협(游俠)으로 이름이 났고, 학문에도 깊이 정진하여 많은 유학자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이항은 남고서원(南皐書院)에 배향되었다. 이항을 존경하는 마을 사람들의 추숭과 자부심이 영웅담 같은 전기적(傳奇的) 이야기와 결합되어 전하고 있다.
[채록/수집 상황]
「일재 이항의 조화」는 정읍 출신 시인이자 수필가인 김동필(金東必)[1939~2006]이 1989년 채록하기 시작하여 1991년에 간행한 『정읍의 전설』에 수록되었고, 2001년 9월 25일 간행한 『정읍의 전설』 증보판에도 수록되었다.
[내용]
일재 이항은 어려서부터 품성이 강직하고 호탕한 가운데 용력(勇力)이 뛰어나 말타기, 활쏘기를 익혀 무관이 되고자 하였다. 27세 되던 해 큰아버지 판서공(判書公) 이자견(李自堅)[1454~1529]의 교훈을 받아 학문에 깊은 뜻을 두고 사서(四書)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이항은 칼을 옆에 꽂아 놓고 공부하였다고 한다.
이항에 관한 기이한 일화가 정읍시에 많이 전하는데, 그중 태인면 태서리 분동(粉洞)에 머물 때의 일이었다. 이항은 공부하기에 좋은 터를 하나 잡아 서당을 지어 보겠다는 마음을 먹던 중 갑자기 붓을 들고 손으로 튕겨 버렸다. 붓은 하늘을 날아 북면 보림리 입점(笠店)에 떨어졌다. 그 뒤 이항은 붓이 떨어진 자리가 서당으로서 좋은 자리임을 자주 말하였는데, 1576년(선조 9) 이항이 죽자 1577년 그 자리에 남고서원이 세워졌다. 남고서원이 세워지자 즉시 이항과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1537~1593]을 배향하였다. 1871년(고종 8) 조령(朝令)에 의하여 서원 철폐 명령이 내려지자 많은 주민들과 자손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이때마다 밤이 깊으면 칠보산(七寶山)에서 호랑이가 내려와 남고서원 주변을 돌면서 며칠 밤을 서럽게 울며 바위를 발톱으로 긁었다고 한다. 호랑이가 발톱으로 긁은 자국이 상당히 패었으며, 또 흙을 발톱으로 파헤쳐 큰 웅덩이를 이루었다 한다. 웅덩이는 남고서원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 있다.
또 한 가지는 북면 보림리 입점마을 앞에 큰 정자나무가 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 바위 두 개가 서 있다. 큰 바위는 어미바위, 작은 바위를 아들바위라고 부른다. 어미바위[지상 높이 약 3m, 둘레 2.6m]는 머리 모양이 여인상을 닮았고, 아들바위[지상 높이 약 1.5m, 둘레 2m]는 몸체는 둥그스름하나 위쪽은 뾰족한 편이다. 두 바위는 3m 정도 떨어져서 서 있다. 이항이 보림사(寶林寺) 뒤편 칠보산 용추봉에 올라 바위를 뽑아 던져 버렸는데, 이항이 던진 바위 두 개가 바로 어미바위와 아들바위가 된 것이다. 이항이 힘과 재주를 자랑하기 위하여 칠보산 용추봉에서 한 번 뛰면 꼭 어미바위 옆에 척척 떨어졌고, 거기서 다시 힘을 내어 태인면 쪽으로 뛰면 태서리 분동마을 냇가에 던져 둔 바위 앞에 도착하였다.
이항은 용력뿐만 아니라 학문의 수준도 높았는데, 이항의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많은 학자들의 몰려들었다. 갓을 쓴 선비들이 줄을 이어 찾아왔기 때문에 어미바위를 중심으로 하여 입점마을에 갓시장이 섰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입점’ 혹은 ‘관동(冠洞)’이라 불렀다. 이항의 높은 학덕을 흠모하는 많은 사람들과 자손들은 이항의 뛰어난 업적을 남고서원을 중심으로 하여 기리고 있고, 이항과 관련된 일화들이 여전히 전하고 있다.
[모티프 분석]
「일재 이항의 조화」는 영웅담설에 등장하는 영웅의 일대기 모티프가 드러나 있다. 보통 조선 시대 인물은 학문에 전진하는 문관이거나 무술에 도통한 무관이 대부분인데, 이항은 문무가 모두 능하고 임금에 의하여 여러 번 부름을 받은 뛰어난 인물이어서 보림리 입점마을 사람들에 의하여 신비화되고 영웅화되어 기인처럼 묘사되어 전한다. 이항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자부심과 존경심이 반영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